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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 귀족 여체 하렘-43화 (43/199)

 무능 귀족 - 의심암귀와 목줄(2)

그대로 다음날이 다가왔다.

닷새째의 아침.

에키시는 일어나자마자 「오늘 무슨 일 있겠군」하고 싫은 예감을 느꼈다. 아침부터 흘러나오는 불온한 공기에 인상을 구기며 샤워를 끝냈고. 그대로 아침 조깅까지 끝낸 후 지하실로 향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지하실. 아무도 없는 건 물론 자기 누님인 로키시가 반입한 도구들도 없다. 약간의 핏자국이 남아있었지만 그건 이미 갈색으로 문드러져 사라진 후고 로키시와 엘피는 이미 지하실 밖을 나가 있었다.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음란한 공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침부터 시끄럽겠다고 확신마저 하고 있다.

“아, 일어났니? 마침 나도 씻고 나온 참인데…”

“누님…”

그렇게 식당으로 가니 따끈따끈한 김을 뿜어내고 있던 로키시가 있었다. 검은 네글리제 차림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천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금까지 지하실에서 누군가를 고문 내지는 조교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고 있다.

그런 누님이 무서웠던 건지 인상을 구기는 에키시. 말없이 자기 누님의 근처 자리에 앉아 시종을 불러 식사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장 차림의 남성 앞에 네글리제 차림의 여성이 있는 기묘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은 어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다.

“엘피는 어떻게 됐습니까?”

“엘피? 누구야 그게?”

“설마… 죽였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농담으로 한 소리야.”

그렇게 놀라 하지 말라면서 깔깔 웃는 로키시. 그러나 에키시는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이 아닌지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그녀의 설명을 기다렸다.

“후후… 후후후후… 후훗…”

“………”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다리를 꼬고 시종들에게 마사지를 받을 뿐. 그 사이 식사가 하나씩 나오고 있지만 에키시는 물론 로키시도 손대지 않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로 싸우려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러려니 하려던 에키시의 자세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상황. 그 불편함을 못 참은 건지 에키시가 먼저 입을 열었고 그것을 로키시가 온화하게 받아줬다.

“누님.”

“응?”

“엘피 이야기를 하라고요.”

“왜? 그런 배신자가 신경 쓰인다 그거야?”

“엘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도 안 해줘, 세 명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이야기를 안 해줘, 레인 공주님이 저지른 짓을 누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까지, 세 명은 물론 레인 공주님의 상태까지 이상하잖습니까.”

“하긴, 지금 이 상황에 네가 날 의심하지 않으면 바보겠지.”

“엘피가 뭘 저질렀습니까.”

“말 안 해줘. 본인도 말 안 할 거야. 그리고 그 세 명이서 이야기한 거? 별거 없어. 그저 셋이서 네 이야기를 했을 뿐.”

“제 이야기를요?”

엘피 이야기를 얼버무리고 다른 이야기로 넘겨버리는 로키시. 너무나 명백한 말 돌리기 였지만 이 이야기 또한 에키시가 바라던 것. 그러나 이 여우 같은 여자가 그 이야기를 다 꺼낼 리 없었고 다시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래.”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요?”

“말했잖아? 네 이야기라니까? 정말로 그것뿐이야.”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그때 이후로 아이 공주님의 태도가 이상해졌다고요!”

“장난이고 뭐고 그 말 그대로야. 이렇다 할 이야기는 없었고 일상 이야기가 주류였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해를 풀었을 뿐. 내가 아이 공주님을 백돼지 취급하고 있던 건 너도 기억하고 있잖니?”

“네, 잘 알고 말고요.”

“그래, 그 이야기야. 서로 오해를 풀고 친해진 거지. 서로 간에 나쁜 관계가 되지 말자고 약속을 했어. 저쪽도 우리 가문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것저것 준비하던 모양이더라고. 아이 공주님이 너한테 치근덕 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야.”

“제게 접근한 게… 가문 때문이라… 그겁니까…?”

“응, 이야기를 많이 잘라낸 감이 있지만 간단히 풀어서 설명하면 그렇게 되지. 저번에 있었던 불상사는 100% 약 기운 때문이라고 아이 공주님이 직접 말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거짓말과 진짜를 섞여서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내는 로키시. 아이 공주님은 네게 흥미가 없고 그저 블랙우드 가문을 보고 있을 뿐이라며 에키시의 마음을 돌려놓고 있다. 물론 에키시는 그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그러나 그 세명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신빙성이 있는 말로만 들렸다.

