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 하렘 루트
누님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아마 엘피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저지르려는 거겠지. 그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마 아이 공주님도 이번 이야기에 끼어 있으리라 확신을 했다. 그러나 썬과 레인 공주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 두 사람은 어딘가 얼빠진 면이 있어서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한쪽은 좀 재미난 기사일 뿐이고 또 한쪽은 생각을 가랑이로 해대는 레즈비언일 뿐이니까.
그러니 무언가를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 누님이나 아이 공주님. 그런 일도 있었겠다 왜 이번 일을 덮어뒀는지, 몸은 괜찮은 건지, 우리 누님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레인 공주님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전부를 하나씩 캐물을 필요가 있었다.
‘아, 씨발 진짜. 아이 공주님께 그런 걸 캐물어야 하는 거냐. 막 강간 사건이 끝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분께. 그때 우리 누님과 무슨 약속을 나눴고 뭘 꾸미고 있는 건지. 그런 융통성 없이 심문하는 말투를 해야 하는 거냐고.’
썬과 레인 공주님의 관계는 이미 끝장이다. 이미 그쪽 루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이 공주님이 왜 이번 일을 공론화시키지 않는지도 궁금하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그녀를 용서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썬이 레인 공주님을 공략했다 치자. 이미 공략한 거나 마찬가지라도 성별이 들킨 후에도 마음에 들어버렸다 치자고. 그래서 썬도 레인 공주님을 마음에 들어 해서 결국 결혼까지 나아간다 해도 그 끝에 있는 건 아이 공주님의 손에 의한 파국일 뿐이다.
이미… 끝장인가…
호모우 왕국과 레즈우 왕국의 비틀림은…
이제 수정할 수 없는 거냐?!
씨발!
‘머리를 굴려라. 머리를 굴리라고 에키시·블랙우드. 여기는 게임의 세상이 아니다. 루트가 꼭 몇 개로 좁혀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레귤러도 있다. 레인 공주님의 인상이 최악인 건 둘째 쳐도 아직 전쟁이 일어난다고 확정된 건 아니야.’
이쪽은 아예 왕 후보가 없는 건 아니다. 레즈우 왕가 장남은 물론 남동생도 잔뜩 있다. 대부분의 루트가 레인 공주님께서 여왕으로 즉위한다만 그 이유는 우리 블랙우드 가문 때문이다. 우리 누님이 그녀를 밀어줬기에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여왕이 되는 게 가능했단 소리다.
‘레인 공주님을 여왕 자리에 못 오르도록 밀어낼까? 아니, 아니다. 역시 그쪽은 무리야. 우리 누님이 가문을 손에 넣으려는 이유 중 하나가 레인 공주님 때문이잖아. 가주가 되어 레즈우 여왕이 될 레인 공주님을 밀어주고 이득고 왕성의 제일 깊숙한 장소에 머무는 마물이 된다. 우리 누님은 레인 공주님을 여왕이 될 재목 겸 발판으로 보고 있어…’
레인 공주님이 여왕이 되지 못하도록 하려면 먼저 누님을 밀쳐내야 한다는 모순. 가족끼리 싸우는 건 내 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너무나 위험한 길이다. 차라리 내가 아이 공주님과 결혼해서 그녀의 마음을 살살 달래고 레즈우 왕국과 깊은 인연을 쌓도록 도움을 주는 편이 빠르다.
그러나 가능할까?
내가 그런 게?
누님은 아이 공주님께서 날 정치용 도구로만 보고 계셨다고 했다만…
‘누님의 말을 의심해야 하나?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정황상 들어맞긴 해. 갑자기 데이트 신청한다거나, 수면용 허브나 약을 쓴 흔적이 있다거나, 나를 가까이하는 것 같으면서도 선을 긋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어…’
의심해도 모른다. 애초에 아이 공주님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그렇게 호감을 살 정도로 멋진 일을 한 기억이 없다. 누님이 아이 공주님을 보고 질투했을 때 나 자신이 말했잖은가? 「그런 일 있을 수 없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직 고민해봐야 할 시기다.
‘해피 엔딩으로 향하는 루트는 아직 몇 개나 있어.’
〈첫 번째〉 누님을 밀치고 블랙우드 가문을 빼앗아 레인 공주님의 즉위를 방해하는 것.
그러나 이 행위는 누님과 척을 질 확률은 물론 나도 아이 공주님도 함께 죽을 확률이 크다. 최악의 경우 아버지도 누님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루트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
〈두 번째〉 누님과 결혼하는 것.
