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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 귀족 여체 하렘-11화 (11/199)

 무능 귀족 - 지뢰와 착각이 크로스!(10)

역시 혈통이 좋으면 그만큼 재능이 있다. 그런 바보라도 힘은 있었던 건지 아주 조금이지만 손가락 끝이 저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조금 저렸다 수준으로 끝났다 해도 힘만큼은 로키시 누님에게 뒤처지지 않았기에 나름 놀라운 일이었다.

맨손으로 사람을 토마토처럼 으깰 수 있는 힘을 가진 상대의 손을 저리게 하다니 놀랄 일은 맞잖아? 방심하지 않고 먼저 검을 날린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공주님도 만족하는 모습으로 떠나셨고 주인공을 눈도장 찍은 겸 내 얼굴도 확인하셨으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썬의 외형은 진짜 예상 외인데. 게임 내에서도 그런 묘사를 해대면서 레즈비언 측에 속하는 히로인들을 꼬셔대긴 했지만. 그래도 좀 과하게 여성스럽지 않나.’

나보고 호모우 왕국의 야오이 교단에 속해 있냐고 질문해왔지만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남자끼리 친해지기 위해서 전생에서 했듯 좀 과하게 들러붙긴 했지만 얼굴을 새빨갛게 하면서 고개를 돌릴 줄이야.

‘너무 천박했던 건가? 용병들에겐 잘 먹혔는데… 쓰읍…’

저렇게 보여도 남자라는 건 확실하다. 본인도 남자라 그랬고 그 속 사정까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런 반응을 함에도 여자라고 오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레즈우 왕국에 잠입한 왕자 썬·호모우. 일단 이 부분은 뭘 어떻게 해도 변함이 없을 거다.

이 나라에 잠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갈린다. 호모인 아버지를 손길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을 고르기 위해, 언젠가 이 나라와 진정한 화평을 맺기 위해, 호모우 왕국에 서식하고 있는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결국 양국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 밑 작업을 하는 거다.

그러나 나비의 날갯짓이 바람이 되어 미래를 바꾼다고 했던가? 아이·호모우는 우리 누님과 마찬가지로 벌써 등장할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누님의 영향인지 아니면 내 영향인지 어제 만났던 썬·라이니르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아이·호모우에 대해 지껄여댔고 이미 이 학교에 편입해 있음을 알렸다.

‘아이·호모우… 성이 웃기긴 하지만… 눈꽃 공주님이란 별명답게 예쁜 사람이었지… 맨 먼저 공략하려고 달렸던가… 근친상간 루트도 좋았지…’

입발린 말로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생각한다. 눈꽃 공주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질 때까지 노력해볼 거다. 누님도 좋아하지만 좀 더 살집이 있는 쪽이 취향이고 기왕 이렇게 미남으로 태어났으니 공주님을 상대로 목표로 하고 싶으니까. 다행히 키 카드는 머리 안에 있고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썬을 살살 녹일 수 있으려나…’

그런 건방지고 나르시시스트 같은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다. 처음으로 하는 좌학을 끝마치고 이제 그 잘난 쁘띠 연회장이나 가볼까 했는데…

“에키시·블랙우드지요?”

“……?!”

성과 비슷한 구조. 또는 그것을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은 거대 학교. 그리고 그 거대하고 화려한 복도 끄트머리에서 어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만이 가득 모인 하나의 파벌. 그 중심에는 어제 본 사람이 서 있다.

썬과 대비되듯 긴 금발과 금안이 인상적인 핑크 드레스 소녀.

레인·레즈우.

레즈우 왕가의 장녀, 이 나라의 제1 공주님이시다.

“누님?”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평소와 달리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한껏 분위기를 내고 있는 누님이 있다. 못된 장난이 성공한 것 같은 여우스러운 표정. 분명 방금까지 같은 교실에 있었을 터인데 언제 공주님들과 합류한 걸까.

