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성욕 마인 X 성욕 돼지(1)
누나와 아이를 만나려고 기숙사를 가는 길. 여전히 저택인지 기숙사인지 정신병원인지 뭘 어떻게 부를지 모를 장소였지만. 거기를 가려면 이 부지 내 귀족 학생들이 이용하는 거리를 지나야 한단 사실은 변함이 없다.
화려한가 물어본다면 화려하다.
청결한가 물어본다면 청결하다.
그래서 좋은 곳인가 물어본다면?
NO.
단연코 아니다.
“오늘도 소란스럽습니다. 언제쯤 되면 이 거리는 조용해지는 걸까요.”
길을 걷는 도중 엘피가 그런 불만을 털어놓는다. 나도 엘피도 평상복. 나야 늘 정장이니 이젠 말할 것도 없고 엘피도 요즘엔 로브 대신 우리 가문의 문양이 박힌 원피스 차림이 기본이다. 마치 가볍게 날아다닐듯한 샌들 소리를 따각따각 내는 것과 달리 나오는 말은 불만뿐. 내 옆에 있다가도 옆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는 참지 못했던 건지 인상을 구기면서 타인의 행패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이 거리 특성상 조용해질 리 없지. 권위뿐인 귀족에, 돈과 신용은 있는 상인에, 행동거지뿐이라면 귀족 이상인 기사가 섞인 장소다. 누가 누구의 심기를 건들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잖아. 시끄러운 게 정상이야.”
“그러나 참… 365일 매일매일 잘도 저러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엘피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때 그 분수대와는 꽤 떨어진 장소. 파이와 케이크를 먹었던 거리에서 상인 하나가 곤란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부를 꽤 축적한 건지 번쩍거리는 장신구에 입고 있는 검은 치파오도 고급 원단으로 보였고 이름뿐인 귀족보다는 잘나가고 있다는 게 딱 봐도 보인다.
이 거리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러나 블랙우드 가문의 그것과는 약간 동떨어진 칙칙한 색. 마치 중국인처럼 귀엽게 빵머리를 하고 있다. 아마 멀리서 온 상인인 것 같았지만 몸에 걸친 적당한 장신구에 행동거지도 그렇고 눈앞에 있는 귀족보다는 훨씬 더 교양이 있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 곤란합니다… 가게의 아이들에게 손을 대려 하시다니… 우리 상점에서 노예는 팔지 않으며 이 나라의 국법으로도 금지돼 있을 터… 하물며 여기에서 일하는 종업원을 데려가려 하신다니…”
“아앙~? 누가 요즘 그런 걸 신경 쓴단 말이야~? 이놈도 저놈도 법이 안 보이는 곳에서 미인을 축적하고 있단 말이다아~! 어중이떠중이도 그 지랄을 떠는데 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냐아~?”
“그런 게 아니라… 상식… 상식을 따지고 있는 겁니다만…”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구나 싶어서 무심코 시선이 갔다. 서브 히로인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닮았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이 땅에서 상인들에게 이상한 강요를 하는 건 좋지 않다. 귀족이 얼마나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땅에서 상인의 뒤를 봐주는 건 레즈우 왕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그 사실은 상인들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여기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왕가에 인정받은 증거. 그러니 상대가 누구라 해도 상인 측이 쩔쩔 매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쩔쩔 매다니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이라도 힘든 일이다.
‘대체 누구길래 아침부터 이러는 거냐. 여자 상인도 그렇고 상대측 얼굴도 봐야겠어.’
상대 측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혹시나 싶어서 좀 더 가까이 가보니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제길, 괜히 봤다!」싶은 기분에 역겨움마저 올라온다.
“상시이익~? 그게 뭐냐~! 나는 레즈우 왕가의 사람이라고~! 그 법위에 있는 남자란 말이다아아아아~!”
“왕자님?!”
“그래! 나야말로 레즈우 왕가의 정통 후계가 중 하나! 세스트·레즈우다아!”
바가지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금발, 커다랗게 찐 이중 턱, 눈 근처에도 살이 쪄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지 자연스럽게 실눈인 돼지남이 거기 있다. 자기 분수에도 맞지 않는 황금으로 번쩍번쩍 거리는 옷차림도 그렇고 털이 가득 난 붉은 망토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나는 그 썩을 돼지를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레인·레즈우의 천적이며 그 어떤 빗치도 함부로 손대지 않을 남자다. 나도 나름 악명을 쌓았지만 진정한 의미론 저 돼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일부로 욕을 들으려고 저렇게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위험한 놈. 레인·레즈우의 천적이자 트라우마 생성기…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세스트·레즈우.
최악의 왕자가 왔다.
“정말~! 요즘 상인들은 이년이고 저년이고 예의가 없다아~! 이 고귀한 나를 보고도 한눈에 알아차리질 못하다니이~!”
