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 악역 영애 누님 루트
그런 만남 후 약속된 시간이 되자마자 사람들이 모여왔다. 쁘띠 왕성이라고 하나 그 화려함은 원본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기에 열기 자체는 노인네들이 모인 그곳보다 좋았고 그 열기에 맞게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름 가격이 나가는 보석과 드레스로 치장한 여성분들. 자신의 강인함이나 남성성을 드러낸 남자들. 기사도 아닌데 크고 화려한 검집을 허리에 매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여성들은 잔뜩 끌어들여 이목을 끄는 사람도 있었다.
신입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라 해도 현실의 대학처럼 빡빡한 건 아니었다. 학교 내부의 불문율 때문에 약간의 하극상조차 일어나는 장소. 그 불문율이란, 약간의 신분 차이 정도는 눈감아주는 것.
말 그대로 하급 귀족 여성에게는 신데렐라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에로 게임 그 자체인 설정.
에로 게임 특성상 남자 주인공인 썬이 다른 여성들을 건들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설정이겠지만 이건 이쪽 현실도 별반 바를 바 없었다. 그녀들이 주로 노리는 건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거나 돈이 좀 있으면서도 삼남 쯤 된 남자. 아니면 소문이 안 좋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남들이 건들지 않는 측.
‘나 같은 경우는 압도적 후자였었지… 입학 후 많은 여성들에게 인사를 받았지만 지금은 전부 떨어져 나갔고…’
가끔 챌린지 정신이 활발한 여성분께서 정말 고위직인 남성에게 어택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자가 여성분을 꼬셔 출세하는 경우도 있으니 여러모로 꿈이 퍼지는 장소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 같은 경우는 블랙우드라는 가문명 때문에 그런 여성분들께 사냥당하는 측.
그래서 이런 곳은 달갑지 않았지만…
오늘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 공주님?!”
“눈꽃 공주님이다…”
“역시 오늘도 참석하신 건가!”
“상대는 있나?!”
“파트너를 데려오신 모양이야…”
“그 옆에는?”
“그 녀석이다, 그 녀석, 블랙우드 가문의 방탕아…”
“뭐라?!”
검은 정장을 걸치고 블랙우드 가문의 문양이 박힌 망토를 휘날린 채 공주님을 에스코트했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신 아이 공주님은 평상시 즐겨 입던 새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나와 상반되는 모습으로 나란히 섰다.
흑과 백.
최현준의 감성으로는 부끄러운 중2병 조합.
에키시의 감성으로는 이대로 몸도 섞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뿐.
타인의 눈에는 괜찮게 보였던 건지 얼굴만 보는 여성분들은 감탄사를 내뱉었고. 내 소문을 꿰뚫고 있는 몇 귀족들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놓았으며. 처음부터 아이 공주님을 노리고 있던 하이에나들은 대놓고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오래간만에 콧대가 높아져 버렸습니다. 기사나 영지민들을 상대로 뭔갈 자랑을 할 때는 있지만 이렇게 같은 귀족들을 상대로 여성분을 자랑한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어깨가 으쓱해져서 웃음이 멈추질 않네요.”
“후후, 에키시 공도 참. 그렇게 방탕하다 하면서 파트너로 삼을 여성분 하나 알지 못하다니.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인가요?”
“그 소문을 지우려고 여기에 왔는데 악명만 쌓일 뿐. 오늘도 그렇게 될 예정이었지만 공주님 덕에 치욕을 면했습니다.”
거듭 감사함을 표현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그 손등에 키스를 했다.
“감사합니다, 아이 공주님.”
“어머나…”
놀란 목소리를 내는 아이 공주님. 그러나 아예 싫지는 않으셨던 건지 키스를 받은 손등을 집어넣은 후 반대쪽 손을 내밀어왔다.
“기왕이면 이쪽도 허락해버릴까요?”
“하핫, 욕심도 많으셔라. 저야 기쁘죠.”
그리고 거기에도 입술을 대주니 손을 뺨에 대고 기쁜 것 같은 목소리를 내왔다. 아이 공주님의 피부가 워낙 새하애서 그런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그 모습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가 됐다.