누님은 내 취향의 여자가 된다고 공언한 건 물론 음문과 조교용 피어스까지 달아준다고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누님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이 루트는 이 시점에서 각하다. 성격이 바뀐 누님께서 레인 공주님의 고삐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난 독살당하거나 암살당해 죽게 되리라. 레인 공주님의 즉위는 실패하겠지만 공주로서의 영향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너무 위험해진다.
〈세 번째〉 나와 아이 공주님이 결혼하는 것.
정말로 현실성 없는 내용이다. 누님의 말대로라면 저쪽은 나를 정치용 도구로 보고 있다는 거다. 헤벌쭉해서 결혼까지 가버리면 최악의 경우 왕성에 감금당해 그대로 끝장. 일단 블랙우드 가문의 장남과 결혼했으니 레즈우 왕국과의 사이도 나쁘진 않아지겠지만 누님이 아이 공주님을 죽이려 들 것이다. 겉으로는 아이 공주님과 화해한 척하고 있지만 누님이 원하는 건 내가 블랙우드 가문에서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거니까 거의 확실하다.
〈네 번째〉 이 학창 생활 도중에 하드 교단을 어떻게든 해버리는 것.
애초에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제일 큰 이유가 하드 교단 때문이다. 호모우 왕국과 레즈우 왕국의 불화가 일어나면 자동으로 아이 공주님을 납치해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말썽쟁이 교단. 그럼 두 나라의 불화가 일어나기 전에 그 교단을 망쳐버리자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 일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것도 꽤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다섯 번째〉 서브 히로인들의 힘을 모아서 전쟁에 대비하는 것.
서브 히로인은 여럿 있지만 그 대부분의 힘이 미묘하다. 맨 먼저 지금 우리 누님의 손에 몰락하고 있는 야만족의 공주님.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화평을 맺자며 다가오는데 그 증거로 야만족 공주을 데려오는 걸 시작으로 각 나라를 이어주고 있는 거대한 상회의 우두머리나 바다 건너에서 온 현자가 있다. 지금 실시간으로 몰락하고 있는 야만족 공주님, 거대 상회의 우두머리, 바다 건너온 현자의 힘을 합치면 조금 힘들더라도 전쟁 자체는 소화가 가능하다. 거기에 전쟁에 능통한 우리의 부관 엘피까지. 그러나 이것도 싸움을 미리 방지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아웃이나 마찬가지. 애초에 셋이나 공략할 주변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것도 현실성이 없다. 이 외에도 서브 히로인은 많지만 도움이 될지 미지수고 말이다.
〈여섯 번째〉 발상을 바꿔서 내가 레인 공주님을 공략하는 것.
이쪽은 의외로 현실성이 있다. 어찌 됐든 나는 레인 공주님이 왜 레즈비언이 됐는지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런 부분을 찔러대면 어떻게든 공략이 될지도 모른다. 레인 공주님을 공략해서 나와 누님을 레즈우 왕국의 흑막 같은 위치에 자리 잡게 하고 왕국을 뒤에서 조종하면 어떻게든 전쟁을 피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이미 레인 공주님과 척을 진 아이 공주님께서 어떻게 나올지를 몰라서 머리가 아파진다. 이번에 있었던 일을 즉위 후까지 끌고 가시면 하드 교단이 날뛰는 건 정해진 사항이나 마찬가지니까.
‘답이 없군. 어느 한쪽을 공략하면 나머지 한쪽이 터지고. 그래서 반대편을 공략하면 이번에는 옆구리가 터져버리고 말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명을 딱 집어 공략하는 걸로는 뭐가 어떻게 안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최악의 수를 낼 뿐…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마지막〉 내가 직접 히로인 전원을 공략한다.
아니, 어떻게 보면 정석이며 정론이기도 한 말이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제일 어렵고 가파른 길이며 실패하면 100% 죽는 루트. 아이 공주님, 레인 공주님, 로키시 누님, 그 전원을 내가 길들여 낸다. 그러는 김에 서브 히로인들과도 안면을 터놓고 할 수 있으면 마음까지 얻어두는 거다.
‘그리고… 웬만하면 썬의 환심을 사두는 것도 좋겠어…’
썬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그의 측근들에게 엉덩이가 뚫려서 호모가 되던가?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내가 뚫어주겠다는 생각으로 썬도 공략 대상으로 올려두는 편이 좋으리라. 내가 썬을 호모로 만드는 것으로 전쟁이 날 확률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면 그건 그것대로 참을 수 있는 선택지다.
