무능 귀족 - 성욕 마인 X 성욕 돼지(8)
세스트를 꼬드기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여자애 꼬시고 싶죠? 저쪽에 있는 영애들이 일발 역전을 노리는 쪽이거든요? 절로 가면 여자애들 호이호이 따묵을 수 있습니다」하고 꼬셔버리자 단박에 미끼를 물었다.
「너도 참 눈치가 좋다!」라며 뒤뚱뒤뚱 뛰어가는 그 모습이 살찐 나방과도 같았지만 덕분에 세스트와 오래 이야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쪽은 진짜 말 그대로 어떤 남자든 붙잡아서 신분을 체인지 하려는 쪽이니 그녀들에게 있어서 세스트 왕자는 어떤 의미론 우량인 상품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내 예상대로 여자들이 깨름칙한 환호성이 들렸고 그 뒤로 세스트의 그히히히 소리가 들렸기에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로키시의 파벌과 아이의 파벌이 한곳에 모이고 그 앞으로 레인 공주님의 파벌이 흡수될 것처럼 맞닿았다.
‘그럼… 떨거지도 떨어뜨려 놨겠다…’
물론 나도 그쪽으로 향한다. 누나가 누님일 시절 내 오해를 풀어주며 붙여준 몇 패거리들과 함께 그 장소로 말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자기 머리색과 맞는 드레스를 입은 엘피도 있다. 부관인 엘피는 드레스 차림인데 네티아는 여전히 갑옷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넷이서 대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에키시.”
“당신 왔어요? 왕자님은요?”
“셋이서 뭘 그리 재밌는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다른데 휙 던지고 왔지.”
일을 내던지는 게 너무 빠르다면서 쓰게 웃는 아이. 누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여자들을 사이에 두고 레인을 노려본다. 막 우리 앞에 도착한 레인이 자신과 우리의 파벌을 양옆으로 치워내고 거대한 고리를 만들었다.
“그럼, 저도 좀 끼어들어도 되겠죠? 레인 공주님.”
“네. 당연하죠. 당신이 없으면 아이가 불안해할 것 같고. 응분의 조치라 생각해요.”
“관대한 말씀 감사하네요.”
“흥…”
마음 같아서는 누나나 아이만 데리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겠지.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내면서 두 눈으로 썬을 쫓고 있는 것이 아주 불쾌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면 그런 티를 내면 안 될 텐데 억지로 봐주고 있다는 분위기를 풀풀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인내했다. 나는 이 썩을 여자에게 대놓고 화를 낼 정도로 열정이 있는 성격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타산적인 성격으로 욕망에 따라서 움직일 뿐. 그런 열정은 주인공인 썬이 내뿜으면 될 일이다. 안 그래도 이름도 태양 같고 재밌는 일이 되겠지.
이대로 이 여자 얼굴에 파이라도 안 던져주려나?
아니, 와인이라도 좋아.
어쨌든 뭐든 던져줘.
그런 기대를 가지고 썬을 봤지만 게임에 나오는 NPC처럼 무언으로 서 있을 뿐. 여전히 흰 정장 차림이 잘 어울리는 놈이었다. 이대로 자기 누나가 레인을 상대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인가 보다.
“아, 오래간만에 뵙는 것 같아요. 한동안 수업에도 안 나갔고 학우들과 마주칠 기회도 적어졌네요.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나요? 저는 의외로 괜찮게 지내고 있었어요.”
“네, 저도 잘 지냈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매일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죄책감으로 침대 위를 굴렀답니다. 보아하니 기분이 좀 풀리신 것 같은데 혹시 앙금이 남아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다시 사죄하겠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다고 몇 번이고 맹세할게요.”
“어머나, 괜찮아요. 사죄도 맹세도 제 취향이 아니랍니다. 저도 사람이라서 아직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레인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 부분만 잘 기억해두길 바라요.”
“그런… 가요…”
내가 썬에게 말도 안 되는 바람을 보내는 사이 짧게 몇 마디 오고 간다. 정말로 몇 마디뿐이지만 바로 아이의 본심이 드러나고 있다. 다른 파벌도 있겠다 「너 그때 강간 사건 일으킨 거 아직 용서 안 한다」라고 돌려 말하고 있구나. 대놓고 욕하지는 않았지만 당사자인 레인에게는 제대로 와닿았을 것이다.
눈치가 있는 몇 영애는 눈썹을 파도처럼 일렁이면서 화를 냈다가, 의아해했다가, 서로 의문을 교환하듯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아이의 말투는 돌려 말했으면서도 노골적이었으니 놀랄 만도 했을 거다. 바로 전만 해도 평범하게 인사하던 사이였는데 말투에 독이 심어져 있으니까.
