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능 귀족 여체 하렘-59화 (59/199)

 무능 귀족 - 조교 전 짧은 이야기(1)

햇빛과 함께 짧은 수면을 끝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옆에서 날 올려다보는 아이.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입술을 들이미는 그녀. 나 또한 거기에 응하여 입술 도장을 찍어준 후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이게 현실인가?

어제 그 이름 모를 영애까지 섞여 질퍽하게 3P를 한 후 우리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게 좀 충격적이었다. 누님의 이야기 대부분이 거짓말인 것과 진지하게 나와의 교제를 생각해주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을 빼고도 저번 일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진지하게 고백해주셨다.

하하, 하하핫, 하하하하…

이게 뭐냐고…

여태까지의 내 고민은 뭐였던 거냐…

아이 공주님은 해맑은 미소로 아침 키스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진한 키스였다. 그리고는 누님이 했던 것처럼 내게 공약을 걸었다. 자신과 결혼해준다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주겠다고.

드디어 사건의 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 몰래 셋이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런 사랑싸움 때문이었던 거다. 그 당시에는 누님의 트집이었을 뿐이었지만 레인 공주님 사건 이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고 하니 누님과 아이 공주님의 대립은 사실상 현실이 됐다.

썬이 그 자리에 끼인 이유는…

파이파이의 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만…

‘눈 돌아가면 뭐든 부숴버리는 악역 영애, 내 엉덩이를 노리는 호모 주인공, 패배 이벤트 시 100% 조교 당하는 공주님, 뭐냐 이 개판 난 삼파전은.’

제발 내 추리가 틀리길 바랐지만 아이는 내 의심을 긍정해줬다. 그때 셋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며 수긍해버린 거다. 결국 아이와 누님은 친해질 수 없었고 썬과 레인 공주님도 이어질 수 없다는 소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님을 구슬리면서 아이와 결혼할 수 있는 방도가 안 보인다.

기분 좋으면서도 머리가 아파지는 아침. 이 이상 고민하는 건 무의미. 일단 뭐를 먹고 나서 생각하자며 허리를 들었다. 아이가 내게 반했다는 것 자체는 진짜인지 일어나려 한순간 허리를 잡고 내 자지에 키스를 해주며 사랑을 표현해댔다. 아침부터 덮치려고 한 것을 초인 같은 인내심으로 참아냈으나 등 뒤에서 나온 콧방귀 소리를 듣자 하니 유혹이 안 통해서 마음이 상한듯했다.

그런 아이를 애써 무시하고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두 번째 제지를 당한다. 가벼운 세면으로 끝내려 했지만 아이의 명령과 함께 시종들이 달려와 내 몸을 닦아주는 것이 아예 나를 이 기숙사에 묶어둘 생각인지 의심마저 들었다. 시종들에게 우리 관계가 들켜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입이 무거운 자들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아침부터 이런 고민하기 싫었다.

드래곤이나 용을 봤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란 거냐.

“고민하지 마세요. 에키시가 뭘 그리 생각하는 건지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저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될 거예요.”

“………”

씻은 후 식당까지 와서 가벼운 아침을 즐겼지만 내 고민이 얼굴에 드러난 듯했다. 내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아이가 빙그레 웃으며 자기 속셈을 밝히려 했고. 나는 귀를 쫑긋이면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했다.

내가 엘피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짓을 하는 동안 아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단 의미리라. 아이가 레인을 때리며 화를 풀기까지 수일, 엘피가 다쳐서 기숙사에 박힌지 또 수일,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 그 사이 무언가를 강구했겠지. 누님과 아이가 연적 사이가 된 건 나만 몰랐고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노려보고 있었을 테니까.

“뭘 어떻게 하겠단 소리야. 누님께 말도 안 하고 외박해버렸어. 지금쯤 일어났을 테고 상황도 눈치채셨을 테지.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누님을 배신할 수는 없어. 이번 일로 누님이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걱정 마세요.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이니까요. 결국 로키시 공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의미잖아요?”

“레인 공주님도 있어.”

“그것도 문제없어요.”