“힛?!”
“주위 놈들도 그래~! 너희들은 뭘 보고 있나~?! 재미난 것이라도 있나~? 썩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그히히히히…”
그 여자 상인이 고개를 여러 번 저으면서 불쾌함을 드러냈다. 땀에 쩐 그 손이 상인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몰려 있던 인파에도 큰 소리로 일갈하자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왕족이 저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그 자리에 있다가 걸리면 후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련님…”
“응, 빨리 떠나자.”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다. 저런 바보 왕자와 엮여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냐? 아니, 단언하도록 하지. 절대로 없다.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엘피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그 자리를 뜨려 했다. 다행히 저쪽은 날 못 본 모양이고 망토를 흔들어 엘피의 몸을 감싸는 형식으로 인파를 빠져나갔다만…
「으아아아아! 그만둬 주세요! 싫다니까요?! 정말로 싫다고요!」
「좋지 아니한가, 좋지 아니한가, 이 내가 상인 따위를 품어주는 거라고. 너는 외형도 있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구나. 이대로 내 첩이 되어라.」
「제발 이러지 말아 주세요?!」
「그흐흐흐, 이 앙큼한 년. 뭘 그리 튕기나? 과연, 그렇군, 부끄러운 거지이~? 괜찮다~! 괜찮아~! 그흐흐흐흐~! 이 몸의 넓은 사랑으로 모두 품어줄 테니까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이쿠야, 가게 안으로 도망치나아~? 술래잡기라니 운치를 아는 년이다~! 여봐라, 얘들아, 저 년을 잡아 내 앞으로 끌고와라아~!」
「네!」
「알겠습니다!」
「하, 하지 마! 싫엇! 오지마아아앗!」
「그히히히히히히힛!!!!」
인파가 흩어지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능욕극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마치 썬과 보리스의 싸움에 끼어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내 안에 있는 최현준이란 놈이 「끼어들어도 득 볼 게 없으니 아이나 누나랑 떡치러 가지 그래?」라고 속삭이고 있지만 영 화가 나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상대가 서브 히로인 닮은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못 구해줄 것 없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와 저 돼지 새끼는 안면이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귀찮은 일을 하면 저 여자도 구해지고 나도 저 돼지가 여기까지 온 목적을 알 수 있고 만만세다.
그러니까…
어쨌든…
‘정의감 같은 게 아니다 그거 아니냐?’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돼지 새끼랑 못 엮여. 정의감 하나로 저 새끼랑 엮일 수 있을 거 같냐?’
‘하긴.’
나 자신에 있는 그놈과 타협을 봤다. 「그럼 저 돼지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정보 수집하고 가자」라고 하니 녀석도 금방 납득했고 나 자신도 납득했다. 여자애가 구해지는 건 덤이다. 내가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게 아니다.
“도련님?”
“안되겠다. 엘피, 먼저 기숙사로 가서 나 좀 늦는다고 해라. 로키시 누나는 데려오지 말고. 아이도 여기에 데려오지 말아. 물론 썬도 안된다. 누굴 데려오든 100% 소란감이야.”
“또 저분이랑 엮이시려는 겁니까?!”
“여기까지 발을 옮겼으면 어차피 얼굴 마주 보게 될 거야. 지금 여기서 나타나는 게 베스트다. 저 녀석의 성격상 우리 쪽 기숙사나 아이 쪽 기숙사에도 발을 옮길 테니 그에 대해 설명해서 미리 대비하도록 해.”
“느으윽~?!”
“알겠지?”
“크윽, 아, 알겠습니다…”
“그래. 착하다 우리 엘피.”
개처럼 머리를 긁어주자 기쁨과 불만이 섞인 얼굴이 완성됐다. 날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일단 명령을 따라준다는 표정이었다. 다리도 거의 나았고 홀로 기숙사까지 아무 문제 없이 갈 수 있으리라.
“네티아, 너도 따라가라.”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새끼 여자 냄새 맡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거든? 들키면 너한테까지 손댄다. 네가 있으면 소란만 일어난다 그거지.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기까지 내 근처에 오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반면 네티아는 조목조목 따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충견력으로 따지면 엘피보다 위다. 건물 그림자 속에서 스윽 나타난다 싶으면 다시 스윽 들어가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호위 기사로서 여러모로 배우고 왔다 들었지만 역시 재능 넘치는 아이구나 싶다.
‘엮이고 싶지 않다.’
‘나도.’
‘근데 가만히 있으면 저쪽에서 오는 건 사실이잖아.’
‘그렇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자.’
‘음.’
