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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 귀족 여체 하렘-14화 (14/199)

 프롤로그 종료 - 썬·라이니르 루트〈공략 완료〉

학교 부지 끝 성벽과 탑이 있는 곳 바로 아래.

나는 자신의 바보 같음에 질려 한탄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바보 놈! 여기 바보가 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아버지의 손을 빌리게 생겼잖아! 난 이제 끝이야! 기사 실격! 언니가 그런 얼굴을 할 줄이야!”

또 저질렀다!

타국에 정체를 숨기고 온 것도 모자라 왕녀의 얼굴을 쳤다!

그것도 나에게 도움을 준 에키시 공의 앞에서!

갸아아아악!

“돌아가서 빌 수도 없고… 흐아아아아…”

나 자신이면서도 너무나 혈기가 넘치는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나란 여자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공주님의 얼굴을 쳐놓고 기세등등하게 나온 걸까. 이제 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겠지만 결국 내 자존심은 꺾이리라.

그날 당일 언니께 이야기를 했더니 들고 있던 잔을 땅에 떨어뜨릴 정도로 당황하셨다. 동생과 쉬러 왔더니 그 동생이란 놈이 주제도 모르고 타국이라 해도 공주님의 뺨을 쳤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

아버지도 어이없어 하시겠지.

이건 100% 외교 문제야.

“아무리 봐도 기사 실격… 나란 놈은 이렇게 혈기가 넘쳤던 건가…”

에키시 공에게는 미안한 짓을 해버렸다. 당장 내 목을 졸라오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 자리에서 내 목을 치지 않은 이유가 뭔지 궁금할 정도다.

‘언니… 전 천박한 여자가 됐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 몸을 욕보이는 거라면 참을 수 있었음에도 에키시 공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모습을 보고 뇌수가 들끓어버렸다. 부끄럽기 그지없는 분노. 불의에 정의를 행했을 뿐이라면 몰라도 단순히 화풀이를 했을 뿐.

이 나라의 귀족을 오해하지 말라달라며 일주일 내내 호의를 보여줬던 에키시 공의 말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이 나라의 사람들을 좋아할 수 없었던 거다. 각 나라의 교단과 그 교리가 어떤 것인지는 알았지만 설마 노말인 사람에게도 들이밀 줄이야. 생각 이상으로 천박한 모습에 생리적 혐오마저 느껴졌다.

“으윽…”

그냥 그 자리에서 남자라고 설명할걸.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을 잡았기에 입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에키시 공은 내가 남자라는 걸 어느 정도 타이밍을 잡아 천천히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지만…

“여자라고 설명하면 또 덮침을 받고… 남자라고 설명하면 그 호의도 단번에 사라질 테지… 그럼 진짜 외교 문제로 번질 텐데…”

“의외로 우리 공주님에 대해 잘 알고 계셨구만? 분명 어제 일로 질질 짜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윽?!”

내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최근 일주일 동안 질리도록 들은 목소리에 마음 한편이 안정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혼자서 참회 중이냐?”

“에, 에, 에으으, 에키시, 고옹…?”

학교 부지 내에서도 특출나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골랐다만 어떻게 여기를 찾아오신 건지 에키시 공이 성벽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차림으로 검도 휴대하지 않은 채 말이다.

“왜 여기 계십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리 이상한가? 내 친우가 쓸데 없는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한 마디 하러 왔을 뿐인데?”

“쓸데 없는 고민이라뇨…”

일부러 검울 두고 온 건지 그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짖궃은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장난이 성공한 어린애들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만 결코 귀족이 지어도 될 얼굴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투도 평소와 똑같았던지라 나 혼자만 초조해져서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이상하고 자시고! 위험하잖습니까! 공주님의 몸에 상처를 낸 죄인이 있는 곳입니다! 검도 휴대하지 않으시고 그런 곳에서 뭘 하시는 건지?! 위기감이란 걸 잊어먹으셨습니까?!”

“그러니까 너 만나러 왔대도? 네가 날 벨 것도 아닌데 왜 검을 휴대해?”

“에키시 공이 그걸 어떻게 안다고요?! 만에 하나라도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잖습니까!”

“증명해볼까? 흐으으옷!!!”

“으아아아아아아앗?!”

에키시 공은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진짜 그 별명대로 무능인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날 향해 뛰어내렸다. 여태까지 단련을 한 결과인가 아니면 사람을 구하기 위한 본능인가 그런 에키시 공을 붙잡기 위해 성벽을 박차고 떨어져내리는 그를 받아내었다.

“거 봐라, 보통은 죽일 사람을 구하진 않잖냐?”

“진짜로 귀족 맞습니까! 어떻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이런 짓을?!”

“신경 쓰지 마라. 안 받았어도 이런 걸로 상처하나 안 나는 몸이거든.”