“……”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지만 아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떨어질 일은 없다. 우리 누님을 어떻게 하는 것도 힘든데 레인 공주님의 간섭도 차단하겠다니. 그러나 후자의 경우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레인 공주님의 간섭을 피한다라… 아아아아… 과연… 역으로 협박할 생각인가…”

“그래요. 이번 일을 눈감아 줬잖아요? 여차하면 그걸로 협박할 수도 있고. 제 몸을 빌미로 그녀를 유혹할 수도 있어요. 몸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건 로키시 공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녀가 왜 이리 의기양양한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나와 달리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여자다. 게다가 배짱도 두둑했다. 자기를 덮쳐서 성노예로 만들려고 한 여자를 상대로 역으로 유혹해주겠다는 소리를 내뱉다니. 실제로 하진 않겠지만 협박한다는 수는 유효하다.

그야 그럴 것이 레인 공주님 또한 왕위를 노리고 있다. 우리 블랙우드 가문을 등에 업고 계시니 언젠가 여왕이 될 수 있겠지만 아이가 적으로 돌아서면 그것도 힘들어지리라. 타국의 공주님을 덮치려고 한 여왕이라니 주위에서 어떻게 반발할지 뻔하고 또 뻔한 이야기다.

“에키시는 저와 로키시의 사이가 나빠지질 않길 바라고 있는 거죠? 그것도 문제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이런 일이 특기니까요.”

“특기?”

“궁정 안의 참새들에게 몰매를 맡는 우리 아버님. 그런 아버님의 곁에 있던 제가 여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우후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지…?”

“과연…”

게임상에서만 보던 그녀와 현실의 그녀는 매우 달랐다. 게임으로만 보던 그녀는 한없이 약하고 늘 잡혀가는 히로인이라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여우스러운 면모도 보여주고 있었다.

하하, 그렇겠지.

여기는 게임이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야.

그녀는 궁전 안에서 조심히 길러지던 앵무새가 아니었을 뿐.

내가 레인 공주님에 대해 생각하고 엘피를 걱정하는 사이 그녀는 누님을 끌어내릴 준비를 끝마쳐놓고 있었다. 늘 저택에 갇혀서 여자들만 먹고 다니던 나와는 천지차이. 현실이라는 건 꽤나 무정했구나. 레인 공주님께 그런 짓을 당해서 아직까지 침울해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레인 공주님을 때리고 팬 건 사실이잖아. 그때 화를 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네. 분노 자체는 진짜예요. 하지만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저도 이 나라의 중진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니까요.”

“하… 무서워라…”

그 분노의 가면 아래에는 침착한 표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거구나. 역시 아이는 무서운 여자였다. 일평생 누님만이 제일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침착한 여자도 있었군. 혹시 내 주위에 이런 여자가 한 둘 정도 더 있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든다.

‘히로인에게 이것도 저것도 맡긴 채 일이 잘 풀리길 기다려야 하는 꼬락서니라니. 혹시 지금 관계가 역전된 거 아닌가? 오히려 내 쪽이 히로인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차를 마신 후 아이가 무슨 방안을 준비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런 내 기대를 배신하듯 말이 끊겼다.

“아이 공주님, 에키시 공, 평안하셨습니까?”

문을 열고 스르륵 나타나는 썬.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산뜻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평소보다 기쁜 표정이었던지라 「뭐가 저리 즐거운 거지?」같은 무심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아, 왔냐.”

“썬, 잘 잤니?”

“네, 늦잠을 잔 지라 지금 겨우 일어나버렸습니다. 두 분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화목하신 모양이라 참 다행입니다. 어제는 걱정돼서 잠이 안 와버렸지 뭡니까.”

“어머, 얘도 참.”

“내가 온 걸 눈치채고 있었단 거군…”

“그래도 기사니까요. 저번 일도 그렇고 시종들과 기사들 대부분이 에키시 공과 아이 공주님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꼬는 것도 이제 와서의 일이네요. 아마 저 아니면 이렇게 말씀할 사람도 없겠다 싶어서 말해봤습니다.”

