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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 귀족 여체 하렘-63화 (63/199)

 에피소드 6 - 배신 루트 〈암약 완료〉

에키시든, 아이든, 썬이든, 파이든, 와이든, 레인이든, 로키시든, 그 정체 모를 첩자든,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폭탄이 터져 나오고 있는 와중에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엘피는 아니다. 폭탄이고 뭐고 거의 상식인 포지션인 그녀가 이 이상 터트릴 일은 없었다. 상식인 치고는 입이나 생각이 좀 험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큐트할 정도다. 그런 그녀보다 좀 더 근본적인 부분. 이 사태의 원흉이 된 그 흑막 놈들의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

에키시와 그 일행이 사전 교섭을 끝낼 무렵, 그 금발 첩자가 부하들과 함께 여자들을 처리하고 있을 무렵, 썬이 자기 보지에 들어간 마스크를 의식하면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에키시의 냄새에 흥분하고 있을 무렵, 이번 사태를 만든 그 흑막들도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흑막이랄지, 상인이랄지, 돈에 눈이 먼 바보들이랄지, 약을 몰래 팔아대고 있는 말단 녀석들은 대부분이 맨 후자의 경향이 컸지만. 이 약을 유통한 자들은 맨 전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 이젠 그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학교 구역 내에서도 아직 개발이 덜 된 공사 구역. 정확하게는 쁘띠 왕성과 정반대 편의 구석진 곳에서 한층 더 기어들어가면 나오는 쓰레기 처리장. 이 학교 구역 자체가 왕도 내에 성벽을 하나 더 둘러싸서 만들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장소가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이 쓰레기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다른 성문을 통해 왕도로 빠져나가니 약을 유통하는 그들에게 있어선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보고는 방금 말한 대로 노라. 몇 번이고 확인한 결과 상대는 그 파이파이 1급 연구원과 와이와이 2급 연구원. 하드 교단의 중진으로서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이노라.”

“흠, 하드 교단의 중진이냐. 귀찮은 놈들이 왔군. 벌써 냄새를 맡고 올 줄이야.”

그런 쓰레기 처리장의 안. 그 쓰레기 장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쓸법한 자그마한 오두막. 그리고 그 오두막 지하실에 파진 공간에 그녀들은 모여있었다. 한두 번 온 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로 모두 하나같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로브로 몸을 숨기고 있지만 몸의 굴곡으로 그 전원이 여성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정보를 말한 것은 검은 가면을 쓴 여자. 그리고 그 정보를 듣고 대답한 것은 갈색 가면을 쓴 여자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파란색 가면을 쓴 여성이 그 말을 듣고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들이 향한 곳. 묵은 곳. 뭘 했는지 자세히 설명 바람.”

그 고민도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짧고 차가운 기계적인 말투로 검은 가면을 쓴 여성에게 질문을 촉구한다. 한쪽은 노라 같은 말투, 또 한쪽은 거만함, 마지막은 기계적인 말투. 전원이 에로 게임에 나올법한 싸구려 캐릭터성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실제로 에로 게임 세계관이지만 너무 노골적이다.

“숙소는 그 아이 공주의 저택이노라. 내부는 모르겠지만 외부의 경비가 삼엄한지라 지인이 아니라면 출입조차 불가능하게 보이노라. 그리고 그 에키시·블랙우드와 안면이 있는 건지 케이크를 먹는 장면도 포착되었다지. 로키시·블랙우드나 레인 공주의 건도 그렇고 우리의 일이 점점 새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노라.”

“말단 녀석들인가? 아니면 레인 그 쓰레기 빗치의 짓인가? 조금만 더 하면 유통을 좀 더 활발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디서 냄새를 맡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손 뗄 수는 없는데…”

검은 가면이 자랑스럽게 자신이 수집해온 정보를 말하지만 갈색 가면은 화가 날 뿐이었다. 방 안에 어질러진 휘황찬란한 보물들이 지금까지 그녀들이 해온 짓을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대부분이 귀금속류에 여성용 장신구라는 걸 생각하면 돈 대신 물건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참모. 우리 정보상이 저렇게 말하고 있다. 넌 무슨 방안 없냐?”