“으, 으음, 로키시는 어땠어요? 잘 지냈나요? 요즘 얼굴을 안 보여주셔서… 걱정을 했는… 데…”
“잘 지냈어.”
“…………”
“…………”
“…………”
“…………”
“그것뿐인가요?”
“일일이 늘어놔줘?”
“큭…”
다시 술렁이는 파벌에 스며든 영애들. 특히 레인 쪽 영애들이 시끄럽다. 말없이 소란을 일으킬 수 있다니 역시 여자는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술렁이고 있다. 코가 쓸데없이 긴 모 도박 만화처럼 술렁술렁 상태.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로키시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는지 누나의 파벌도 소란 상태다.
‘이 타이밍에 레인이 온 거니까 그 이유는 명백하고. 이대로 쳐낼 생각인가. 당연한 선택이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다.’
좀 더 언어를 선택하라 하고 싶지만 상대도 상대다.
“후, 후흐, 괘,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요즘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대로 이야기 늘어놔주세요.”
“엉?”
“엣.”
대놓고 불쾌한 티를 풀풀 냈는데도 물러서지 않는다. 설마 했던 정면 돌파. 아이도 누나도 레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이거면 물러서겠지 싶었던 모양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저런 취급을 받고 명백히 싫어하는 날 앞에 두고 있는데도 저러다니.
‘역시 이 자리에 나오길 잘 했어.’
파이 던지기?
취소다 취소.
세스트를 보고 벌벌 떨지 않은 건 재미없었지만 이건 다르다. 아주 재밌어.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로 아양을 떨다니. 그러나 그 모습에 당황한 건지 우리 쪽 여자 둘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다면야…’
입을 다문 두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입을 연다.
“오래간만에 만났다고 자리가 조금 어색해진 것 같은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외부인이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세 분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어질 테고 다른 분들은 흩어지고요.”
“당신도 무관계하진 않을 텐데요…”
“하핫.”
너도 따라오라는 말투에 비열하게 웃어 답해줬다. 레인은 쥐고 있던 부채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숨겼고 그 아래에서 열받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쉽게 예상이 갔다. 너무 웃겨서 어깨가 들썩이는 게 멈추질 않는다. 저쪽은 열받아서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라 너무 상반되는 것 같다.
“들었죠?”
“네…”
“곧 돌아올게요.”
“알겠습니다.”
각자 파벌을 일시 해산. 사람의 고리가 벌떼처럼 흩어지고 우리들만 개인실로 들어간다. 그 안쪽에도 비쌀 것 같은 술이나 과일류가 늘어져 있지만 사람은 없다. 어두컴컴한 곳에 불이 들어와 노란빛이 방을 채웠지만 레인의 얼굴은 어둡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소는 띠고 있지만 얼굴에 암운이 드리워 있다. 세스트 저 돼지를 아예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 여태까지의 행보가 들키면 어떻게 꼬투리 잡힐지 아주 잘 아는 얼굴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타이밍에 올까보냐.
좋다, 좋아, 아주 좋다.
서로 속내를 숨길 필요 없는 상황이라니…
“재밌군. 왕성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괴롭히던 여자가 이젠 자기 오빠를 무서워해서 이런 곳으로 도망치는 꼴이라니. 평생 왕성을 못 나올 줄 알았던 무뢰배가 여기까지 쫓아온 기분이 어때?”
“큿… 에키시·블랙우드… 당신이란 남자는… 역시…”
“에키시로 됐어. 이 판국에 와서 뭘 숨길까. 아니면 공주님 취급받길 바라냐?”
“역시 당신과 만나는 게 정답이었어… 아이와 로키시를 저런 꼴로 만든 건 당신이야… 기숙사 내에서 대체 무슨 짓을…”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표정은 여전히 비열하고 악독하게. 수세에 몰린 저 빌어먹을 레즈 공주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다.
“무슨 짓이라니? 「반은 정답 반은 틀렸다」 그렇게 채점이라도 하길 바라냐? 애초에 아이를 이런 꼴로 만든 건 당신이잖냐? 여자랑 남자가 몸을 겹쳐 위로해주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고. 굳이 날 비난할 필요 있나?”
“아이나 로키시의 몸에 무슨 짓을 했나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런 말투 하지 말래도. 웃기잖아? 무슨 짓이라니.”
