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은빛 암캐와 수면 허브(1)
그런 영문모를 상황도 잠시. 다음날 내가 있는 기숙사의 반대편으로 초대받아 그쪽으로 나가게 됐다. 학교용 사교장인 쁘띠 왕성의 바로 앞. 거리를 사이에 두고 호모우 국의 필두 귀족과 레즈우 국의 필두 귀족이 사는 곳이 나뉜다. 이쪽 토지 자체가 왕족이나 공작가를 위해 할당된 장소고 반대편에 설치된 곳도 마찬가지다.
나머지 귀족 학생들은 거리 사이에 지어진 기숙사에서 지내거나 기사의 경우 훈련장이 가까운 곳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다. 아니면 아예 학교 부지 밖에서 자리를 잡은 자도 있으나 정말 몇 안 되는 경우다. 용병 출신이나 작위가 없는 호위가 대게 그런 위치를 유지했다.
어쨌든, 내가 향하는 곳은 타국의 필두 귀족이 있는 곳.
그것도 이번 상대는 그 공주님이시다.
“기합을 넣어야겠어…”
머릿속으로 정보를 조합해서 최대한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단어를 고른다. 일단 제일 먼저 조심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썬·라이니르의 건. 그를 욕하는 순간 그 온화한 얼굴이 변화하는 것도 모자라 호감도가 바닥을 뚫고 즉시 배드 엔딩행이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니 망정이지 죽는 것까진 안 가겠지만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없어질 거다.
그다음은 하드 교단의 건인가. 저쪽 내부에서는 그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집단이니까 지금 단계에서는 별문제 없다. 이 시점에서 공주님께 접촉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나중에 일 터지면 하드 교단에 대해 말을 꺼내온 날 의심할 수도 있으니 굳이 꺼낼 이야깃거리는 아닌가.
‘청렴결백, 차별 없는 사람, 비 폭력주의자, 이 게임의 히로인 치고는 드물게도 레즈비언 속성이 없는 여자…’
좋아하는 건 자기 동생인 썬과 호모구 국의 이야기. 그 외에도 음유시인 이야기나 용사 전설 같은 것도 좋아하고 사교회에도 자주 얼굴을 들이밀어 만나기 편한 위치에 있다. 명백한 지뢰 하나 빼고는 대게 용서해주는 타입이라 그 어떤 말을 꺼내도 좋지만…
‘역시 썬을 둥기둥기 해주는 게 제일 호감도 올리기 편하겠어.’
이게 효과가 확실할 거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동생을 극진히 아끼는 사람이고 그 동생이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노려져 여기까지 왔다는 걸 감안하면 여자만 밝히는 날 경계하진 않겠지. 일단 「여자」를 좋아한다는 부분을 강조한 후에 썬을 칭찬하고 둥기둥기 하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 일 것 같다.
‘후, 노려라! 내 마음의 안식처! 어떻게든 눈꽃 공주님을 공략하는 거야!’
저 공주님도 결국 이 게임의 히로인. 공략하면 집착이 심해지겠지만 다른 이들만큼은 아니니 최고의 히로인이 될 수 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좋아하는 타입이기도 하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에키시·블랙우드가 아니라! 소인배 최현준으로서 덕심을 가지고! 자, 눈꽃 공주님께 당당히 돌겨어억!’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건물로 발을 들인다. 앞을 지키는 몇 기사들이 나를 수상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내 얼굴과 문양을 보고 물러섰으며 「안에서 기다리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숙사라 쓰고 대저택이라 읽는 곳을 안내해줬다.
얼굴을 투구로 가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여태까지 본 공주 기사 장비와 달리 제대로 된 기사가 쓰는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은색으로 펄럭이는 망토가 공주님과 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목소리를 봐선 남자인 거 같고 아마 이 녀석들이 썬의 그림자 호위 겸 배드 엔딩 시 썬을 게이로 만드는 그놈들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그렇게 생각하니 엉덩이가 무서워지는군.’
“이쪽입니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무덤덤하게 길 안내를 하는 호모우 기사. 긴 길을 따라 들어가 정신병 걸릴 것 같은 흰색 복도를 지나면 그 끝에 정원으로 나가는 길이 하나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아침부터 편안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일단 인사 대신 기숙사의 색에 대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기네들이 일부러 흰색 도배를 한 건 아닐 테니까 여기서 따지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 이런 커다란 정신 병동 같은 곳에서 저 두 사람이 산다고 하니 나름 어울리긴 했어. 차라리 흰색 대신 저 은발에 어울리는 은색은 어땠을까 싶지만 그건 또 햇빛이 번쩍거릴 테고 말이야.
그래, 배경 CG 그린 놈이 제일 나빴다.
씨발.
“어머나, 어서 오세요. 에키시·블랙우드 공 맞죠?”