“발 구르지 말아줬으면 함. 아직 문제없음. 저쪽이 우릴 잡으려고 했다면 벌써 기사들이 몰려들었을 것. 레인 공주는 약을 즐기고 있고 아이 공주는 피해자. 그러나 저쪽은 학교 내에서 기사들을 단체로 움직일 만한 권한이 없음. 만약 우리를 잡기 위해 움직인다고 하면 정보망에 바로 걸림.”

“소수 정예로 여기까지 찾아올 가능성은?”

“아직까진 전혀 없음. 아니면 정보가 부족하던가. 내가 할 말은 그뿐. 괜한 걱정임.”

그 말에 파란 가면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에키시 일행은 아직 이 사람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오히려 레인이 그녀들과 손절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중. 참모라 불린 파란 가면의 판단은 옳았다.

“참모 말처럼 침착하게 있는 것도 나쁜 판단은 아니노라. 그녀의 의견대로 우리를 수색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움직인다면 내 정보망에 걸리겠지. 온다고 해도 너라고 하는 멧돼지를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드노라. 소규모로 몇 명이 찾아온다고 해도 네 주먹의 먹잇감이 될 뿐 아닌고~? 힛힛힛힛히…”

“귀찮은걸. 난 누구 눈치를 보는 게 딱 질색이야. 레인 그 빗치가 아이 공주에게 약을 쓴 게 원인이라며?”

“그렇노라. 하드 교단과 호모우 왕국은 밀접한 관계에 있으니 필시 아이 공주가 불렀을 것이야. 레인이 벌인 일 때문에 하드 교단이 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것 이외에는 짐작 가는 게 없으니 이 이상 고민해도 무의미하지.”

“동감.”

“힛힛힛, 봐라, 참모도 긍정했다. 평상시 그리 말이 없는 그녀가 확신을 내려 준 거다. 긴장을 푸는 게 어떠냐.”

“학교 자체가 작음. 네 정보망은 확실. 아이 공주가 다른 이유로 하드 교단을 불렀을 리 없음.”

“흠… 그렇다면 결국…”

“그래, 빠르든 늦든 들키노라. 하드 교단을 불렀으니 우리가 유통하고 있는 약에 관해서 짐작을 했단 소리고. 그 약을 썼던 레인 공주를 들볶아서 확증을 얻어내려고 하는 단계노라.”

검은 가면을 쓴 정보상의 말에 이빨을 갈아대는 소리를 낸 갈색 가면의 여성. 그러나 여전히 참모는 침착한 숨소리를 내며 불만을 표하고 있진 않았다.

“뭐야, 사람 놀라게 하기는. 어이, 참모. 우린 이제 어떻게 하면 되냐?”

“거점 이동을 제안함. 레인 공주의 부하가 우리 위치를 거의 다 파악했음. 레인이 잡힌 순간 이 장소도 들킴. 말단의 경우 이번에 받을 폐인 여자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전원 손절할 예정.”

“그 피해자들 말인가?”

“이 나라의 하급 귀족들은 나와 참모의 생각 이상으로 천박했노라. 돈도 한 탕 벌었겠다 폐인이라고 해도 예쁘장한 여자들을 쥐여주면 입다물고 떠나가주겠다 판단된 거지.”

정보상과 참모의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갈색 가면의 여성이 불편한 듯 말했다.

“노예상에 팔아서 한탕 할 생각은 없었던 거냐? 굳이 그걸 배포하다니… 굳이 약을 주면서까지 여자를 회수해놓고…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래도 돈에 관해 집착이 있었던 건지 그런 의견을 내놓았지만 정보상은 물론 참모도 각하했다. 참모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였고. 정보상은 그녀의 욕심에 놀란 건지 고개를 여러 번 저으며 크게 거절하는 티를 냈다.

“거절함. 약물과 달리 사람은 너무 눈에 띔.”

“그렇노라. 자본은 충분히 벌었고 이 이상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노라. 돈은 물론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커넥션도 충분히 얻지 않았느냐. 뭐가 그리 초조해서 돈을 요구하나? 나도 참모도 손을 뺄 타이밍을 확실히 잡았거늘.”