“레인 공주님의 폭주는 완전히 내 잘못이야. 너랑 놀아준다고 한동안 신경 못썼더니 저런 폭주를 저질러버렸어. 아이 공주님의 목적은 레즈우 왕국이나 그 중진들과 친해지는 것이니 이번 일을 눈감아 주셨지만. 자칫하면 전쟁이 날 수 있는 일이었잖아?”

“우리 때문에 눈 감아주셨다는 겁니까?”

“그 일은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잖아? 굳이 내가 그 자리에 끼여서 머리를 숙인 이유가 뭐겠니? 아이 공주님이 그리 간단히 물러선 이유가 뭐겠어? 전부 자기 이익 때문이야. 분노보다 앞으로 얻을 이익을 선택한 거지.”

“이익… 말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너에게 치근덕 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란다. 속아넘어가는 건 에키시 네 마음이지만 정을 주진 말렴. 너무 정을 줘버리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상처를 입고 말 거야.”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말로 추격타를 건다. 에키시가 속아넘어갈 수 있도록 진짜 있었던 일을 대입해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에키시는 아이 공주님이 왜 자기한테 데이트를 신청했는지 몰랐기에 나름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생각했다.

“하, 그래, 그렇다 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전부 수용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아이 공주님의 행동에 관해서는 궁금한 게 많기도 했고. 그거라면 나름 말이 되니까요.”

“그럼 이제 식사라도…”

“근데 엘피에 관해서는 끝까지 말 안 해주실 겁니까?”

“귀찮게 하긴…”

물론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끝낼 정도로 만만한 놈은 아니다. 로키시가 명백히 불편해하는 걸 보면서도 빨리 말하라고 독촉하고 있다.

“나랑 엘피의 자존심을 깎는 일이야. 물어봐도 답 안 해줄 거란다.”

“자존심?”

“여자끼리 그런 게 있어.”

전형적인 얼버무리기. 남자들은 모르는 거라고 시치미를 떼는 수법. 그러나 효과적인 공격에 에키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세 명이 뭘 했는지도 이야기해줬고 굳이 엘피의 이야기를 파고들 필요가 없는 상황이니 한발 물러서주는 모습이었다.

“그럼 엘피가 어떻게 됐는지만 알려주시죠.”

“다리를 좀 부러뜨리긴 했는데 제대로 고쳐놨어. 한동안 절뚝거리긴 하겠지만 금방 달릴 수 있게 될 거고.”

“제가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걸로 보입니까?”

“하, 에키시. 너도 예상하고 있잖니? 너를 깎아내린 짓을 했거든? 내가 용서할 리 없잖아? 평상시에 네게 장난을 걸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진짜로 저질렀어. 그래서 철저하게 조교했지. 레인 공주님에게 받은 약도 있고 정신이 마모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단다.”

“레인 공주님에게 받은 약이라면… 설마…”

“아이 공주님께 쓴 그거야. 어디에 쓰는 건지는 알고 있지? 그 자리에서 들었잖아.”

“완전히 위법이잖습니까?!”

“죽여도 됐는데 굳이 살려놓은 거야. 그런 걸 따질 필요 있어?”

“큭…”

그래도 블랙우드 가문에서 열심히 일해줬던 기사. 최현준이면 모를까 에키시는 엘피를 나름 가족처럼 생각해 있었기에 이번 일에 대해 충격이 컸다. 블랙우드 가문의 정보를 타국에 흘린 것도 모자라 자신을 진심으로 깎아내리다니.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지만 로키시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몸에 이상은 없고 성격도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조금 공손해지게 만들었을 뿐이란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직접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 안 그래?”

그 말을 듣고 누가 고개를 끄덕일까. 엘피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 모를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그런 말을 하다니. 이래서야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한 걸로 밖에 안 보일 텐데도 그런 언행을 취하고 있다.

“이 자리에 없다는 건 방에 돌려보냈단 의미겠죠. 언제쯤 만나볼 수 있는 겁니까.”

“너 엘피랑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너무 신경 쓴다? 평소에는 잘 만나지도 않던 주제에…”

“언제 만나볼 수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훙, 그렇게 괴롭혔으니 오늘은 쉬어야 해. 엘피의 의향도 있고 내일은 만나볼 수 있을 거야. 본인이 너를 만나고 싶어 했거든.”

