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조교 전 짧은 이야기(2)
침착해라 에키시·블랙우드.
침착하는 거다.
누님이 약과 관련됐다고 말한 건 나지만 좀 더 침착하게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있는 최현준의 말에 따라 숨을 마셨다가 내뱉으면서 침착함을 유지. 썬은 자기가 듣고 판단할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았던지라 고장 난 카세트처럼 됐다. 내 눈앞에 있는 두 젖소들은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이지만 명백히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게 이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히 꺼낼 게 아니었다. 마치 아침 식사 후 「후식 대신에 이거라도 먹자」며 냉장고에서 꺼내온 아이스크림 같은 내용이다. 비유가 이상한 거 같지만 어쨌든 그런 거라고. 좀 더 뜸을 들이면서 이야기해도 될 텐데 뭘 이렇게 급하게 이야기를 꺼내놓는 거냐.
수상스럽게 보이잖아…
나에게 고백한 다음날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다니…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아…
‘그걸 감안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나 혼자서는 안된다. 아이가 껴도 안된다. 그렇다면 누님을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여럿 있으면 돼. 우리 로키시 누님께 복수한다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나로서도 좋은 이야기였다. 애초에 복수 대상은 누님이 아니라 레인 공주님이어야 정상이겠지만 굳이 우리 누님을 먼저 콕 찌른 걸 보면 아이도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거다.
레인 공주님 따위는 언제든 정치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고.
지금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폭발하기 쉬운 로키시 누님을 먼저 치워낸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나 내 감정적으로나 나쁘지 않은 선택. 굳이 내게 「에키시도 그렇죠?」따위의 말을 한 건 내게 동의를 구한 거다. 「당신의 누님을 함정에 빠뜨려도 되겠습니까?」 같은 거겠지…
그리고 나는 무심코 동의했다. 이 이상 좋은 이야기가 없어. 안 그래도 개판이 난 상황에 누님을 조교한다고 해서 뭐 문제라도 있겠냐. 오히려 성공하기만 하면 뭐든 잘 풀릴 수 있다. 후에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이 지랄을 해도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단계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난 일이니 어떻게든 된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학교에 오기 전부터 정해놨었잖아!
누님만 어떻게든 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단 말이야앗!
큭큭큭큭큭…
“히에에에… 비열한 얼굴이다아아…”
“앗, 실례. 누님의 일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요.”
“보다시피 에키시도 그녀에게 쌓인 게 많거든요. 무심코 이런 표정을 지을 정도니 그 한이 얼마나 깊은지 아시겠죠?”
“과연… 왜 에키시 님이 이런 자리에 있나 싶었지만…”
“꿀꺽…”
명백히 내 미스였지만 아이가 빠른 커버에 들어왔다.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건지 파이와 와이도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아이 공주님을 덮칠 정도로 상식이 없는 여자와 같은 곳에서 먹고 자란 거다. 내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자랐을지 망상하며 알아서 납득해대고 있었다.
‘한이라니, 딱히 그런 것도 없지만 말이야.’
누님에게 향한 한이라고 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일이 좋게 흘러가고 있어. 이렇게 쉽게 납득해주다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믿을 수밖에 없어. 한 나라의 공주님이 타국의 여성에게 강간당할 뻔하다니 진지하게 고찰해보면 전쟁이 일어날 사항이잖아.’
내 옆에서 아이가 거짓말에 살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내 사정을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날 옆에서 지켜본 것 같은 그럴듯한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에키시의 소문은 들어보셨죠? 살인귀, 강간마, 식인 기호,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잔뜩 있는데 대부분이 그 여자 때문이에요. 자기가 가주가 되기 위해서 에키시를 밀쳐내려고 헛소문을 퍼트린 거죠. 에키시가 얼마나 마음 상하며 살았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나요?”
“하긴… 저야 에키시 님을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지만… 도저히 그럴 분으로 보이진 않네요… 파이보다 말이 통하고 상당히 상식인으로 보이십니다만…”
“좀 심한 소문이긴 하죠오…”
‘근데 이거 거짓말 아니지 않나?’