“아, 그랬었지… 까먹고 있었다…”

아이가 왜 시종들을 불렀는지 이제서야 눈치챘다.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지라 까먹고 있었군. 레인 공주님께서 벌인 사건 때 나와 아이가 섹스하는 것을 썬은 물론 다른 기사들도 알아버렸잖은가. 시종과 기사들이 여태 우리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겠지. 지금이야 아이의 마음을 알았으니 오해도 아니지만…

하긴, 그 어두운 밤에 외간 남자가 공주님의 방에 들어간 거다. 그것도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수상스럽게 말이다. 나라는 걸 알았으니 가만히 있었던 거겠지. 레인 공주님 사건 때 기사들이 즉각 반응한 걸 생각하면 이번 일은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고민이 너무 깊어져서 알던 것도 까먹고 만다니… 바보냐…’

파이파이를 욕할 수준도 안된다. 나란 놈도 바보였다.

“보아하니 두 분 다 괜찮으신 것 같네요. 어제 오신 손님께서 식당에 오시려고 합니다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괜찮아. 같이 식사하도록 하자. 에키시도 괜찮죠? 보아하니 파이가 신세를 진 것 같던데.”

“그래, 나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에 부르도록 할게요.”

마침 파이파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이도 썬도 나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특히 썬은 평소보다 해맑게 웃으면서 파이파이를 맞이하러 갔고 나는 뒤늦게서야 이 집에 온 손님이 두 명이라는 것과 그것이 쌍둥이 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오… 처음부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아아아…”

“혹시 들어가면 실례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네요.”

정정.

쌍둥이 자매 X.

젖소 자매 O.

‘뭐냐 저 홀스타인은.’

썬이 문을 열고 뛰어나가려고 했던 순간 그 어깨를 잡고 다시 뒤로 돌려보내는 두 사람. 어제는 파이파이만 봤지만 그 옆에 똑같이 생긴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도 연구원 복장에 배꼽티로 가슴까지 강조한 모습으로 말이다.

파이파이 하나만으로도 꽤 장관이었는데 이쪽도 장난 없었다. 똑같은 모습을 한 여자 둘이서 그 커다란 가슴 두 개를 강조하고 있다니.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도 그렇고 젖밀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싶었다.

“파이와는 인사했죠? 저쪽은 와이와이. 파이파이와 똑같은 가문의…”

“가문 이야기는 됐어요. 전 하드 교단의 연구팀 일원이에요. 파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직급이 있는 쪽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에키시·블랙우드 님.”

“아… 네…”

저쪽은 이미 날 알고 있는 듯했다. 아이의 말을 끊다니 이쪽은 꽤나 드센 성격이구나 싶다. 가문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아이는 그녀가 그런 성격이라며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었지만 파이와 같은 얼굴이면서도 내용물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 느꼈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아…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헤매지도 않았어요오… 게다가 무례도 범했는데 웃어 넘겨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이이…”

“이쪽이야말로 너무 친근히 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어제 말했던 대로 파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네, 물론이죠오~! 그렇게 딱딱한 말투하시지 않으셔도 돼요오~!”

“그럼, 나도 마음이 편해지지만…”

썬의 유도와 함께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그 후 썬도 나와 아이 근처에 앉아 두 홀스타인 자매를 마주 보는 것 같이 됐다. 파이는 연신 싱글벙글. 와이와이라 불린 여성은 침착한 표정으로 나와 아이 공주님을 바라보고 있다.

옆을 봐도 백발…

앞을 봐도 백발…

거기에 가슴에 또 가슴…

식탁 위로 가슴 세 쌍이 올라오다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질 않는군. 나 혼자 다른 세계의 원주민이 된 기분이다. 실제로 이세계 전생 해버렸지만 한 번 더 해버린 기분이라고. 마침 나 혼자 머리카락 색이 달랐으니 더욱 차별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손님들끼리 모인 것도 그렇고. 혹시나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아이 공주님은 몰라도 에키시 님은 우리를 보는 게 어제랑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와이와이… 양…?”

“저도 와이라 불러주시길. 파이처럼 말을 놓아주세요. 불편하시잖아요?”