두 사람이 거절하자 입술을 삐쭉이는 갈색 가면.

“그렇지만…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의미도 있잖냐…”

“지랄 NO. 과유불급임.”

“말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한쪽만 해라!”

“빡대가리 공주. 어중간한 욕심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길 바람.”

“제길… 이 꼬맹이가…?!”

“아! 또 시작인가?! 그만두거라아~!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보들이더냐~?!”

참모의 말에 그녀가 미칠 듯 날뛰려 했지만 정보상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런 대화는 늘 있는 일인지 그 분노도 금방 풀렸지만 참모가 조용히 코웃음치는 걸 보고 다시 날뛰는 둥의 행위를 반복하게 되었다.

“큭…”

“어, 어쨌든! 이번 일은 그런 게지! 우리야 목적을 달성했으나 저쪽은 헛걸음을 했을 뿐이노라! 레인 공주를 사용해 아이 공주를 폐인으로 만드는 건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리 목적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니!”

“그래, 안다고, 알아.”

“알면 참모에게 화내는 것 좀 그만둬! 참모도! 공주를 놀리지 말아! 저 녀석 머리에 금방 피가 오르잖아! 이런 곳에서 날뛰게 하지 마!”

“흥, 말투 고장 났음. 정정 바람.”

“이 녀석이 진짜아아아~?!”

정보상이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참모는 아픈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오히려 때린 정보상만 팔이 아팠던 건지 부어오른 손을 쥐고서 「아그그그그극~?!」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머리에서 깡 소리가 났으니 로브 안에 무언가를 껴입고 있었던 것이리라.

“공주에게 맞을 때를 대비. 머리에 투구. 안정적임.”

“왜 도발하나 했더니이이이~?!”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은 정보상도 까고 보니 바보였다. 세 명이서 너무 친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했다. 약물을 팔아 여자들에게서 금품을 받아내 사람까지 넘겨버리는 조직답지 않은 대화다.

“어쨌든 이야기는 정리됐음. 공주. 장난쳐서 미안함. 금방이라도 일 처리를 끝내놓겠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텐데.”

“내 손은 어쩌고 공주에게만 사과하는 거냐앗?!”

“모름. 네가 먼저 쳤음. 내 잘못 아님. 등신.”

“으그으으으으~?!”

조직이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대화. 그게 가족인지 가좆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미 그들이 에키시나 아이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번 사건에서 생길 피해자는 레인과 로키시 뿐. 그녀들이 조교 당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진 않았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 엔딩 1 - 암퇘지 공녀 로키시 -->

에키시가 기숙사를 떠나고 이틀째.

먹구름과 함께 비가 오는 점심.

검은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식당에 멍하니 있다.

“…………………”

“히익?!”

잔을 들고 가만히 있는 로키시. 그러나 시종들은 비명을 지른다. 에키시가 떠난 당일 새벽을 기준으로 하루를 잡았기에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키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애초부터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일을 제일 싫어하는 여자.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동생을 기다려 주는 척했지만 그 가면이 뚜뚝 뚜둑 떨어져내린 것이다.

차나 다과를 가져온 시종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목줄로 걸어놨던 엘피에겐 살의를 보내었다. 에키시를 감시하라고 붙여놨더니 그 역할도 못하고 먼저 잠에 빠져 그 아이를 놓쳐버렸으니 로키시의 화가 얼마나 났을지 쉽사리 예상되리라. 물론 엘피의 방 입구를 지키게 했던 네티아도 마찬가지. 벌은 주지 않았지만 꾸지람을 받아 근신 중이다.

‘아직, 아직, 아직, 아지이이익, 아직도 안돌아오다니이이이이!!!!!’

로키시의 가슴이 불탄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이 부근에서 에키시가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봤을 거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애초에 이 상황에 자기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고백은 로키시 쪽이 먼저 했지만 이건 좋지 않은 상황이 확실하다.

게다가 로키시는 모르고 있다. 그때 당시 아이와 말싸움을 했을 때, 레인이 바보짓을 해서 사과하러 갔을 때, 그 외에는 제대로 만난 적도 없으니. 아이가 에키시를 진심으로 노리고 있다는 것 따위 모르는 거다. 끽해봤자 쁘띠 왕성의 연회에서 몇 번 봤을 뿐인 그녀의 마음을 로키시가 알 리 없다.