내가 소문 퍼트린 거니까 거짓말이긴 해도 반쯤은 진실이다. 누님이 그런 행위를 허락하고 내게 도움을 줬으니 말이다. 가주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날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나야 원한이 생길 수도 있다만 우리 관계가 워낙 특이해서 말이지. 어쩐지 누님에게 미안해지는 군.
“그러나, 에키시 님은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아이 공주님께서 이런 말을 하시는데 동조하시는 것 같고. 자칫하면 반란은 물론 이 나라 사람 전부에게 쫓기게 됩니다만.”
“뒤가 없습니다.”
“뒤가 없다는 건?”
“목숨적인 의미로요.”
“앗, 죄송합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추상적인 대답을 내놓았지만 와이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단번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과할 이유도 없을 텐데 왜 머리를 숙인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번 일이 실패하면 아이, 레인 공주님, 로키시 누님, 거기에 썬까지 끼여서 개판이 난다고! 반대로 아이나 썬이 날 놓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도리어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만히 있을 거 같지는 않아!’
게다가 하드 교단식 사망 플래그가 완전히 꺾인 것도 아니다. 아이와 썬이 눈이 뒤집어진 채 레인 공주님과 누님께 싸움을 걸면 그걸로 끝장. 각 나라끼리 전쟁이 일어날 일이 된다면 이 젖소 자매가 끼여있든 말든 하드 교단이 들고 일어설 확률이 크다.
처음에는 이 신규 캐릭터…
아니, 파이파이가 끼여 있는 것으로 하드 교단이 좀 바뀌었나 싶었지만…
‘게다가, 바뀌긴 무슨?! 쾌락으로 전 세계를 평화롭게 한다고? 그게 교리라고?! 전쟁이 일어나면 일어설 게 뻔히 보이잖아! 이 년이고 저 년이고 모조리 개조해서 끔찍한 변태 엔딩을 내놓겠지! 안 봐도 뻔해! 이 씨발! 이 좆망겜! 만든 새끼 죽어버려라! 제바알! 이렇게 부탁한다! 제발 뒤져!’
내가 게임을 할 때 보았던 그 미친 설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니 일이 어디로 구르던 전쟁은 확정사항. 그렇게 될 바에야 여기서 옥쇄하는 편이 좋다는 거다. 물론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도 없고 목숨이 걸린 척 말했을 뿐이지만 와이에게 잘 먹혀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위험한 상황에서 지내 오셨던 거겠군요…”
“제 삶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저 또한 진심이라는 겁니다. 누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이제 아이뿐이니까요. 두 분께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아… 설마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이 될 줄이야…”
“흐에에…”
그럴듯하게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지렁이!」같은 뽐새를 내고 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체 어디의 누가 교단의 과학자를 불러서 다른 여자를 조교하도록 약을 만들어내라는 명령을 예측하겠는가. 아이란 여자, 안 그런척 하면서도 뒤끝이 심한 사람이구나 싶을 뿐이다.
“에키시, 말이 점점 딱딱해져요. 와이도 허락했겠다 파이처럼 친근하게 말하는 게 어떤가요?”
“파이와는 다르잖아. 자연스레 격식을 차리게 되네.”
“거듭 말하지만 전 괜찮아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이 공주님의 부탁을 무시하고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본국에 돌아가 교단에 들어간 순간 이번 일을 캐물을 테고 자투리라도 좋으니 일을 해결했다는 증거가 필요해요. 좋아도 싫어도 에키시 님과 오랜 관계가 될 것 같네요.”
“성공하면 아이가 여왕님이 된 후 남편으로 맞이하게 되고오~! 실패해도 아이가 숨겨 줄 테니까아~?”
“실패했을 때의 가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말 그대로 길게 보실 분이네…”
와이가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 나와 아이를 끝까지 의심하다가 그 의혹을 완전히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사죄까지 해왔으니 이 여자는 파이보다 훨씬 더 상식적인 부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식인이 하드 교단의 중진이라니.
뒤에 뭐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가?
“에, 에으, 에키시… 공…?”
“썬?”