“제가 누군지 아시겠나요?”

“이거, 우리나라의 자랑이신 레인·레즈우 공주님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과연 나라도 여기서는 잘난 척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학교 부지 내이기 때문에 과한 충성과 보이지 말라는 것과 작위에 심한 연연을 하지 말라는 게 이곳의 불문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과의 첫 대면에 두 다리를 뻣뻣이 있을 정도로 용감히 있을 수는 없었다.

“첫 만남이라 하는데도 제 얼굴을 하는 것 같네요. 어제 일도 그렇고 로키시의 말도 그렇고 소문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직접 확인차 찾아왔답니다.”

“저따위를 위해 직접 발길을 옮겨주신 공주님의 노고에 사죄드립니다. 공주님의 말대로 저는 무능한 에키시·블랙우드. 블랙우드 가문의 방탕아입니다. 거기 계시는 로키시 누님의 어리석은 동생이오나 공주님의 얼굴을 몰라뵐 정도로 불충한 놈은 아니노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제와는 인상이 다르네요?”

“어제는 일이 일이었던지라 성을 냈습니다. 공주님께 못 볼 꼴을 보여드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여태까지 이 몸으로 살아온 삶이 그랬던 탓에 머리를 숙이는 건 익숙지 않았다. 속이 느글느글 거리면서 화가 났지만 얼굴과 목소리로는 티를 내지 않도록 했다. 내 취향에 그대로 들어맞는 눈꽃 공주면 몰라도 이쪽의 금발은 몸매가 슬랜더한 쪽이라 끌리는 맛조차 없었으니 필요 이상으로 적대감이 느껴졌다.

“흐으으음~?”

‘다짜고짜 발길질은 하지 않는 건가.’

호모우 왕 정도는 아니지만 공주님의 성향도 상당한 지라 첫 대면에 맞을 각오마저 했다만 의외로 조용했다. 한쪽 손으로 핀 부채를 입술로 가리고 눈만을 드러내 이쪽을 평가하고 있는 모습이 내 소인배스러운 성격을 갉아 대기에 충분한 꼬락서니다.

‘게임이면 몰라도 이런 성격 현실로는 정말 별로인데…’

주인공에게 폭력만 휘두르는 히로인이 현실로 넘어오면 그냥 쓰레기 년인 것과 마찬가지. 하물며 그게 주인공 잘못도 아니고 성향이 안 맞아서 때리거나 차별하는 거라면 이미 최악의 부류다. 공략하면 하는 대로 그 성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집착이 심해질 뿐이니까…

“됐습니다. 로키시의 동생이니 어떤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 제가 마음에 들어 했던 메이드를 도와준 것도 있으니 그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왔답니다.”

‘대놓고 손대고 있었다는 말이지… 좀 더 둘러서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어제 보았던 그 여기사분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서 그런데…”

‘게다가 그게 본론인가.’

이 썩어버린 공주님과 주인공을 이어지게 해야 하니 내가 생각해도 미안했지만 이것도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다. 공주님의 성벽이 고쳐지는 유일한 루트기도 하고 양국의 관계도 친밀해진다.

‘이대로 남자라는 걸 숨기고 계속 칭찬해줘 들뜨게 한 다음에 만나게 할까.’

그럼에도 썬은 공주님의 손바닥 치기를 모면치 못하겠지만 그 외형도 그렇고 어제 있었던 일 자체가 호감을 줬던 모양이니 친밀한 관계로 만들 수는 있을 거다.

“어제 보았던 여기사라면 제 친우 썬·라이니르에 관해서 말입니까?”

“네, 어제 보았던 그 멋진 여기사분 말이에요. 타국에서 온 기사라지만 벌써 말을 트게 되셨나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 깊은 기사였습니다… 저라도 좋다면야 어제 그… 아니, 그녀를 보고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 흥미가 생기셨다면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약속을 잡아보겠습니다만…”

“어머, 눈치도 좋으셔라~!”