이미 끝장난 상황…

그것을 본인만 모른다…

여차하면 「임신하면 되겠지」 같은 어리숙한 생각으로 버틸 뿐. 그러나 어렴풋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다. 어쩐지 체크메이트를 당한 것 같은 불안감에 그녀의 주위 공기가 벌벌 떨리고 근처에 있던 시종들도 어깨를 떨어댔다.

“아, 아으, 아, 아가씨? 로키시 아가씨?!”

바로 그때일까? 로키시가 발을 굴리며 저쪽 기숙사로 직접 쳐들어갈까 고민하는 와중에 남자 시종 하나가 복도 끝에서 달려왔다. 에키시도 없고 상황도 이런 데다가 우중충하게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그 발소리조차도 듣기 싫은 건지 로키시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조용히 다녀! 죽고 싶어?!”

“그, 그그, 죄송합니닷! 하지만 지금 보고드려야 할 게 생겨서엇?!”

생김새나, 머리나 눈의 색도, 레즈우 왕국 평균의 남성. 식당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로키시를 보고 크게 당황하고 있다. 지금의 로키시가 얼마나 기분이 안 좋은지 잘 알기에 목숨을 걸고 말을 거는 듯했다.

“뭐? 무슨 보고? 나 지금 기분 안 좋은 거 알면 어지간한 건 알아서 처리하………”

“그게! 에키시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그 말에 식당 테이블이 크게 흔들린다. 혹시나 자신의 머리가 찢어지나 싶어서 시종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로키시가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분노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공존하고 있을 뿐.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가열 차 있었다.

“에키시가 왔다고?!”

“네, 네, 넷…”

“언제?! 어디에 있는데!!!”

“그게… 방금 막 오셨습니다… 비를 맞고 돌아오신지라… 아직 입구에서 머리를 닦고 계십니다만…”

“큭! 이 못된 동생이이잇?!”

대신 폭력을 휘두르지 않은 만큼 그 분노를 에키시에게 향한다. 당장이라도 식당을 빠져나가 날뛰려고 했지만 이 남자 시종 의외로 간이 큰 건지 그녀의 팔을 잡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주인을 말렸다.

“자, 잠깐, 기다려 주세요! 로키시 아가씨잇?!”

“미쳤어? 이거 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에키시 도련님의 상태가 이상한지라?! 그래서 황급히 온 거라고요!”

“아앙?!”

로키시의 날카로운 음성에 시종이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머리가 작살나겠구나 싶었지만 로키시의 손이 날아가기 직전에 멈췄다. 아주 잠깐이지만 싸늘한 바람이 분 식당. 그 시종은 뒤늦게 눈을 떠 자신이 살아있음을 눈치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약간, 미치신 것처럼, 완전히 얼빠져 계셨습니… 다…”

“얼빠져 있다고? 무슨 의미야! 똑바로 말해!”

“으… 이… 입고 계신 정장이 뜯겨져 있고… 여기저기에 칼자국이나… 구타 당한 흔적도… 게다가 본인도 힘들어하고 계신지라…”

“크, 카아, 칼자국?! 구타아~?! 뭐, 뭐뭣, 뭐라곳?!”

다행히 시종의 말이 제대로 전해진 건지 로키시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든다. 꽉 쥔 주먹이 힘없게 풀렸고 분노에 찬 얼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사라져서 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의 표정이 되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돼리라. 그렇게 만나지 말라고 한 여자와 밀회하러 나갔다가 이틀 만에 돌아온 동생 놈이 상처투성이가 됐다고 하니 말이다. 어이가 없는 건 물론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분노가 차올라서 당장 에키시에게 뛰어가야겠다는 생각만 들게 됐다.

“의사는?! 약이랑 밥! 몸은 닦아주고 있다고 했지?! 욕실을 준비해! 어서!”

“다른 분들이 의사를 부르러 갔습니다… 욕실도 준비 해놨고… 식사는 무엇으로 할지…”

“진짜?!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식사? 수프류! 어쨌든 따뜻한 걸로! 나는 에키시한테 가볼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판단해!”