“이, 이번 일이 사실입니까? 우리 아이 공주님께…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해도 못 믿잖아? 그때 그 난리 법석은 너도 봤고. 정황상 아다리가 떨어지는 이야기긴 하지.”
“그, 그, 그때 일은 줄곧 마음에 걸렸으니까요! 하지만! 설마 제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전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어엇…”
내가 와이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동안 썬이 정신을 차린 듯 암울한 목소리를 내왔다. 자기 누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데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침울하긴 하겠지. 방금까지 해맑게 웃고 있던 아이였는데 참 안쓰럽게 됐다 싶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아무도 널 나무라는 사람 없어. 기사라는 게 늘 붙어있을 수도 없고. 이번 일은 상식 범위 밖의 일이었으니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저는 기사인데… 그것도 아이 공주님의 호위로서 온 건데에…”
“에키시의 말 대로야. 좋게 좋게 생각하렴. 이번 일 덕분에 레인이라고 하는 여자의 성격도 알았고 로키시 공의 손에서 에키시를 빼내올 수도 있었어. 이제 이 두 사람의 힘을 빌려서 일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란다.”
“아이 공주님… 그런 일이 있으셨는데도 꿋꿋하시네요…”
“그러게에에에…”
“궁정 안에서 하루 종일 짹짹거리고 있던 참새들보다는 좋잖아요? 그리고 침울해 했던 거나 몸이 힘들었던 것도 전부 에키시가 도와줬으니까 이렇게 괜찮은 척할 수 있는 거예요. 덕분에 이쪽은 좋은 남편감 하나 채왔으니 좋은 거래였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으으으… 으으으읏…”
터무니없는 폭론이었지만 썬은 입을 다물고 얼굴을 빨갛게 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녀석 호모였지. 파이가 말 안 해줬으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아이에게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그 표정은? 아이가 부럽냐? 너도 위로해줄까? 우리 꼬마 서큐버스 양?”
“아으으~! 장난치지 마세요~! 중대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이 아닙니까아앗~?! 아이 공주님께서 그런 일을 당한 직후고! 좀 진지하게 하세요!”
“뭘 흥분하고 그래? 늘 하던 장난이다. 아이 공주님도 늘 그렇던 것처럼 널 바라보면서 웃고 있고. 오늘 처음 본 손님들이 추가되긴 했지만 이렇게 떠들고 있을 정도로 별문제 없이 왔잖냐. 그러니 너도 긴장 풀어. 피해자는 아이고 그녀가 괜찮다고 하는 거니까 말이야.”
“으으으으으~! 그치마안…”
긴장을 풀지 못하는 썬. 그래서 좀 더 노골적으로 장난쳤다.
“후우우우우~!”
“햐윽?! 햐으으으으~?! 으으으으~!”
“하하하하하핫!!!”
내 예상이 맞았던 건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귀에 바람을 불어 주자 노골적으로 좋아했다. 호모는 정말로 싫지만 썬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여자애 같은 반응이었다. 내 가랑이가 썬을 바라보면서 「가능! 가능! 가능!」을 외치고 있었을 정도니 썬은 따로 성별을 정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 중대한 일이고 뭐고 이제 막 우리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교단에서 나온 두 사람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수긍해줬지만 아직 뭣하나 정해진 게 없어. 어떻게 일을 마무리할지 틀도 안 잡았고 약에 관해서도 아는 게 없지. 기다리면 알아서 답이 나올 테니 그렇게 인상 쓰지 마라.”
“으읏~?! 아이 공주님! 이 바보 귀족을 어떻게 해주세요! 네?!”
“저번에도 이런 광경을 본 것 같지만. 어쨌든, 에키시의 말대로잖니?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말했어. 다음은 파이와 와이가 답을 내줄 차례니까 가만히 있으렴.”
“으으으으으으으으으!!!!”
썬도 긴장을 풀었는지 평소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양손을 꽉 모으고 볼을 햄스터처럼 부풀려서 다리를 흔들거린다. 그러나 얼굴을 평소보다 요염한 것이 마치 발정이 난 암컷과도 같았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건가 싶지만 아무리 봐도 가랑이 부근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 부르는 법도 그렇고. 정말로 저분을 남편으로 맞이할 생각인가요?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방법도 고려하겠는데요.”