덕분에 입꼬리에서 입술이 내려오질 않는다. 당장이라도 크게 소리칠 것처럼 이빨이 드러나 있는 상태다. 너무 웃겨서 큰 소리를 내서 웃을 것 같다. 반대로 아이는 불쾌한 것처럼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으며 누나도 별생각 없는 건지 잔에 술을 따라 아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신들… 뭐라고 해주세요…”
“…………”
“…………”
말 그대로 레인에게 흥미가 없는 모습.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있는 레인에겐 큰 타격이다. 두 사람 다 일부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저러는 건지 나도 구분이 가질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그 중심에 앉았다. 양옆에 악역 영애와 공주님의 허리를 껴안는 것 같은 자세. 흥미 없는 것처럼 새침 떼고 있던 두 사람의 피부에 혈기가 도는 게 느껴진다. 한 번쯤 이런 자세를 해보고 싶었지만 설마 레인 앞에서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에키시 당신도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두 사람이라고요. 왜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당신만…”
“이제 끝장이니까 두 사람도 질린 거겠지. 아이는 원래부터 그리 긴밀한 교재가 있던 것도 아니고. 우리 로키시 누나도 당신에게 정이 떨어졌다면야 말 그대로 끝장. 레인 공주님의 뒤에는 이제 뭐가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잖아. 이제 세스트한테 넘겨지는 일만 남은 거 아닌가?”
“끝장? 세스트에 관해서까지…”
“우리 서로 모르는 척하지 말자. 다 알면서 그러기냐.”
“당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레인의 얼굴에서 마지막 가면이 벗겨지려고 한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세스트 그 돼지가 레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됐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그 돼지를 미끼처럼 흔들어 볼 뿐. 수풀 안에서 뱀이 나올지 벌레가 나올지는 모르겠다만 건들지 않고 방치할 이유는 없다.
“자기 오빠에게 강간당한 전적이 있으면서 자기는 여자를 범하는 걸 멈추질 않아. 그 손으로 대체 몇 명이나 되는 처녀막을 뜯어왔을까? 그 이전부터 개차반 난 성격으로 세스트보다 먼저 이 학교에 쫓겨나듯 할 뻔했지. 왕의 자비로운 성격과 평민들에게서의 인기가 아니었다면 세스트보다 심한 취급이었을 거라고.”
“……?!”
쥐고 있던 부채에서 따각 소리가 난다. 부러 뜨러진 부채의 잔재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추한 얼굴이 드러났다. 동공이 크게 떠지고 이빨이 드러난 그 모습은 여태까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추한 얼굴이었다.
“로키시… 당신이 나불거렸구나… 당신이라면…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말한 적 없어. 내 동생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왕족의 추태… 누구나가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흘려넘길 수 있도록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는데… 이제 와서 확신한 말투로…”
“누나의 말대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저 세스트 왕자와 친하잖아. 모르는 게 이상한 이야기지 왜 우리 누나를 나무라냐?”
“그 돼지 쪽이냐!!!!”
목소리도 아양 떠는 것에서 굵직한 무언가로 바뀌었다. 마치 용이 연상되는 그 무서운 표정에 아주 살짝 위축됐다. 이 이야기는 레인의 역린 같은 것. 이 모습을 예상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자후에 놀란 소리조차 냈겠지.
그러나 지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나도 다리를 꼰 상태로 누님의 어깨에 팔뚝을 대고 손목에 턱을 올린다. 자기 누나를 팔목 받침대로 쓰는 건방진 행위에 레인의 헤이트가 점점 올라가더니 결국 입술로 핏물을 뚝뚝 흘려대기까지 했다.
“정말 화나는 녀석이야… 당신도… 그 돼지 오빠도… 정말로…”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뭐가요! 나, 남의 약점을 잡고 있는 주제에!”
“내로남불이라니, 대단하네. 누가 당신 같은 거 약점 잡고 있을까? 레인 당신이란 공주에게 뭘 부탁할 생각도 없고 세스트 그 돼지랑 같은 취급 받을 이유도 없어.”
“그럼 왜 순순히 따라왔나요? 사람 허파 뒤집고 싶어서?! 나는 분명 이야기라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허파 뒤집고 싶어서라니, 정답이다.
대놓고 그럴 수 없으니 빙빙 돌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치고는 대놓고 놀리고 있는 것 같지만. 레인으로서는 불편한 상황일 거다. 왕위도 멀어져, 여자도 잃어, 마약 사건에 연루돼, 무슨 영문인지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저 돼지가 온 것도 그렇고, 내가 모르는 사건이 잔뜩 발생하고 있으니 사실 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놀리는 건 좋다만 이 녀석이 뭘 믿고 여기까지 온 건지 알고 싶다. 성격상 자기 잘못을 인지 못하는 건 알겠지만 세스트의 건은 아니잖아. 아니면 말 그대로 세스트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긴 건가.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좋다만.
입을 어떻게 열게 할까…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람을 물린 게 아냐. 단순히 한 마디 하고 싶어서 불렀을 뿐이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감이 오지 않아?”