“알겠… 습니다…”

그 남자 시종은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자신이 살았음을 확신 후 안도했다. 로키시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 바닥을 굴렀지만 다른 시종들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안심시켰고. 로키시는 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든 말든 복도를 달려 기숙사 입구로 향했다.

펄쩍펄쩍 날뛰는 것이 마치 토끼 그 자체. 기쁜 건지,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로키시 본인도 자기감정을 모른다. 어쨌든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자기 기분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일단 에키시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에키시!!!!”

헐레벌떡 뛰어 도착한 기숙사 입구에는 많은 시종들이 몰려 있다. 하나같이 안쓰러운 소리를 내면서 에키시를 걱정하는 소리를 낸다. 뒤에서 로키시가 달려오는데도 떨어지질 않으니 그의 상태가 어떤지 벌써부터 어렴풋 보여주는 듯했다.

“누… 님…?”

“에, 으에, 에키… 시…?!”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에키시·블랙우드가 서 있다. 자기 누님의 이름을 부르나 거기엔 힘이 없다. 비를 쫄딱 맞고 온 건지 머리와 옷이 젖은 건 물론 옷가지가 찢어져 칼에 맞은 것 같은 상처 자국이 여럿 있다. 거기에 입가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건 물론 광대뼈 부근이 푸르게 달아오른 것이 여러 번 얻어맞은 것 같은 모습.

누나로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그렇고…

로키시의 마음이 찢어지기엔 충분한 광경이다…

‘이이이, 이게, 이게, 이게 대체?! 왜 에키시가!!! 어째서 이런 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잇!!!!!’

내심 절규하는 것이 입 밖으로 흐르고 끄으으으으 소리를 내면서 미간 사이가 모여 주름이 생겨난다. 두 눈은 부릅떠져 쥐고 있던 검은 드레스 끝자락이 손가락 힘에 의해 살짝 찢어져 나갔다.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를 죽일 기세였기에 에키시를 걱정하고 있던 시종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거리를 벌려야 했다.

“이게에… 어… 떻게… 된… 거야…?”

로키시가 입술을 씹으며 상황을 확인. 에키시 바로 옆에 붙어있던 흰 가운을 입은 노인이 그를 진찰하고 있다. 그는 엘피의 건 때문에 이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던 의사지만 그 조차 이번 일이 당황스러웠던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빨리 설명해!!!”

“네…”

그는 길게 난 흰 수염을 스윽 만지고는 침착하게 말한다.

“보다시피 누군가에게 크게 얻어맞으신 것 같습니다. 아마 메인은 둔기류에 날붙이는 덤이겠지요. 구타는 물론 약물이 투입된 흔적도 있습니다. 상처 자체는 별것 아니지만 약이 제일 큰 문제군요.”

“약물?”

“아마… 지금 이 거리에 돌아다니는 그것과 비슷한 것이리라 사료됩니다…”

“뭐?! 뭐라는 거야! 그, 그럴 리 없잖아! 그게 무슨…”

로키시가 그 말을 부정하지만 현실은 무정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에키시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뻥 뚫린 눈으로 자기 누님을 바라보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약 때문에 몸이 안 좋은 건지 남자 치고는 색기 있는 숨소리를 내고 있다.

“보기보다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악효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겠지만 상처에 흥분감까지 섞여 열이 심하게 올라 계십니다. 이런 날 비를 맞은 것까지 생각하면 지금 당장 씻긴 후 눕히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아마추어라도 알 정도로 위험한 상태. 로키시의 분노가 싹 가라앉았다. 열이 식다 못해 차갑게 됐지만 그 표정에는 여전히 초조함이 드러나 있었고. 당장이라도 에키시를 껴안아 달래고 싶은 것을 참고 시종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럼 당장 내 방으로 옮겨… 음식도 침실로 가져와…”

“네…”

“에키시 님께 무리 없도록 조심히 하겠습니다…”

“부디 안정하시고 기다려주시길…”

이런 상황에도 제일 침착한 것은 시종들. 오히려 로키시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를 하더니 머리를 숙인 후 에키시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 뒤를 늙은 의사가 따라가 에키시를 치료할 준비를 했고. 로키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며 다시 솟아오르는 분노를 삭혀야 했다.