“으으윽…”

속았지? 라면서 내 코를 톡 치는 에키시 공. 나는 나 자신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빨갛게 해 그를 지면에 던져버렸다. 공주님 안기 같은 어중간한 자세로 던졌음에도 멀쩡하게 서는 걸 보니 평소보다 밉상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혼자 중얼중얼중얼… 정신병이라도 생겼냐…?”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앞에서 보셨잖습니까… 아무리 제게 호의를 주고 계셨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화가 나셨을 겁니다… 게다가 남자라는 걸 안 순간 저는 끝장이죠… 고민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실제로는 여자지만 이게 이렇게 꼬일 줄이야…

무슨 성별을 자칭해도 어려워질 상황에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나 나와 달리 에키시 공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고 계셨다. 한쪽 성벽에 등을 대고 풀썩 주저앉은 나를 바로 정면에서 내려다보며 싱글벙글 거리고 계셨던 거다.

“어제 일은 걱정하지 마라. 공주님은 어제 네가 뺨을 때린 후에도 하루 종일 기분 좋아 보이셨으니까. 아무래도 하극상 당하는 거에 기뻐하시는 분이셨던 모양이야.”

“네?”

“오히려 내게 상을 내려 줄 기세로 들떠 계셨다.”

그리고 그 입으로 믿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어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그 공주님께서 화가 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에키시 공을 칭찬하신 모양이다.

“그, 그, 그게, 진짜입니까?!”

“진짜야. 네가 남자라는 게 들키지만 않으면 저 호의가 무너질 일은 없을 거다. 너한테 완전히 푹 빠져버린 모양이더라. 나한테 이런 짓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상태랄까… 너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나한테 간곡히 부탁을 하시더라. 눈이 하트 모양으로 변하기 직전이셨다니까?”

“그…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뭐가 좋아서 공주님의 변태스러운 사랑 이야기에 동참해야 하는 건지… 나 원… 기가 찬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유로워 보이는 에키시 공.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나를 바라보는 게 얄밉기까지 했다. 내가 하룻밤 내내 고민하고 있을 사이 에키시 공은 어제 편안하게 잤을 것 아닌가. 좀 더 빠르게 알려줘도 됐을 것을.

“그럼 지금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공주님께서 널 꼬시려고 하겠지만 그리 걱정은 하지 마라. 만약 연인이 되더라도 남자인 게 들키지만 않으면 별문제 없다. 나랑 네 관계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강제로 덮치려 들지는 않을 테니 그 점 안심해도 좋고.”

하하핫 크게 웃어대는 에키시 공. 그러나 방금 그 설명을 듣고 가볍게 넘기면 안 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오해… 말입니까…?”

“그래, 너와 내 관계를 착각하고 계시더라고.”

“혹시 연인 관계로 말입니까?”

“아니, 네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반했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너를 완전히 여자로 본 말투였지. 그 상황을 보아하니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에는 네가 남자인 게 들킬 것 같지는 않더군.”

“아하하, 하하, 핫…”

에키시 공은 그 자리에서 부정하셨다고 한다. 공주님과 연적 관계라니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기도 했고 에키시 공은 날 진짜 남자로 알고 계시니 그 부분이 내심 불편했을 것이다. 공주님과 에키시 공 두 분을 동시에 속이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다.

‘레인 공주님… 천박한 건 둘째치고 관찰안은 진짜배기인가… 내게 뺨을 맞아놓고 그런 결론을 내리시다니…’

아직 언니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본심을 레인 공주님은 꿰뚫어 보고 계셨구나. 역시 여자를 아는 건 같은 여자라는 거겠지. 우리 언니도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정도다. 그날은 바로 옆에 에키시 공이 있기도 했고 대놓고 티가 났을 터.

“절대로 오해는 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라. 호모우 왕국에서 왔다고 해도 야오이 교단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

“네, 저는 노말이라서요.”

“안심해라, 나도 저번에 말했듯 노말이니까. 네 엉덩이에 흥미라곤 조금도 없다.”

‘안심하기 이전에 그런 말을 듣고 낙담해버리는 저(본심)가 있습니다… 차라리 에키시 공께서 그런 취향이 있으셨다면 좋으실 텐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진짜 성별을 까발려버릴까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아니라고 금방 고개를 저었다. 성별을 까발려 왜 성별을 속였는지까지 이야기하고 고백까지 해도 결국 차여버리면 의미가 없어지니까.

‘만약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이 상황에 성별을 까버리다니… 의심스럽게 생각되기엔 충분한 일이야… 게다가…’

“공주님도 참 눈이 없으시지. 이런 껌딱지를 보고 여자라고 생각하다니. 가슴은 내가 더 크잖냐? 오해할 걸 하셔야지.”

“에키시 공?!”

“뭐? 왜 그러냐? 남자끼리 가슴 근육 좀 확인할 수 있잖아.”

“그, 그래도~?!”

이거 때문이다…

이런 행동 때문에 여자라고 밝히질 못하겠어…

이걸 부수입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에키시 공은 날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신다. 목에 팔을 걸어오는 건 기본에 이렇게 팔이나 다리를 만져 근육을 확인할 때도 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스스럼없이 만져오지 않을 건 확실했다.

‘언니, 아버지, 저는 정말…’

부끄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이런 부수입 때문에 밝히질 못했다. 게다가 날이 가면 갈수록 만져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져서 점점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기가 꺼려졌다. 지금처럼 가슴까지 만져지는 건 처음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더러운 감정이 평소보다 더욱 깊숙이 흘러들어왔다.

‘너무나 천박해졌습니다…’

에키시 공이 안 보이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천천히 일어서는 나.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추잡한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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