혼자인데도 두 사람인 것처럼 서로를 다독인다. 정신을 가다듬고 혹시나 얼굴에 쓴 표정이 깨질까 봐 신경을 쓴다. 그런 가벼운 확인이 끝난 후 다시 등을 돌려 사람이 거의 다 떠나간 인파에 몸을 던졌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그 광경과 마주 보았다. 마침 그 돼지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상점에서 끌고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히히히히힛!!! 나왔다! 나왔어! 요노오놈~! 이 나를 귀찮게 하다니~! 앙큼한 년이로다아~!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몸으로 교육을 베풀어줘야지이이~? 그힛힛!”
“누가, 누, 누가아, 살, 살렷?! 살려줘어엇!!!”
기사들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 바둥바둥거리는 검은 머리의 상인. 딱하게도 예쁘게 만든 빵머리가 풀어져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흘러내렸다. 여기가 막장인 세계가 맞긴 하다만 저 왕자에게 저기까지 해도 될 권한은 없다.
분명 어디론가 끌려가기 전 누군가의 손에 제지 당하겠지. 오늘은 왕자의 감시역이 없을 뿐 정말로 능욕극이 일어날 확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거다. 게다가 기사들도 하고 싶지 않은 움직임으로 느릿느릿하다.
‘좋은 타이밍이다.’
마침 딱 좋겠다 싶어서 평소보다 천박한 얼굴을 드러내고 드디어 그 돼지의 눈앞에 띄는 곳까지 발을 옮겼다.
“어우야, 이건 또 무슨 짓입니까? 세스트·레즈우 왕자님?”
“누구냐?! 으으음~?! 음~?! 오, 에키시! 내 친우 에키시 아닌가?!”
“소란이 났다 싶어서 와봤더니, 이거 참…”
거의 다 사라진 인파. 그 사이에서 당당히 걸어왔으니 내가 눈에 띄었겠지. 단번에 날 알아보고는 기분 나쁜 미소를 띤 금발 돼지. 방금까지 그 여자에게 열중하고 있었으면서 나를 보면서 기뻐하다니 썬의 건도 그렇고 이 녀석마저 호모로 보여서 필요 이상으로 기분 나빴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세스트 님. 그날 창관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이네요. 최근엔 편지도 못 보내드려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정중히 인사를 한다. 레인 공주님에게 했던 것보다는 친근한 느낌으로 위아래가 정해진 친구처럼 말이다.
“오오~! 그히히힛! 아니다, 아냐, 우리 사이잖느냐아~? 안 그래도 몇 없는 내 친우 에키시여어~! 겨우 편지가 무슨 대수라고오~! 여기서 이렇게 만났으면 됐다아아~! 역시 친구는 친구~! 이런 곳에서 우연찮게 만나버리는 구마안~!”
다행히 그게 잘 먹힌 건지 돼지 측도 아주 좋아했다. 말꼬리를 늘리는 것이 파이가 연상됐지만 그건 그녀에 대한 실례겠지 싶어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뒀다. 나와 이 녀석과의 관계는 보다시피 친구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돼지가 우리 영지에 놀러 왔을 때 아버지께서 이 녀석의 비위를 내게 맞추도록 명령한 적이 있고 그때 친해졌을 뿐.
보다시피 여자를 아주 좋아하니까 마음 크게 먹고 내가 자주 다니는 창관에 소개해준 게 계기였지. 그 후 감동이라도 한 건지 나와 친해져버려서 악평에 박차가 가해졌다. 즉, 이 돼지와 나는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악평 소유자들. 소문이 지워지기 시작한 학교 내면 몰라도 외부에선 여전히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을 테니 그 상황은 여전하다.
“만나서 기쁜 건 알겠습니다만 여기는 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하죠.”
“나는 딱히 여기에서 이야기해도 상관 없다마아안~?! 그히히!”
“아침이니 햇빛도 내리쬐고 있고. 기사들이 입은 갑옷 안도 뜨겁게 타고 있을 테죠. 자비로운 세스트 왕자님께서 부하를 내버려 두는 짓 따위 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는데요?”
“아아, 아아, 아, 그런 건가! 아무려어엄~! 그럼! 당연한 소리를! 에키시의 말대로다아~! 그럼 이 상점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이~!”
“탁월한 선택입니다, 왕자님. 역시 나중에 이 나라를 이끄실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히히히힛!!! 그렇게 띄워주지 말 거라아아~! 그힛힛~!”
칭찬도 뭣도 아니다. 심지어 비꼰 것조차 되지 않았지만 잘 먹히긴 했다. 역시 머리가 비어버린 놈이다. 반면 기사들은 내 말에 조용히 감사를 표하며 머리채를 잡은 상인을 놓아줬고 그녀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세스트 왕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몰래 귓속말을 해줬다.
‘호, 혹시… 도와주신… 건가요…’
‘쉿, 안으로 들어가서 따르는 척만 해라. 바보처럼 띄워주는 척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역시 상인답게 눈치가 빠르다. 분명 어디서 잘 나가는 사람이겠지만 오늘은 운이 안 좋았구나. 거대한 상회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감시역을 통해 세스트 왕자에게 벌이 내려질 터인데 저 바보는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크게 웃고만 있다.