하, 미친.
진짜 돌았나.
대강 머릿속에서 꺼내놓은 루트들이지만 생각할수록 웃겼다.
“하하… 나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람…”
게임이라면 이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원한 루트대로 선택지를 눌러서 캐릭터를 이동시켜 주인공이 대화하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플레이어인 나는 강 건너에서 불난 걸 구경하면 된단 말이다.
그게 왜 이렇게 됐냐고오오오오오~!
왜 레즈 그 병신 공주는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오오오~!
씨발 대가리에 보지 박은년아아아아아아아아~!
짜증 난다! 짜증 나 죽어 버릴 것 같다! 누님은 영문 모를 고백 어택 후 수상한 짓거리를 해대고! 믿어야 할 왕가 사람 중 하나는 대가리에 보지 박은 병신에! 아이 공주님은 무슨 생각을 해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고! 그나마 믿을만한 했던 우리 부관은 뭔 짓을 저질렀는지 이 꼬락서니에! 썬은 미묘하게 호모 냄새가 나!
쓰버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
후우! 후우우우! 우우우우우욱?!
“후우우……”
“도련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한숨 내뱉어서 미안. 그냥 개인 사정으로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
“괜찮으시다면 이야기 정도는…”
“너에게 이야기할 정도는 아냐.”
“그런… 가요…”
내심 포효를 내질렀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며 바로 앞을 바라봤다. 디저트 카페에서 휠체어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우리 부관이 거기에 있었다.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그 모습은 흡사 햄스터 그 자체. 예전의 그 틱틱 거리는 모습은 조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끔 화난 말투를 하긴 해도 예전이랑 비교하면 장난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집안에 홀로 두니 온몸을 경련해대면서 눈물을 흘려댔고… 몸과 정신이 괜찮아질 때까지 같이 다니게 됐지만…’
다행히 휠체어나 목발도 구비돼 있었기에 밖으로 데려 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발을 쓸 수 있는 체력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휠체어를 탄 상태로 돌아다닐 예정이다. 본래라면 오늘 아이 공주님을 만날 예정이었지만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기숙사에 썬과 아이 공주님 둘 다 없었던 거다.
그래서 아이 공주님의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거리에 들렸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디저트 가게로 들어와서는 두 사람이서 디저트 타임을 즐기게 된 거다. 여자애라면 누구든 달콤한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엘피에게 있어서 여기 디저트는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케이크은 어떠냐. 나는 어린애 입맛이라 이런 걸 판단 못하거든. 난 괜찮은 거 같지만 네 의견도 듣고 싶다.”
“달콤해서 좋아요… 과일도 신선한 걸 쓰고 있는 모양이고… 이런 저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영애분들도 보이시고… 필시 우리만 모르던 유명한 가게겠죠…”
“오, 그러냐? 그렇다면 선물용으로 몇 개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누님도 여자니 달콤한 걸 먹으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릴 테니 말이야.”
“저를 위해 그리 고민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괜스레 미안해져서… 눈물이 나와버려요…”
“누님이 계속 눈썹을 세우고 있으면 나도 불편해지거든. 자기 딴에는 화가 풀렸다고 하는데 응어리 정도는 남아 있을 테지. 그걸 풀어주는 것도 동생의 역할이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으, 에키시 님…”
마치 썬처럼 불쌍한 소리를 내는 엘피.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누님 때문인지 마음이 심란한 상태인 건 알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 혼났는지 정도는 말해줘도 될 텐데 나 때문이라는 말만 할 뿐 자세한 설명이 없다.
드센 모습을 보였다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 어중간하게 발정했다가, 다시 드센 모습을 보였다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 크게 발정했다가, 그런 정체불명의 주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역시 엘피를 괴롭히는 건 무리다. 이 상태의 엘피를 이 이상 어떻게 괴롭히라고.’
누님의 노림수라고는 생각하지만 역시 엘피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 틱틱 소녀가 좀 더 드센 성격이 될 때까지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이 상태의 엘피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건 NG다.
‘결국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나? 멀리 떠나신 건 아닌 모양이고. 듣자 하니 본국의 사람과 만나기 위해 이 지역 밖을 잠깐 떠나신 모양이니.’