“바로 최근에 호칭을 바꿨어요. 원래 저도 에키시 공이라 불렀거든요. 그 일을 기점으로 제가 마음을 줬고 바로 어제 서로 확인을 끝냈어요. 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답니다.”
“흐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모두 각각의 고민을 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와이는 나와 아이의 관계가 신기한 건지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면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좀 딱딱하게 보이긴 해도 이런 부분은 여자였던 건지 우리의 연애에 관해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일이 잘 되면 블랙우드 가문과 이어질 수 있단 거네요. 아이 공주님은 늘 레즈우 왕국과 친밀하게 있고 싶어 하셨고 이번 일도 그렇게 풀어나가길 원한다면야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죠. 그 로키시라는 사람의 입만 막으면 왕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될 거란 생각이 드니까요.”
“완전히 약에 빠뜨려 조교를 끝냈다고 한다면?”
“가주로는 못 올라가겠죠. 그 경우 에키시 님께서 후보에 오를 겁니다만 그것도 무리죠. 에키시 님은 아이 공주님께서 데려갈 예정이니 저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저분의 씨앗을 바랄 겁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아이의 목적을 단번에 꿰뚫는 모습이 그녀를 아주 잘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파이가 아이를 그렇게 친근하게 대한 걸 생각하면 같은 자매인 와이도 아이와 친하다는 거겠지. 적어도 내가 모르는 만남이 길게 이어져 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후후, 씨앗을 바란다라. 저쪽은 지금쯤 자기가 먼저 임신한 후 에키시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우리 쪽에서 준다니…”
“에키시 님의 아이에 관해서는 어떤가요? 독점욕은 있으신가요? 그 경우 즉시 전쟁입니다만.”
“약에 빠진 로키시에게 에키시의 씨앗을 나눠줘 씨받이로 쓰고… 그 아이를 다음 블랙우드 가문의 가주로 삼는다라… 그렇게 유쾌한 일이 가능한데… 제가 왜 에키시를 독점할까요…?”
“유쾌하다라?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이 공주님께서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 그럼 일을 이렇게 진행한다 치면 레인 공주님은 건들 필요가 없어지겠군요. 저는 이 방법이 베스트라고 봅니다만.”
“동감이에요. 레인의 경우는 왕성 내에서 실권이 없고. 이번 일에서는 가해지나 다름없으니 저쪽에서도 머리를 낮춰 올 거예요.”
“즉, 로키시 님만 어떻게 해달라 그거군요.”
“아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상식인 포지션답게 눈치가 빠르다. 처음부터 로키시 누님을 끌고 와서 그녀를 강조했던 보람이 있었다. 와이는 벌써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고 그 바로 옆자리에 있던 파이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어떤 약을 사용할지 홀로 논의하고 있었다.
역시 썬이나 내가 나댈 수 있는 막이 아니었던 거다. 여자들에게 이것도 저것도 맡기는 것 같아서 불만이긴 했지만 이게 최고의 방법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나라고 하는 남자 자체가 평생 한 여자(누님)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이런 건 익숙한 분위기이기도 했고 불만은 있어도 화는 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벌써 모기장 밖의 모기가 됐군. 이번 일을 끝내기 위해서 아이가 직접 저 두 사람을 부른 거잖아? 즉, 이번 일의 핵심 인물은 바로 저 두 사람. 우린 마왕에게 사로잡힌 히로인 또는 엑스트라 같은 거다.”
“뭔가요 그 말투는? 제가 아이 공주님을 걱정하는 게 쓸모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깨에서 힘 빼라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흥, 모릅니다. 이런 사건을 에키시 공만 알고 계시다니. 정말로 크게 배신당한 기분이라고요.”
그런 너도 숨기는 게 있잖냐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간지럽혀줬다. 아이의 손에 의해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지만. 어쩐지 그날 용이나 드래곤을 본 것이 우연이 아닌 듯 이야기가 잘 풀려나가고 있음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