“뭐, 뭘요? 당신에게 아이나 로키시에게 접근하지 말란 말 따위 들을 이유 없어요! 강간 사건이라면 제가 잘못했다고 했어요! 로키시도 그래요! 저, 저랑 싸울 이유가 없잖아요?! 평소처럼 절 후원해주기만 해도! 왕위를 잡은 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데! 당신이 원하던 그 가주 자리! 아주 당연하게 잡을 수 있는데! 왕성의 뒤에서 암약할 수 있는 권한이 손에 들어온다고요?!”
“레인, 이미 늦었어. 이제 난 널 후원해줄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애초에 가주에 대한 흥미가 사라져버렸거든. 네 뒷자리에 관한 것도 흥미 없어.”
“늦었다고요? 그럴 리가요?! 로키시 당신이 그럴 리가!!! 그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던 당신이 그럴 리 없다고요!!!!”
“이 세상은 불합리해서 원하는 걸 다 가질 수가 없어. 특히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 엄청 미움받는 경우도 있다고 이제 와서 알았어. 그래서 좀 타협을 했지. 그 타협 자체가 좀 비싼 대가긴 했는데 어떻게든 기어올라왔어. 그래서 이젠 다시 힘낼 기력이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알기 쉽게 말해주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알 거라고 생각 안 해~! 아하핫… 하… 하핫… 후우우…”
로키시 누나는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내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내 어깨에 자신의 뺨을 대고, 그대로 기대왔다. 그때 일을 떠올릴 때는 괴로운 듯했지만 지금은 마치 평온한 자리를 찾은 고양이처럼 골골 거리는 것이 이빨 빠진 표범이 연상됐다.
“모처럼 그렇게 된 건데. 내가 어떻게 됐는지 보여줄까? 에키시가 말하면 무서운 거 볼 수 있는데.”
“아이나 썬 앞에서 그렇게 한 건 예외 중의 예외다. 레인 앞에서 그런 꼬락서니 하게 할 생각 없어.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래? 그럼 됐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지 뭐…”
내가 딱딱하게 말하자 그걸로 됐다고 하며 빙그레 웃는 로키시 누나. 그에 따라서 아이도 반대쪽 어깨에 머리를 대왔다. 끝까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건지 눈까지 감고 조용히 숨소리를 내고 있다.
“아이! 아이! 아이·호모우?!”
“에키시 말대로 저 이제 할 말 없어요. 뭔가 할 말이 있으면 그를 통해서 해주세요. 보다시피 레인과 달리 긴밀한 관계가 됐거든요.”
“사과한다고 하잖아요! 적어도 이야기를 해요! 에키시로는 말이 안 통해요!”
“이 이상 뭘요? 그걸 말해줘야죠.”
“그건… 으읏…”
이쪽도 솜씨 좋은 농간꾼이다. 내 장단에 맞추는 건지 자기한테 말 걸지 말라며 전부 나한테 권한을 떠넘겨버렸다. 그러나 레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와 말이 통하게 된다면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당혹해하는 모습이 즐겁다. 불과 수일 전만 해도 기쁘게 날뛰고 있을 텐데 갑자기 발등에 불이 붙다니. 만약 내 일이라면 끔찍하게 싫었겠지만 이렇게 멀리서 구경하고 있으니 볼만한 구석이 있었다.
이쪽은 목숨도 보증했고, 전쟁도 대강 피했고, 여자도 얻었고, 이렇게 여유를 가지게 됐다. 저쪽은 자리를 잃었고, 강간의 위기에, 책임을 추궁당할 위기에 있다. 한때는 저 미친년의 행위에 깜짝 놀랐지만 이젠 정반대의 위치가 됐구나.
‘일단 마약을 어디서 얻었는지, 소재의 행방, 세스트의 건도 천천히 물어보도록 할까. 화를 내는 게 너무 강해서 작위적인 느낌도 나고. 경계를 풀지 않는 선에서 차근히 알아보자고.’
누나가 따라놓은 잔에 손을 대고 술을 마신다. 세스트 저 돼지가 온 것으로 인해 이게 사건으로 번질 건지 아니면 레인을 묶어둘 수 있는 족쇄가 될 건지 판단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궁금한 게 많지? 아이가 왜 이러는지, 로키시 누나가 왜 이러는지, 내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원하는 게 없다고 하는데도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지?”
“크윽…”
“그럼… 아이가 말하는 대로… 나랑 천천히 이야기나 하자고…”
오늘 안에 궁금한 것 절반 이상은 알아내주겠다고 마음먹은 후 잔 하나를 더 꺼내어 레인의 앞에 술을 따른다. 술병 끄트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잔 위로 술이 줄줄줄 흐르도록 아주 건방지게.
그리고 말한다.
「자리에 앉아라」라고.
그녀는 그렇게 열받은 주제에 의외로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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