그런 불만을 숨기고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가면 썬과 공주님의 얼굴이 보였다. 한쪽은 노출도 높은 백색 드레스에 터질 것 같은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고. 썬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흰 정장 차림으로 아이 공주님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호모우 공주님. 제가 그 에키시·블랙우드 입니다. 레즈우 왕국에도 이름이 널리 퍼질 정도로 아름다우신 공주님께서 이런 미천한 무뢰배를 부르시다니.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일단 처음 보는 사이기도 하고 당연히 예의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을 바닥에 대는 행동. 블랙우드 가문의 남자가 타국의 공주에게 머리를 내리다니 너무나 과한 예절. 이 자리에 누님 계셨다면 엄청 마음에 들지 않아 했겠지만 난 공주님의 호감을 벌고 싶었기에 좀 과하게 나갔다.
“어머나, 어머나,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만나보고 싶은 건 저였는걸요. 부디 머리를 드세요. 오늘 처음 본 타국의 남성분에게 이렇게 머릴 숙이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요…”
“실례했습니다… 공주님을 만나는 일에 긴장을 해서 그만…”
“듣던 것과는 인상이 틀려서 놀랐어요. 생각 외로 자상한 분이시네요.”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신 걸까.’
보아하니 무능에 관한 소문은 아니다. 혹시나 싶어 아주 살짝 썬에게 시선을 보내니 아니나 다를까 내 눈을 휙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우리 주인공은 내가 없는 사이 쓸데없는 말을 막 불어넣으신 모양이다.
“에키시 공. 어서 앉으시죠.”
“그래…”
그런 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고 내게 자리를 권유하는 썬. 그 뻔뻔스러운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이 터졌고 나중에 괴롭혀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썬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블랙우드 공이 레인과의 불화를 해소시켜 줬다고요.”
“에키시로 됐습니다. 게다가 그 일도 제가 해결한 게 아니라 애초에 해소될 일이기도 했습니다. 썬이 잘 해줬고 레인 공주님도 잘 자제해줬다고 봐야겠죠.”
“어머나, 친절하셔라. 에키시 공의 위치라면 공주님의 뺨을 친 기사를 용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그때는 좀 특이한 경우였으니까요… 친구를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고 타당한 일이라 봅니다만…”
우리 공주님이 「어머」계열이면 이쪽 공주님은 「어머나」계열이다. 겨우 한 글자 다를 뿐인데 뭐가 이렇게 인상이 다른 건지 한 번 캐물어보고 싶다. 다행히 인상이 나쁘지 않은 건지 시종일관 싱글벙글하시는 게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친구인가요? 썬과?”
“네, 제 소문을 들으시면 알겠지만 귀족 치고는 너무 방탕해서요. 그 덕에 또래인 남자 친구가 전혀 없습니다. 그 때문인지 썬과는 긴밀히 지내게 됐군요. 그러나 공주님과 썬의 관계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 상황이 좀 생소하긴 하네요. 공주님도 그와 긴밀하게 지내시는 걸로 보입니다만…”
“비유입니다만, 그는 제 피붙이 같은 아이라서요. 그 때문에 다른 기사들과 차이를 두고 있답니다. 저도 친구랄 게 썬 뿐인지라 그와 친해진 에키시 공을 만나보고 싶었던 거고요.”
“틀림없이 신분차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럴 리가요. 우리 사고뭉치 기사는 따로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는 모양이에요.”
“호오…”
아이 공주님께서 차를 마시는 그 순간 썬이 얼굴을 붉히며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런 상대 없습니다!」라며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게 오히려 수상스러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공주님 루트로 쭉 달리고 있는 건가. 이번 소란도 간단히 끝나기도 했고 말이지.
“내가 안 보는 사이 공주님과 그렇게 친해진 거냐?”
“에키시 공도 참! 공과 하루 종일 붙어 다녔으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레인 공주님과는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때 뺨을 때렸던 때 빼고요!”
“그렇게까지 격렬히 부정할 이유도 없을 텐데. 이런 말을 하기에는 뭣하지만 레인 공주님은 외형만큼은 좋으신 분이고. 널 마음에 들었답시고 그런 무례도 용서해줬으니 통도 크다고 본다만.”
“제가 남자라는 걸 들키면 죽는다고 말씀하신 건 다름 아닌 에키시 공 아닙니까?!”
“모처럼 타고난 외형이다. 공주님을 살살 꼬드겨서 남자라는 걸 들켜도 될 정도로 친밀해진다면 될 텐데. 남자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싫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흥!”
입으로 흥 흥 흥 소리를 내면서 또 고개를 돌리는 썬.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와 아이 공주님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실제로 친구랄 게 딱히 없는 사람이신지라 이런 상황도 즐거우신 모양이다. 사교회에서는 인기가 많았을 텐데 개인적으로 친밀할 상대는 없었던 건가.