“엘피가? 저를?”

“분명 너에게 사죄하고 싶은 거겠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 혐오자인 엘피. 에키시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에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그 독설가가 에키시 자신에게 사죄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된 건 물론이고 로키시가 억지로 사죄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거다.

“참고로 오늘부터 엘피는 기사직에서 내려왔어. 필요할 일이 생기면 부르겠지만 그 외에는 다른 일로 부려먹을 거야.”

“누구 마음대로요?”

“애초부터 내 부관이야. 내 마음대로지.”

“……”

“넌 가족한테 너무 무르다니까. 나쁜 일을 했으면 벌을 주는 게 당연한 거야.”

까고 말해보면 절반 이상은 로키시 본인의 분노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엘피가 아예 잘못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 평민 출신 기사직이 공작가의 장남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는 건 누님 이전에 하나의 귀족으로서 속이 뒤틀리는 이야기일 테니까.

“그렇게 심한 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 엘피가?”

“다시 말하지만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어. 다만, 자존심적으로 좀 그랬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복귀할 테지만 학교 내에서는 기사 자격 박탈이야.”

“학교를 졸업해 다시 친가로 돌아갈 무렵은…”

“벌도 줬고 그 부근에는 다시 부관 자리에 앉혀 놓을 테니 안심해. 에키시 너는 나를 너무 나쁘게 보고 있어. 그래도 같이 산 정이 있는데 그렇게 쉽게 버려버릴 것 같아? 이 누님도 사람이야 사람.”

“어떤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건지… 하핫…”

지하실에서 들려온 끔찍한 비명소리. 도중에는 신음소리로 바뀌었지만 피가 튀긴 걸 보면 평범한 체벌은 하지 않았음을 에키시도 알고 있다. 의사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반복했는데 그것을 정으로 처벌했다니 우스개소리일 뿐이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수용해줘야 하는 거지? 엘피를 처벌한 이유를 얼버무리셨지만 죽이진 않고 살려두긴 했고. 언젠가 복귀 시킨다니 지금 당장은 납득은 하겠지만. 아이 공주님의 이야기부터 레인 공주님까지 모조리 이상하잖냐. 우리 누님은 물론 썬까지 내가 모르는 일에 끼여있는 모양이고…’

분명히 진실은 섞여 있지만 그것을 걸러낼 기준이나 채가 없다.

‘애초에 뭘 물어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누님이 아이 공주님께 질투를 하고 내게 고백을 해서 결혼까지 부탁했다. 그런데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한 걸로 그 질투를 잠재우고 아이 공주님과 친해졌다고? 그 공주님께서 나 아니면 레인 공주님과 친해져서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그러니까 저번 강간 사태를 눈 감고 넘어간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길 수 있겠냐. 아이 공주님의 위태로운 위치를 생각하면 아예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분명 다른 이유가… 그래… 하나쯤은 더 있을 거다…’

아이 공주님이 이번 이야기를 그냥 넘긴 이유가 있다며 추측을 하는 에키시. 그 아이 공주님께서 진심으로 자기를 노리는 걸 모르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 나라의 공주님께서 다른 나라의 공주님의 성 노예가 될 뻔한 거다.

그런 대형 사건을…

에키시를 진심으로 사랑해버려서…

그를 공략하기 위해서…

그저 눈감아준다고 한다면…

‘나 때문 일리는 없다. 아이 공주님과 만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저번 데이트에서 갑자기 잠든 것도 있으니 무례하게만 보였을 거니까. 정말로 누님 말마따나 나를 정치도구로 사용하려고 했을 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때문이라고 하는 도끼병 걸린 생각은 아예 배척해두는 게 좋겠지…’

그래, 보통은 이런 반응이 정상이다. 한 나라의 공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그런 대형 사건도 묻어준다는 것 따위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불경하기 그지없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아이 공주님의 허벅지에서 잠들었을 때… 갑자기 잔 것도 그렇고…’

혹시 또 약을 먹여졌나 하면서 의심암귀에 빠지는 에키시. 실제로 약을 쓰긴 했지만 아이 공주님은 에키시를 정치도구를 넘어 사랑하는 이로 보고 있음에도 오해는 깊어져가기만 했다.

로키시와 마찬가지로 아이 공주님의 사랑도 험난하기만 한 상황.

이 싸움(사랑)에서 승기를 잡은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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