“그나저나 참 대단한 우연입니다. 마침 산책 중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왕자님에게 아부 떨 생각은 아닙니다만 정말로 운명이 이어준 것 같군요.”
“그히히힛!!! 괜찮다, 괜찮아, 오래간만에 만난 거니 나도 기쁘다아~! 내 주위에는 내 고상한 취미를 알아주는 놈이 없어서 말이지이~! 이렇게 밖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정말로 오래간만이라서어~! 그히히히힛!!! 얼마든지 친하게 지내도 좋다고오오~! 네 뒤라면 내가 꽉 봐줄 테니 이름을 써도 상관없다아~! 그힛힛!”
“하하하하! 그거 참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렇지이~! 그렇지이이~?! 그히히히히히히히!!!”
쓸모없는 보증이다. 이 나라에서 사는 모두가 돼지의 악평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그 말에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난 세스트 왕자님의 후원을 받고 있다!」라고 소리쳐봤자 왕성에서 제대로 기어 나오지도 못하는 돼지 새끼를 두려워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겉으로는 무서운 척하면서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기한다. 이 돼지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열심히 띄워줬다. 방금 내가 말을 건 상인은 눈치 좋게 음료수를 가져오는 둥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돼지 옆에 앉으며 손뼉 소리까지 내고 있다. 띄워주는 척만 하라 했을 뿐인데 잘도 눈치 있게 행동했구나 싶어 칭찬을 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히히히히히힛!!! 뭐냐, 뭐냐, 너도 드디어 내 위대함을 눈치챈 거냐아~? 이 귀여운 녀어어어언~! 그히힛! 크힛!”
“아, 넷! 넷! 대단하세요! 아하핫!”
“그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이 녀석은 힘은 없지만 사고뭉치다. 게다가 레인이 관련되면 이젠 그 귀찮은 행동력이 배로 늘어난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은 딱 좋았다. 기분이 좋아지면 그 이상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이 녀석이니까 이대로 묶어두면 된다.
나와 상인은 눈을 마주 본 채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무언가가 통한 것 같은 기분으로 녀석의 기분을 맞춘다. 이 돼지 녀석은 「여동생을 보러 온 김에 잠깐 감시역을 따돌려서 바람을 쐬고 있었지!」라며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점점 말해주었다.
이 새끼, 감시역이 없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냐!
오래간만에 왕성 밖으로 나왔다고 감시역을 따돌려?!
‘진짜로 위험한 새끼네. 예전에 그런 일을 벌여서 왕성을 못 나오게 됐을 텐데. 그 일을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감시역을 따돌릴 생각을 하다니. 이 이후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을 못 하는 건가?’
내 얼굴에 티가 났을 리는 없다. 여전히 웃으면서 돼지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데 이 녀석은 또 내가 바라는 것 같은 말을 내뱉어왔다.
“그히힛! 걱정하지 말라고오~! 이번에 이 학교에 입학하게 돼서 말이다아~! 감시역에게 혼나는 일은 있어도 이 지역에서 나가는 일은 없을 거다아아~! 그히히히히힛!”
“이, 입학? 여기에 말입니까?!”
“그래애~! 놀랐지이~?! 아무래도 내가 왕성에 있으면 안 된다 싶은 건지 밖으로 내보내지 뭐냐아~! 그히히힛! 역시 아버지도 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거다아~! 그힛! 나 같은 희대의 걸물이 왕성에만 박혀있다니 역시 안될 일이지이~!”
‘결국 왕성에서도 내쫓겼다 그거 아니냐?! 미친! 미친!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발상이 가능한 건데?!’
기쁘게 말하는 것과 별개로 내 얼굴과 상인의 표정이 암운이 드리운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도 못 한 표정. 게다가 자기 이야기인데 돼지 본인은 전혀 자기 잘못을 모르고 있다. 마치 「난 아무 잘못 없는데롱데롱!」이라며 놀리는 것만 같다.
‘또, 또, 또?! 또 짐 덩어리가 늘었다고오오오오?! 게다가 여자도 아니라 이 돼지 새끼?! 전혀 기쁘지 않앗! 진짜로! 요만큼도! 전혀어어어어엇!’
겉으로는 웃으면서 내심 절규를 끝없이 반복했다. 좆같기 그지없는 현실. 아직 내게 해피엔딩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레인, 너 어쩌냐…’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레인 공주님에게 명복을 빌며 입술을 꽉 씹은 채 일단 이 돼지의 비위를 맞추며 나머지 정보를 뽑아내기로 했다. 다행히 입은 가벼웠고 녀석은 내가 질릴 때까지 자신에 대해 털어놓아 주었지만. 그 떠드는 게 생각 이상이었던지라 나와 상인이 크게 지쳤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