“공주님께서 피붙이라 표현한 기사에게 말하기엔 좀 뭣합니다만.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입니다.”
“어머나, 기우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에키시 공도 아이 공주님도 너무하십니다! 저는 두 분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아무도 장난감 취급하지 않았어. 다만 건들면 즉각 해서 반응이 돌아오니까 중독성이 생겼을 뿐이다.”
“그게 장난감 취급입니다!”
“놀리면 재밌는걸. 광대 같아.”
“광대 취급이 더 심합니다만?!”
“그런 일을 벌인 직후다. 아이 공주님도 너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셨을 테고 광대 취급쯤이야 웃으며 넘어가는 게 도량 아니겠나. 지금이야 웃을 수 있지만 뺨을 때린 당시에는 심각한 상황이긴 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무 말 못 하는데요…?!”
등 뒤로 쿠궁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짓는 썬. 자기가 저지른 일이니 자업자득. 누군가가 실드 해주는 사람도 없고 나도 공주님도 그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연스레 차를 즐겼다. 공주님의 목적이 날 보는 것 또는 친해지는 거라면 벌써 목적을 달성한 거라 볼 수 있었다.
‘썬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이야기가 스무드하게 흘러가는군.’
처음 만난 것치곤 너무나 친구스러운 분위기. 이렇다 할 중압감도 없었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눈꽃 공주님의 몸매를 감상할 시간도 생겼다. 크게 부풀어 오른 폭유에 드레스에 씹힌 살집. 이쪽을 바라보는 그 눈에는 여전히 상냥함이 담겨 있어서 우리 누님이 좀 닮아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있다.
“후훗, 썬과는 진짜로 친한 사이인가 보네요…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만…”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 공주님.
“제가 할 말도 아니지만 썬은 이런 애라서요. 혹여나 이 사고뭉치가 에키시 공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나 걱정이 들었거든요. 공주님의 뺨을 때려놓고 하루 만에 일이 정리된 것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걱정하시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청렴결백한 점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죠. 그 일은 정말로 조용히 끝났고 뭣하면 레인 공주님께 직접 물어봐도 될 일입니다. 공주님들끼리 만나 이야기 정도는 하고 계시잖습니까.”
“실제로 만나 봤지만 하루 종일 싱글벙글 거렸고… 문제는 없겠죠…”
그러더니 이번에는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짓는 아이 공주님. 혹시 꺼림칙한 질문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점은 당연히 감사하고 있고… 이렇게 이야기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 기쁩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혹시 에키시 공은… 호모우 왕국의 야오이 교단에 입단하신 건지…”
“아이 공주니임?!”
난 또 그 이야기인가 싶어서 별 반응 없었지만 썬은 달랐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시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거다. 질문받은 내 쪽이 침착해 있었기에 「난리 피우지 말고 앉아라」며 그를 달랬다.
“요즘 자주 듣는 말입니다만 애석하게도 노말입니다. 근친이라던가 그런 쪽은 관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야만인 측의 성사정과 호모우 국의 동성애는 그저 개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거든요. 물론 교단을 차별하는 건 아니니까 그 부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이쪽도 교리를 밀어붙일 생각은 없습니다만…”
“썬의 외형이 저러니까요.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달라붙으려는 남자들이 있었나 보죠? 호모우 국의 야오이 교단은 그쪽 방향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쉽사리 예상이 갑니다.”
“예…”
“에키시 공도 저도 노말입니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으셨잖아요!”
“그래도 걱정인지라…”
“같은 남자로서 선을 지키겠으니 걱정 마시죠. 다시 말하지만 같은 남자에게 손을 대는 건 제 취향이 아닙니다.”
“어머나,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안심이 됩니다만…”
그러나 그걸로 만족 못 하신 건지 예시가 바뀌어 질문이 날아왔다. 나를 테스트한다고 생각하고 받아 줄 생각이지만 썬의 반응이 격렬해졌다.
“혹시 썬이 여자라면 어떻게 하셨을 건가요?”
“공작가의 힘으로 억눌러서 덮쳐버렸을 겁니다. 약점 잡을 거리도 많은 애고 품에 쏙 넣었겠죠. 다만 그 경우 레인 공주님이 진짜로 발광할 테니까 손을 뗄 경우도 있겠지요. 우리나라의 공주님을 상대로 치정 관계를 벌이고 싶진 않으니까요.”
“만약 레인이 손을 떼고 에키시 공이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거리낄 이유가 없겠네요. 만약 다른 귀족들이 제 라이벌이 된다면 가문 채로 무너뜨려 주겠습니다. 그 후 썬을 데리고 와서 저희 가문에 종속 시켜 평생 길러버릴 겁니다.”