“그럼, 와이 양.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하드 교단에서 손님이 왔다는 게 의아했을 뿐이니까요. 호모우 왕국과 거리도 있고 하드 교단의 일도 그렇고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어제 파이가 말씀드렸다고 들었어요. 그 일로 왔거든요.”

“아…”

그 말에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레인 공주가 썼던 약. 그것 때문에 왔다는 것이니 우리와 큰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도 아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있었다. 거의 본인 이야기나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아이?”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약이 퍼지고 있다는 제보는 제가 한 거니까요. 그녀들도 이 부근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제 편지를 보고 확증을 지은 후 여기까지 날아온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역시 아이 공주님은 이번 사건과 큰 연관이 있단 거군요. 그리고 에키시 님도.”

“네.”

시원스럽게 인정하는 아이. 레인 공주님의 이야기는 그녀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두려고 하지 않았던가. 왜 이 자리에서 조사원이나 다름없는 그녀들에게 사실을 말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날 본 여자애의 상태도 그렇고오… 에키시의 시종이 그런 꼴인 걸 보고 확신이 서버리고 말았거든요오… 아이가 부정했어도 알아보기는 했겠지마아안…”

“시원스레 긍정해주시니 다행이에요. 저희는 혹시 두 사람이 나쁜 일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거든요.”

“말이 지나치십니다. 에키시 공은 물론 우리 공주님께서 그런 일을 할 리 없잖습니까.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고 해도 그런 말은 쉽사리 못 넘겨요. 애초에 아이 공주님께서 두 분을 불렀잖습니까.”

“의심할 수 있는 건 다 의심하고 보는 성격인지라.”

썬의 일갈에 파이가 어깨를 좁혔지만 반대로 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그보다 썬은 아이가 그런 꼴을 당했다는 걸 모르는 걸로 아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숨겼다만 혹시 내가 없는 사이 진상을 말해주었나? 썬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듯한데…

“무리는 아니에요. 썬에게도 숨겼던 이야기고. 진상은 저, 에키시, 그리고 레인 공주님만 알고 있거든요.”

“아이 공주님? 에? 무, 무슨 소리를… 하시려는 건지…”

“마침 조사원도 왔겠다… 에키시 공도 있고… 털어놓아도 되겠죠…”

역시 모르고 있었나. 말하지 않아도 썬이 레인 공주님께 가지고 있는 감정은 불신과 분노 정도뿐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겠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싶네요오~? 썬과 그리 친하시면서어~! 에키시만 알고 있고오… 그 시종이 약에 쩔어 있는데다가아… 아이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느껴진 것 까지이… 전부 말씀해주시겠다는 건가요오~?”

“숨길 것도 없네요. 두 사람이라면 이번 사건 금방 해결해 주실 테고. 에키시도 제 편에 있으니까요.”

“흐으응… 자신만만하시네요… 우리가 수상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데도…”

“애초에 저는 피해자인걸요. 당신들에게 호소해서 범인을 혼내주길 바라는 입장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참아온걸요.”

“에, 공주님?!”

그 말에 썬이 놀라 한다. 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아직도 예상이 가질 않았다. 앞의 두 젖소 자매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생각조차 없는 모습이었고 나는 무슨 말이 나오든 침착하게 있을 수 있도록 표정을 가다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지난번에 어느 여성분께 덮쳐진 적이 있어요. 침실로 끌려들어 가서 손도 발도 못 움직이는 채 고통받았죠. 그때 발라진 약이 제 소중한 곳에 아주 꼼꼼히 스며들었거든요? 정말로 큰일 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에키시가 구해줬어요.”

“?!”

“네?”

그 말에 공기가 얼었다.

말 그대로 얼음.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짓던 와이도 그 커다란 가슴을 끌어안은 채 지금 자기가 뭘 들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있었다.

“가, 강간 사거언~?”

“네, 그렇네요. 같은 성별이라고는 해도… 그러한 약이 발라졌으니…”

“그것도 아이 공주님을?! 지, 진짜로요?! 네?!”