그런 거 싫지 않다면서 기쁘게 웃는 공주님. 대놓고 진성 레즈비언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그녀였지만 나에게 화를 낼 정도는 아니다. 엑스트라 남자였으면 일단 고간에 발차기부터 들어왔을 테지.

공주님이 의욕을 가진 것도 있고 나한테는 평범하게 대해주게 됐으니 그걸로 됐다. 누님이라고 하는 거대 네임이 있으니까 그 덕을 입은 것도 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최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마치 순풍을 받은 것 같은 배…

원작보다는 좋은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볼까나…

라고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

그 후 일주일 뒤…

썬·라이니르와 괜찮은 관계가 됐다고 생각했다. 부지 내에서 우연찮게 만나도 서로 웃으며 근황을 보고할 수 있는 관계. 내가 장난삼아 「나왔다!」라고 소리치며 어깨를 안아도 「형님 오셨습니까」라며 쓴웃음을 짓고 장난을 받아 줄 정도의 사이는 됐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행동이나 얼굴에 색기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워낙 중성적인 외모인데다가 최근에는 그러한 색이 늘어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강해진 거다. 내가 장난삼아 껴안으면 어깨를 좁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그렇고 약삭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이 애는 남자애라고 몇 번이고 자문자답 하기를 수 일. 실수라지만 남자 똥구멍을 뚫은 적도 있고 그게 트라우마기도 했으므로 그 나쁜 기억을 불식시킬 겸 트라우마 해소용으로 썬을 놀리고 지냈지만 그것도 슬슬 마무리 지어야 했다.

공주님의 닦달이 심해지기 전에 썬에게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했고. 썬에게 우리 공주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까 싶어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만나주길 바랐으며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코로 바람을 후욱 불어내면서 「친구끼리 이 정도야 당연한 겁니다!」라고 소리치는 게 저번에 내가 이야기했던 걸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라면 별문제 없이 이벤트를 소화할 수 있겠지. 만약 맞아도 내가 달래주고 공주님에 대한 대응을 같이 생각해주면서 좀 더 친밀해질 준비를 하면 된다. 이 이벤트로 주인공인 썬은 공주님에게 반할 테니까. 원래라면 프롤로그 때 분수 앞에서 한 대 맞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뿅 가버리는 상황이 됐어야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순서는 이거다.

공주님과 썬이 만난다, 이야기를 나눈다, 썬이 공주님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이게 원작의 흐름(프롤로그)이다.

일단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먼저…

나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을 품고…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안?!

‘이거는 뭐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

짝!

“불쾌하네요! 공주란 여자가 자신을 위해 분주하게 노력해준 신하를 깎아내리고! 하물며 타국에서 온 기사를 희롱하려 하다니! 천박하기 그지없는 계집!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어, 으, 으에, 엣?”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에키시 공에게는 죄송합니다만 이 이상 불쾌해서 못 있겠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직접 호모우 왕국에 서신을 넣어 외교 문제로 만들어 주시길! 그럼에도 머리는 숙이지 않겠습니다만!”

“어, 써, 썬?!”

“흥, 실례하겠습니다!”

학교 부지 내의 거대한 스위트 숍을 전세 냈다. 공주님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고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없도록 타국과의 관계성을 똑똑히 기억나도록 말을 유도하기도 했다. 일단 타국의 기사니 먼저 손을 올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썬이 공주님께 맞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놨지만 상황은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먼저 손을 올린 건…

다름 아닌 썬·라이니르 였기 때문이다…

‘진짜로 뭐냐고 이거… 미친 거 아냐…’

내가 이 자리를 준비했으나 두 사람만 있을 수 있게 좀 멀찍한 곳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썬의 요청으로 같은 자리에 합석. 이 자리를 만들어준 내게 감사를 표하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공주님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공주님에게 있어서 이번 자리의 주역은 자기 자신 또는 썬 본인이었니까 그녀가 내게 감사를 표하는 게 싫었던 거겠지.