“큭…”
“히야앙, 미남 미녀라 그런지 그림이 된다앙~!”
“무슨, 웃기고 있네.”
“작위로 여자나 먹어대는 놈이…”
“어째서 저런 놈이랑…”
옆에서 들려오는 전형적인 대화.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들 정도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 이런 행위에 필요한 건 관객이라는 거지. 기분 나쁠 정도의 불쾌함이 오히려 감미가 되어 내 기분을 들뜨게 하고 있다.
“이런 게 취향이신가 보네요?”
“하… 하하…”
물론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아이 공주님에겐 들켰지만 재밌으니 봐준다는 식으로 휙 넘어갔다. 저 끝에서 인파를 만들고 있던 우리 로키시 누님과 레인 공주님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 사람 다 엄청나게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쪽도 우리를 확인했네요… 레인과 로키시… 그 옆에는 썬이 말했던 기사분일까요…”
“저희 누님과도 아는 사이인지요?”
“한두 번 이야기를 나눈 정도지만요. 분명히 그쪽 성벽인지라 꽤 놀랐었어요.”
“레인 공주님과도 친하신 걸로 예상됩니다만… 말을 놓으면서 편하게 부르셨기도 하고…”
“저쪽에서 멋대로 록온 했을 뿐이지만요.”
“저희 측 사람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네요. 썬도 그렇고 호모우 국에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에키시 공이랄지, 그리 대놓고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다른 사람들에겐 저 두 분이 불편하다고 딱 잘라 말 못 하니까요.”
정말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 괜찮았다며 웃어넘기셨다. 그러나 방금 내가 손등에 키스한 것과 달리 미묘한 뜸 들임이 있었기에 완전히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이 공주님은 내가 알기로는 노말이고 자기 동생을 극진히 아끼는 것 빼고는 평범한 측. 그런 분께서 저 두 사람에게 노림 받고 있으니 성적이나 심적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실 테지.’
이대로 쭉 가면 썬이나 아이 공주님께서 즉위하실 테고 이런 곳에서 추문이 퍼지는 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하니… 앞으로의 루트를 생각해보면 참 고생이 많으신 분이구나 싶어… 마음에서 즙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키시 공?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하시나요?”
“아뇨, 그, 가족이 폐를 끼치고 있으니 너무 무안했던지라…”
“직접 해를 끼치신 것도 아니니 그리 마음 쓰지 마세요.”
오늘은 오명을 풀러온 것. 그게 아니더라도 그 소문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 전부 내 목적이었지만 그것을 굳이 공주님의 입으로 구구절절 읊으면서 내 편을 들어줬다.
“그보다 지금 당장 에스코트해주세요. 당연히 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붙어주시겠죠?”
“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네, 제 친우가 함부로 무능자 취급받는 건 좀 그렇고. 그 소문이 「좀 적당히 줄어들 때까지는」도와 드릴 거랍니다.”
“폐를 끼치는 게 아닐지…”
“친구끼리 필요할 때 서로 돕는 거죠. 에키시 공도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와주실 거잖아요?”
“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그걸로 된 거잖아요? 너무 생각이 깊으면 그건 그것대로 보기 싫으니 활짝 웃어주세요. 겨우 하루 이틀 이야기를 나눈 제가 말하기는 뭣합니다만. 딱 봐도 경박한 얼굴이 에키시 공 다우니까요.”
“하하하하핫……”
물론 오늘 이 자리는 그 소문을 지우러 온 거니 진짜로 그러지는 말라며 경고까지 하셨고. 결국 그 상태로 아이 공주님을 에스코트하게 됐다. 처음에는 우연찮게 만나 내 파트너가 되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내 소문을 지우는 데까지 협력하실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이 공주님께 친구로서 도움을 준다라. 방금 의미심장하게 말한 것도 있고 누님을 떨어지게 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은근히 돌려 말씀하신 거 같다. 그것 이외에는 내가 도움을 준 일이 따로 생각나지도 않고 그 부분도 눈치 좋게 케어하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