“어머나, 와이. 이런 이야기는 의외였나 보네요?”

“그야 그렇죠! 대체 누가 그런 상상을 합니까?!”

이건 예상외였는지 와이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놀라움만 남았다. 의심하던 상대가 피해자였으니 당연하겠지. 그것도 그 피해자가 일국의 공주님이면 더욱이 놀라울 거다.

“고, 고, 고, 공주니임?! 그게 무슨 소린가요?!”

“들은 대로야. 썬 너에게는 부끄러워서 말 못 했었어. 그날 에키시와 섹스한 거 기억하지? 사실은 치료 행위 중 하나였단다.”

“그래도?! 왜, 왜,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에?!”

“네 성격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아니, 이, 무슨~?!”

자기 친족이 강간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크게 격노하는 썬. 게다가 그 사실을 본인은 모르고 있었으니 어이가 없으리라. 반면 나는 당연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에 안도하면서 그녀가 뭘 꾸미고 있는지 점점 감이 오기 시작했다.

‘설마…’

약점이 잡힌 레인 공주님을 굳이 건들 필요는 없을 터. 그러나 굳이 하드 교단의 중요 인물 겸 조사원을 불러 사건을 키웠으니 이 시점에서 그녀가 노리는 건 한 명뿐…

“범인은?! 범인은 누굽니까!”

“에키시는 알고 있잖아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게다가 그가 아끼던 시종도 약에 당해버렸고.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으시죠?”

“아이… 너…”

“전 거짓말 안 해요. 에키시도 그렇죠?”

빙그레 웃는 아이. 그 말에 그녀의 거짓말에 놀아났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 누님이 약을 썼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지. 덮친 사람은 레인 공주님이지만 교묘히 말을 돌려버렸다. 레인 공주님뿐만 아니라 한사람 더 물귀신처럼 데려갈 생각이었나.

“혹시… 설마… 그럴 리가…”

썬이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 분위기에 타기로 한 거다. 나를 이렇게 밀 줄은 몰랐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숨길 필요도 없다. 혹시 아이가 나를 속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조차 믿을 수 없다면 앞으로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방도 따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실행범은 레인 공주님. 그 뒤에는 우리 누님이 있다. 엘피를 그렇게 만든 건 누님 본인이니 학교에 유통된 약과 관련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레인 공주님에… 에키시 님의 누님이라 하시면…”

“로키시·블랙우드.”

“소문으로만 듣던 그 괴물인가…”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을 터. 나도, 아이도, 썬도, 그런 것 따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그녀의 잔머리가 빛났다.

“저는 복수를 원해요. 그러니까 다른 조사원들을 내버려 두고 당신 둘을 콕 집어서 불러낸 거예요. 사건을 크게 키우기보다는 조용히 우리 끼리만 끝내고 싶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굳이 우리 둘을 불러냈다고요?!”

“히에에… 설마… 그 복수라고 하는 건…”

“네,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해요. 아, 말을 정정할까요? 두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고 똑똑히 못 박아 둘게요. 하드 교단에서도 으뜸가는 연구원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지금의 전 레인은 물론 로키시 공과도 함부로 싸울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왕이 되기 전 타국의 인간과 물의를 일으키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어요.”

“그… 그야… 우리가 처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긴 한데에~?! 그, 그, 그러나아~?!”

“약을 회수하러 왔을 뿐인데… 이런 귀찮은 일을…?!”

“우후후… 우후후후후…”

파이와 와이는 완전히 예상외의 일에 당혹 중. 썬은 화를 내다가 말고 지금 오고 간 대화를 곱씹으며 인상을 구기고 있다. 물론 나도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내심 미쳐 날뛰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다. 이건 정치전이 아니야. 좀 더 단순한 거(복수)다.’

그저 연구원이라는 직함을 가진 두 사람을 사용해서 누님을 물리적으로 떨어뜨릴 생각이다. 레인 공주님이 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두 사람에게 그대로 돌려준단 말이다.

설마 했던 복수극.

그것도 약에는 약.

내 머리가 점점 차가워지는 가운데.

아이만이 그저 즐겁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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