애초에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 자체가 드문 공주님이었던 데다가 「그는 신하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한 게 사건의 방아쇠가 됐다. 이번에는 나와 친했던 썬이 내 이야기로 감정이 상한 건지 울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기사 나부랭이기도 하고 공주님과 만나는 것 자체가 기적인 위치니 그런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겐 그 모습이 확실히 보여버렸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나름 잘 흘러간다 생각할 무렵 공주님께서 그 성질을 못참고 썬의 몸을 더듬어버린 게 문제가 됐다. 저건 아무리 나라도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좀 그랬으니 말이다.

내가 눈앞에 있는데도 당당히 추행을 저지르는 모습. 마치 어제 본 그 멍청이의 행위가 떠올랐으나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다음에 나온 공주님의 대사가 위험했을 뿐. 「옆에 계신 분은 목석이라 생각하고 없으신 것 취급하면 됩니다」라며 날 또 깎아내린 게 썬의 한계점이었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정의의 주인공은 마지막 인내심을 짜내 웃으며 그 손길을 피했지만 공주님은 그 행위를 우습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가의 아들이다만. 그런 날 상대로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니 남자는 비켜주는 쪽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여성의 행위를 들여보려 하다니 품성이 의심스럽습니다만」라고 하면…’

「품성이 의심스러운 건 네 쪽이다 금발 빗치」라 말할 뻔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썬의 손이 올라갔다. 슬슬 남자라는 걸 밝혀도 되지 않나 싶은 타이밍이었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공주님? 레인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 그게…”

다행히 방금 그 일을 본 사람은 우리 이외에 없다. 직원은 필요할 때 이외엔 밖을 나가있으라 했고 지금 이 자리에 남은 건 나와 얼굴을 빨갛게 한 공주님뿐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지만…

“이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노기를 가라앉혀주시길 바랍니다…”

“아뇨… 그…”

지금이라면 내가 머리를 숙이는 걸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누님의 힘을 빌려서 이번 사건을 덮어야 할까. 최악의 경우 아버지의 힘을 빌리자며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공주님의 상태가 이상했다.

“공주님?”

“아… 아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입고 있는 핑크 드레스의 가랑이 부분에 양손을 댄 상태로 어깨를 떨고 계셨다. 상당히 강하게 맞은 건지 뺨에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았지만 그것을 부여잡을 생각조차 안 했으며 의자에 앉을 채 다리를 흔들거리며 기쁜 소리를 내셨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그렇고 눈동자도 멍하셔서 날 바라보는 것 같지 않다. 떠나간 썬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여운을 즐기고 계셨다. 설마 그렇게 뻔한 이야기가 있겠냐 싶냐마는 이 꼴을 보니 내 생각이 영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썬·라이니르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후, 후후, 후흐흐흐흐흣, 으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흣!!!! 아, 어떻게 저렇게 멋진 여기사분이 이제야 나타난 걸까요?! 으흐흐흐흐흐!!! 좀 더 앞에 나타나줬으면 좋았을텐데에에에에에!!!!”

‘이런 미친년을 봤나. 뭔 약을 하고 살았길래 이런 감성을 가지신대.’

일부러 남자라는 걸 늦게 말한 게 독이 됐다. 썬을 완전히 록온 한 것 같은 얼굴로 기쁘게 싱글벙글하고 계시잖냐. 천박하기 그지없고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잘난 년이 같은 여자한테 한대 맞고 뿅 가다니 진짜배기 사이코 레즈비언이 다름없다.

‘뺨 맞고 이벤트 일어나는 건 썬 쪽이어야 했는데 왜 당신이 맞고 당신이 뿅 갑니까.’