아무리 커봤자 왕도 안에 있는 학교 구역일 뿐이다. 이 거리를 떠나 왕도 쪽으로 나아가서 그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모양이지. 타이밍으로 봐선 레인 공주님의 건을 이야기할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애초에 저쪽에서 와서 아이 공주님이 만나러 갔다고 한 거다. 저쪽이 레인 공주님의 행패를 눈치채고 여기까지 오기엔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었다.
“흠…”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갔을까. 누가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피를 바라보니 그쪽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입을 열어왔다.
“아이 공주님에 관해 생각하시는… 건지요…?”
“엘피, 이 타이밍에 여기까지 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호모우 왕국에 관해서 아는 게 적어서 이렇다 할 답을 못 내놓겠어.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제일 간단히 떠올릴 수 있는 거라면… 감찰관, 군부의 인간, 왕가에서 보내온 사절단, 의사, 그 정도일까요… 단기간이라고는 해도 타국에 단 하나뿐인 공주님을 내놓아 있는 거니… 호위가 더 필요한지, 물자가 필요한지, 병에 걸리진 않았는지, 여러모로 고민이 깊겠죠…”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니까 말이야. 타국의 공주님들도 모여들 타이밍이다. 호모우 왕국에서는 레즈우 왕국에게 호의를 보이는 겸 공주님을 내보낸 거지만… 역시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야…”
생각해보면 아이 공주님은 기사 없이 걸을 때가 많다. 나야 레즈우 왕국인이니 죽어도 블랙우드 가문의 비난을 사는 정도로 그치지만 아이 공주님이 죽으면 그걸로 끝장이다.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는 건 물론 야만인들도 그 틈을 타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그때 데이트 때도 그랬지. 내가 기척을 놓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고. 저택 안에 기사들이 바글바글 한 걸 보면 아예 안전을 두고 사시는 건 아닌 모양인데 왜 그랬던 걸까.
“그, 그러고 보니… 예전에 썬이 이야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응? 뭘?”
“곧 하드 교단의 지인이 이 거리에 온다고 했던가요… 수업 도중에 했던 말이라 한 귀로 듣고 흘렸습니다만… 잘하면 감찰관이나 사절단 같은 게 아니라 그쪽 지인일 수도 있겠네요…”
“아, 과연. 아예 개인적인 용무로 밖을 나갔을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도련님과는 큰 관련 없어 보입니다만… 혹시나 싶어서…”
썬을 별로 안 좋아했던 주제에 이런 이야기는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싶었다. 머리가 좋은 건지 날 위해서 지혜를 짜내준 건지 모르겠다. 엘피가 떠들어 재낄 때마다 누님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진다. 물어본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되는 걸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캐묻고 있었을 테지.
‘이 타이밍에 하드 교단의 지인이라니. 게임 세상으로 생각하고 다녀서 그런가 생각도 못 했군.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그 두 사람에게 하드 교단의 지인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듣는 설정이야.’
그 순간 뭔가가 삐극 했다.
마치 시곗바늘이 틀린 것 같은 불편함.
나는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아주 중요한걸… 까먹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내가 고민에 빠지는 동안 등 뒤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판과 식기가 떨어져내리는 소리. 심경 변화로 일어난 비유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였다.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집중력이 뚝 끊겨버렸다. 조금만 생각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단서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울컥해버려서 머리를 치켜들어 엘피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까워라.”
“뭐냐? 무슨 소란이야?”
“아뇨, 그게, 도련님 등 뒤에서… 손님이…”
엘피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은 채 등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땅바닥에 한가득 엎어진 케이크와 찻잔이 있었다. 식판이 떨어졌다고 생각했건만 식기들끼리 부딪힌 소리였던 건가. 한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나 많아 보이는 양이지만 놀랍게도 내 예상은 즉각 부정됐다.
“으에, 큰일 났다… 으에에, 어, 어쩌지…”
그 많은 케이크와 차를 떨어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단 한 명의 여성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이런 곳에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라면 직접 케이크나 차를 운반할 필요 없이 자리에서 주문해도 되는데.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도 너무 바보 같은 행위를 했구나.
이 디저트 카페의 직원들은 그것을 치우기 위해서 즉각 움직였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벌벌 떨어댈 뿐.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을 테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연구원스러운 복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등에 있는 눈꽃 모양의 인장도 그렇고…
“엘피.”
“네?”
“잠깐 자리를 뜨마.”
“도, 도련님?! 으에~?!”
굳이 그런 일 돕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런 말을 하며 크게 놀라 하는 엘피를 내버려 두고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마치 방구석 폐인처럼 벌벌 떠는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평소처럼 사람을 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