‘레인? 또 레인의 짓이야? 아니, 아닌가? 그 약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레인뿐만이 아니야… 그렇다면 다른 영애들이 이런 짓을… 수상스러운 약이 돌아다닌다고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설마 에키시의 몸에 저런 걸 투입하는 사람이 생기다니…’

처음에는 레인을 의심했지만 그녀의 직감이 곧장 그 추측을 각하했다. 그렇다고 얼굴도 모를 영애를 의심하는 것도 웃겼고. 지금 로키시의 직감이 가리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아이 공주님과 그 패거리들이었다.

‘대체 뭐야… 그 녀석들이 왜 갑자기 이런 짓을… 그럴 리 없잖아…’

그들이 에키시에게 약을 투입하고 저렇게 때려 팰 이유가 없다. 애초에 에키시 자체가 그렇게 쉽게 맞아 넘어갈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마치 강간이라도 당할뻔한 것 같은 처참한 몰골에 로키시의 의문과 분노가 더욱더 깊어져 간다.

“큭…”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몰려오는 분노에 성을 못 참았다. 로키시는 벽을 두드리는 둥 성질을 부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 에키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입고 있던 드레스는 자신의 손으로 찢어버렸기에 평소처럼 네글리제 차림으로 말이다. 그 모습은 요염한 검은 고양이 같지만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렇게 시간은 흐르나 역시 기다림은 그녀에게 맞질 않는다. 그냥 자기가 돌봐줄 걸 그랬나 싶어 후회하고 있다. 네글리제 차림으로 침대 위에 누워서 다리를 덜렁덜렁 움직이는 것이 화가 영 풀리질 않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머지 시종들이 침대 부근으로 음식을 가져오지만 누구 하나 로키시의 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여 시종들 대부분이 로키시에게 감화돼 있거나 사랑을 하는 둥 레즈비언 속성이 많으면서도 오늘만큼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죽는다」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당연했다.

화가 난 로키시를 내버려 두고 호다닥 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고양이를 만난 쥐와도 같지만 그녀는 그런 시종들의 행동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에키시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자기 동생이 언제 올지 생각하면서 다리를 굴리는 것이 심기가 나아질 조짐이 전혀 없다.

마치 영원히 화낼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그게 진짜 영원히 가진 않았다. 그렇게 수십 분을 기다린 후 동생이 다 씻고 나와 치료까지 끝마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상처 부위에 붕대 같은 것을 감아 가운 같은 것을 입고 에키시가 들어왔지만 로키시의 얼굴에는 슬픔뿐이다.

“에키시…”

“아… 누님…”

“괜찮아? 어디 부러진 곳은 없고? 이리 와, 일어서 있지 말고 앉아봐.”

“네…”

다행히 지성이 돌아와 있다. 숨소리도 안정돼 있고 상처 흔적도 붕대 같은 걸로 가려져 있으니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로키시는 그런 동생이 걱정되는 건지 그를 침대 위에 앉히고는 유리 구두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에키시도 평소와 같은 묘한 건방짐 없이 누님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다.

“상처는 어때? 몸은? 식사는 했니?”

“상처는 괜찮습니다만… 위에 뭔가 들어갈 것 같진 않습니다…”

“그, 그래?!”

“………”

식탁이 공중을 난다.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니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큰 소리가 났지만 로키시도 에키시도 침대 위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진 간이 식탁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에키시는 머리를 숙인 채 어지러운 몸을 들고 있을 뿐이고 로키시는 그런 동생을 지탱하면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서로 마주 본지 불과 수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로키시의 고민은 그 이상으로 깊었다. 어째선지 아주 슬픈 얼굴로 멍하니 있는 남동생. 그런 아이를 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나무랄 수도 없었고. 그저 동생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로키시의 걱정을 간파한 것처럼 에키시가 입을 열었다. 로키시가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에키시가 뜸 들인 것도 아니고 그저 로키시의 생각이 길었을 뿐이지만. 로키시는 제정신을 차린 후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수용할 생각으로 에키시의 말을 긍정했다.