“이런 기분 정말 처음이네요. 무언가가 막 꽃 핀 것 같아요. 상쾌해서 날아갈 것만 같은 게 지금이라면 뭘 해도 용서해줄 수 있을 거 같아서… 후훗…”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자신이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살살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인·레즈우 공주님. 썬에게 맞은 게 코까지 영향을 준 건지 한쪽으로 코피를 흘리는 게 영 추잡해 보였다.

‘일이 좆같이 꼬이네.’

신하로서 그것을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 무릎 꿇은 자세에서 멋대로 일어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주님의 피를 닦아냈다. 공주님의 얼굴을 멋대로 만지다니 평소라면 얻어맞거나 불경하단 소리를 들어야 할 행위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간단히 용인해줬다.

“에키시·블랙우드? 당신도 저에게 화내야 하지 않나요? 그녀의 말처럼 저는 당신을 바보 취급 했습니다. 그것도 당신을 저렇게나 열렬히 사모하는 분 앞에서 말이에요. 아무리 제가 상대라 해도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줄 이유는 없잖아요? 지금이라면 한 대 정도 쳐도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한대 치고 저와 대등한 자리에 오르세요.”

열렬히 사모한다라…

상대는 남자입니다만.

나를 연적인지 뭔지로 오해하고 계신 모양이다.

“이번 일은 공주님의 장난이 지나쳤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겨우 그 정도 비난으로 레즈우 왕가의 공주님께 등을 돌릴 정도로 무르게 살진 않았고. 공주님과 만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해도 이 나라에 뿌리내려 사는 귀족이니 만큼 풍향계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가문의 모티브는 나무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당신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한다고 해도 따르겠다 그건가요? 저렇게 화난 기사를 상대로,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상대로, 저와 이어지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도?”

“잘 어울리시네요. 여자만 보면 한없이 방탕해지는 공주님에 불의를 못 참고 그것을 수정하려고 하는 기사. 어떻게 보면 최고의 한 쌍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머… 의외로 지껄일 줄 아는 사람이셨네요… 역시 화가 나셨나 봐요…?”

“우리 누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 핏줄 어디 안 간다 그건가요… 제 앞에서 새침을 떼고 계셨다니…”

지금 말을 꺼내고 있는 것도 에키시·블랙우드의 부분이지 나 최현준의 본심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새침 떼면서 소인배스러운 부분을 숨기고 있을 뿐. 공주님의 코피를 닦고 있다니 언제 한대 맞을까 무서워하고 있는 게 본심이다.

“방탕아, 무능, 그렇게 불리면서도 자존심이란 게 있으셨던 거네요?”

“외람되오나 하나 정정하죠. 이 세상에 자존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선을 긋고 있으며 오늘 공주님은 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사의 선을 우연찮게 밟았을 뿐입니다. 공주님께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일부러 자존심을 굽히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자존심이 아예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나중에 큰 코 다칠 겁니다.”

“오늘처럼요?”

“예, 오늘처럼요. 말 그대로 그 큰 코를 다치셨습니다만.”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네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점은 싫어요. 다시는 하지 마세요.”

‘나름 괜찮은 개그였다고 생각했는데.’

코피를 다 닦아낸 후 다시 거리를 벌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은 눈초리와 깔보는 게 사라진 것 같은 분위기를 내뿜더니 내 이름을 읊고는 자리를 뜨셨다.

공주님께 연적 취급이라니 너무 우습다…

같은 남자를 상대로 두고 싸울 생각은 없다만…

‘지금처럼 어중간한 감정일 때 썬이 남자라는 걸 알려버리면 걔 목이 날아가 버릴 것 같고…’

좀 더 사랑이 질척해질 무렵에 남자라는 걸 알려서 이도 저도 못하게 만들 수밖에 없나. 공주님이 썬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게 했으니 그런 점에서 목표는 달성했다고 본다만.

‘이 이상 생각해도 머리가 아플 뿐이다… 돌아가서 쉬자…’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와인을 따고 쉬었지만.

영문도 모를 한기가 계속 덮쳐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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