“어머나, 로맨틱해라~!”
“공주니이이임?! 에키시 고오오옹?!”
일부러 악역스러운 분위기를 내며 나쁘게 웃어보았다.
아니지, 일부러라니, 이쪽이 본성이잖아?
그러나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역시 그 소문은 진짜란 건가요?”
“블랙우드 가문의 방탕아. 무능한 에키시. 누님과 마찬가지로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씁니다. 그리고 썬 정도라면 위험을 감수해도 남는 보수 아닙니까. 물론 여자라면의 이야기입니다만.”
아이 공주님께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찬스였지만 또 그 습관이 도져 「아차」 해 버렸다. 아이 공주님은 내가 무능이라 자기소개하는 걸 듣고도 그러려니 했으나 썬은 다른 의미로 놀란 건지 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키시 공!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뭐냐, 왜 그렇게 화를 내? 공주님이 예시를 들어서 진지하게 답했을 뿐이잖냐.”
“그 말은, 즉! 아이 공주님이라면 이미 사정권 내라는 의미 아닙니까?!”
“말할 필요도 없지. 아이 공주님을 보고 연심을 품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 보냐. 사정권을 한참 넘어서 아까부터 내 심장이 멈추질 않아. 멈추면 죽겠지만 말이야.”
“그런 건 좀 숨기면 안 됩니까?! 너무 불경하잖아요!”
“오히려 숨기는 편이 불경하다고 본다. 아이 공주님은 날 친구로 대하셨고 나도 그에 응해 본심을 털어놓은 거야. 나도 너에게 그러지 않았냐?”
“으으으으읏~!”
“어머나, 솔직함은 미덕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선 목이 베이겠네요?”
“외형에 관한 칭찬은 입에 닳도록 들으셨겠죠. 그렇기에 일부러 그쪽은 건들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제 칭찬이 불편하셨습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여자는 언제라도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생물이랍니다. 에키시 공의 진심 어린 본심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후후…”
아이 공주님은 내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손뼉을 한 번 치고 쿡쿡 웃었다. 얼굴이 빨갛게 것이 부끄러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니까 말이야.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해도 칭찬을 싫어할 리 없다.
“대체 두 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런 걸로 통하시는 겁니까아…”
“글쎄, 하지만 사람이 친해지는데 별 이유가 없는 건 확실하지. 애초에 너란 연결고리가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가 잘 풀린 거기도 하고 말이야.”
“맞아요. 썬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네요.”
오래간만에 말장난에 맞춰 줄 상대가 생겨 기쁘다고 하는 아이 공주님. 메이드를 시켜 다과를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은 조금만 이야기를 한 후 돌아갈 생각이었다만 상대방 쪽이 놓쳐주지 않았다.
“어때요?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좀 아깝고. 이렇게 말 벗이 된 기념으로 하룻밤 주무시고 가는 편이?”
“어린애도 아니고 실례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썬도 동성 친구가 생긴 건 오래간만이거든요. 같은 이붓자리에서 누워 밤새 이야기를 떠들면 좀 더 긴밀한 관계가 될 거라 생각해요.”
“아이 공주니이이임?!”
“썬의 반응을 보니 그러고 싶기도…”
“에키시 공도! 너무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기숙사가 바로 앞이기도 하고 누님께 사람 하나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면 되겠지 싶어서 그 말을 수긍했다. 바로 옆에서 썬이 원숭이처럼 끽끽 거렸지만 나와 공주님은 그저 웃을 뿐이다. 나야 공주님은 물론 썬과도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찬스가 아닌가?
그들과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니…
‘외부인을 이렇게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만.’
썬이 이상한 짓을 할 리 없고 아이 공주님은 더욱이 그렇다. 혹시 다른 사람이 이런 권유를 했다면 일단 한 번 물러서겠지만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이 이상의 기회가 오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즐겁게 떠들다 갈 수 있으면 베스트인가…’
“에, 에, 에키시 공! 진짜로 머물고 갈 생각입니까?! 그것도 진짜 저와 같은 이붓자리에서?!”
“모처럼 권유한 것을 찰 이유가 없어.”
“으윽…”
내게 달라붙는 썬을 떼어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에 넘어오는 향과 맛에 얼굴 근육이 이완되고 아주 조금이지만 잠이 몰려왔다. 차와 분위기가 잘 어우러져서 긴장이 빠진 걸지도 모른다…
‘피곤한 건가… 졸지 않게 조심해야겠는데…’
그 후 해가 어두워지기 전까지 즐겁게 떠들었지만…
잠이 몰려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가끔 의식이 뚝뚝 끊기며 코를 골았지만…
‘앗…’
마지막에 눈을 감기 전…
나는 자연스럽게 썬과 같은 이붓자리에서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