“누님…”

“그, 그래, 이 누님 여깄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응? 이 누님께 전부 말해봐.”

안절부절, 안절부절, 안절부절…

로키시가 떨어대는 걸 비웃기라도 한 듯 낮게 깔아뭉개진 에키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퍼져 나왔다…

“보복을… 당했습니다…”

“보, 보복? 누구에게?!”

“아이 공주님… 그리고… 그 기사들…”

“뭣?!”

서로 간 말이 짧았다. 그 말로는 로키시가 궁금해하는 답이 나오질 않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대답이기도 했다. 로키시의 직감은 아까부터 아이 공주를 말했고 에키시의 입으로 그것이 확정됐으니 말이다.

“어, 어째서?!”

그럼에도 로키시는 또 물어보았다. 에키시가 입을 연 이상 그녀가 캐물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에키시도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며 말을 꺼냈다.

“그때 그 사건… 레인 공주님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그래! 기억하지! 근데 그게 왜?! 내가, 내가, 내가 사과해서 끝냈잖아?! 레인 공주님도 얻어맞았고!”

설마 했던 레인에 관한 이야기에 깜짝 놀란 목소리를 낸 로키시. 설마 하는 마음에 또 질문하지만 에키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로키시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누님도 알다시피… 전 아이 공주님과 몸을 겹쳤습니다만… 저쪽은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런 반응을 보이니… 건방 떨지 말라며 나무라는 꼴이었죠… 타국의 공주를… 저 같은 무능한 놈이 처녀막을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치가 떨리는 건지… 가면을 벗어던지고 추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설마, 설마, 설마아?! 너를 이 꼴로 만든 게… 그 섹스 때문에?! 그 망할 처녀 때문에?! 그, 그것 때문에, 너를?!”

“그 설마입니다…”

“?!”

에키시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바뀌어간다. 에키시가 우는 건 로키시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나 흑역사와 마찬가지. 그렇게 어렸던 동생을 죽이려 했던 적이 있으니 이런 모습의 동생을 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나서 로키시 또한 얼굴이 구겨지고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되었다.

“저는 정말 못난 놈이었네요… 누님이 그렇게… 아이 공주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라고 경고했는데… 저란 멍청한 동생은 누님의 말을 무시하고서 갔다가… 이런 꼴을…”

“아으, 으아아, 아냐, 아냐, 아니란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 울지 마! 괜찮으니까! 이 누나가 옆에 있잖니?! 으읏…”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게 무슨 꼴이야?!

겨우 그런 이유로 내 동생을…

‘그, 그, 그, 그 망할 년이이이이이이이이!!! 감히! 감히! 감히잇! 내 동생을 이런 꼬락서니로 만들다니이이이이이이이잇!!!!’

로키시의 심정이 터질 것 같이 된다. 울고 있는 건 에키시인데 누나인 그녀 쪽이 당황해서 에키시를 꼭 끌어안은 채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해댔다. 그 말이 에키시에게 닿는지는 둘째치더라도 동생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아주 명백했다.

“누님… 죄송해요… 제가 왜 누님 말을 못 믿었는지…”

“괜찮대도?! 아, 아프지? 피곤하지? 쉴래? 응? 오늘은 이대로 자고 내일 이야기 들으면 되잖니?!”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엄~?!”

“누님…”

‘몸이 차가워… 어쩌다가 그 드센 애가 이렇게… 크윽…’

침울해진 에키시를 바라보면서 해맑게 웃는 로키시. 억지웃음이었지만 에키시에게 먹혀들었는지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런 동생을 달래기 위해서 로키시 본인도 자리에 누웠고 어떻게 해서든 「아이 공주를 쳐죽여버리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동생의 몸을 껴안았다.

물론 그 상태로 동생만을 생각하기에 다른 의심은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자기가 껴안은 남동생이 내심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그 눈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저 반대편 기숙사에서 아이 공주와 무슨 밀담을 나눴는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동생 눈물에 속고 있는…

우리 바보 누나야…

‘하핫… 하하하하하핫…’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에키시 전용의 암퇘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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