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능 귀족 여체 하렘-10화 (10/199)

 무능 귀족 - 지뢰와 착각이 크로스!(9)

나는 썬·라이니르.

본명은 썬·호모우.

호모우 왕가의 핏줄을 이은 정통 후계자.

그리고 아버지의 몇 없는 아이였다.

몇 없다는 의미는 말 그대로의 의미다. 가족이래봤자 누님… 눈꽃 공주라 불리는 우리 언니 이외에는 혈연이 없다… 아버지는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호모우 왕국이 받아들이고 있는 야오이 교단에 깊게 심취한 사람이었고 여성에 흥미가 없다시피 하고 있던 분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교리에 충실한 분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남색에 빠져 사는 분. 여성에 관해서는 알레르기가 날 정도로 싫어하는 데다가 날 낳은 어머니는 중성적인 용모였기에 어떻게든 아버지의 하트를 꿰찰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우연찮게 만나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 관계였지만.

그러나, 나도 언니도 결국 여자.

나는 몰라도 특히 언니가 여자인 게 문제였다.

시저링 교단에 의해 여색을 탐하는 이가 많은 레즈우 왕국도 여성 기사를 채용하기 힘든 것처럼 남색이 강한 호모우 왕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축복받은 외형과 몸을 가졌음에도 남자로 살아야 했다. 언니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가의 출신이었기에 모두가 알고 있지만 나는 불행인지 축복인지 이름도 태생도 모르는 여자가 낳은 자식.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것을 알자마자 왕실에 발을 들이고 있는 귀족들의 눈에서 나를 숨겼으며 라이니르 가문의 기사로 길러냈다.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이라 보는 언니에게도 눈총을 주는 녀석들이 있는 마당에 이름도 모를 여자가 낳은 자식이 또 여자에다가 왕인 아버지가 다음 자식을 만들 생각이 없다는 게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끝없이 아버지를 닥달하겠지. 그렇게 힘이 좋으시다면 다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염없이 소리칠 거다. 그러나 아버지가 얼마나 여자를 싫어하는지 나도 언니도 알고 있다. 예전에 레즈우 왕국에서 온 아름다운 여성이 우리 아버지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 정도로 심한 상태를 내보이셨다.

내 존재가 들키는 것으로 왕성 안이 시끄럽게 된다면야 숨기는 편이 좋았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나았고 나 자신도 기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히 언니는 능력이 좋았고 배가 다른 동생인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줄 정도로 상냥하시며 왕성 안에서도 발언력을 늘리고 있다. 눈총을 보내는 귀족들도 언니 하나라면 어떻게든 납득해줄 모양이었으니 이대로 내 정체를 밝혀도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다짐한 어느 날…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인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에 오게 됐으니까…

아버지는 날 몰래 만나러 올 정도로 친절하신 분이었으며 자기 형편 때문에 기사로 살게 된 나를 안타깝게 생각해 언니와 함께 유학을 보내주셨다. 언니는 이 나라에 오랫동안 있을 수 없으니 올해만 있을 예정이었으며 나는 그 호위로 왔다. 다만 나는 언니와 다르게 아버지나 라이니르 가문의 당주에게 허락을 맡으면 몇 년이고 여기에 체류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날 끌어안고 「넓은 곳을 보고 와라」며 토닥여주셨다. 이번 짧은 유학도 언니와 함께 가족 간의 시간을 보내라고 배려해 주신 거였다. 여기라면 우리나라의 귀족들에게 눈이 붙여질 일도 없고 왕실의 특권으로 같은 기숙사를 배치받았으니 언니와 같은 방과 침대도 쓸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언니와 끌어안고 잔 날은 베개가 미묘하게 젖어있던 게 자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언니는 여전히 기분 좋게 자고 있었고 나도 기분 좋은 감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언니를 깨울 생각이 안 들었고 먼저 씻고 산책을 나와버렸다.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분 좋겠지」라며 밑도 끝도 없는 행복감에 빠져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난 운이 안 좋았다. 이런 기분 좋은 날 레즈우 왕국의 사람에게 환멸을 품어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있었던 그 행복감을 싸그리 잊을 정도로 추한 행동. 백성의 머리 위에서 본보기를 보이고 있어야 할 귀족이 메이드를 추행한다는 더러운 행위에 무심코 손을 휘둘렀다.

기세 좋게 소리치고 날뛰었다.

이쪽에는 대의가 있고 신념도 있다.

이미 문답무용.

묻고 말할 필요 없는 상황이다.

아침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만큼 행동이 과격해져 버렸다. 기분이 나빠지는 일로 감정을 덮어씌워서 그런지 머리에 피가 올라 있었고 나는 타국에 온 기사면서도 넘으면 안 되는 선을 한참 넘고 있었다. 타국의 귀족을 상대로 기사가 검을 뽑으려 하다니 미친 짓이 확실했다.

그러나 레즈우 왕국의 귀족에게 실망하는 것도 잠시. 그런 실망을 불식시킬 정도로 깨끗한 검놀림에 상대방의 검이 잘려나가 호수 안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난입자는 온몸을 검게 칠한 남자. 나와 대립하고 있던 귀족은 그와 조용히 떠들더니 갑작스럽게 발광했으나 난입자는 그 귀족을 발놀림 하나로 가볍게 제압해 크게 거짓말을 쳐 모여든 사람들을 물려냈다.

그는 딱딱한 말투를 하고 있었음에도 친근한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내게 다가와 일의 전모를 설명해줬고 놀란 나를 다독일 정도로 좋은 성격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호모우 왕국의 귀족들의 눈에 띄면 곤란한데 타국의 공주님께 그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아버지의 심로를 덜어드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일을 만들어 내다니 어깨가 무겁기 그지없었다.

“혹시 이번 일이… 호모우 왕국에 흘러들어가는 건 아니겠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나라의 레이디들은 궁정 안의 참새와는 다르니까. 방금 그 일은 우리나라의 귀족들이 부끄러워할 사건이었다. 내 이름에 맹세컨대 호모우 왕국까지 이야기가 가진 않을 거다. 어디까지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입과 입 사이로 이야기가 흐를 뿐이지.”

“이런 일에 블랙우드 공의 이름을 걸 필요까지야…”

“썬, 앞으로는 나를 에키시라 불러라. 가문 명으로 불리는 건 우리 누님으로 충분하니까 말이야.”

“아… 송구합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의외로 가볍거든. 이런 일이 아니면 걸 일이 없을 정도로.”

그런 바보 같은 나를 차근히 달래주시는 에키시·블랙우드 공. 설마 했던 공작가의 자제분이었지만 말을 터놓으니 의외로 인간미가 있으신 분이었다. 의리도 있고 거리감이 너무 가까워서 얼굴이 좀 빨갛게 됐을 정도다. 일단 남자로 성별을 숨기고 있다지만 이런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이분도 어제 여기에 도착했던 모양이고 나와 같은 신입생이라고 하신다. 한 손에 지도를 펼쳐 부지 내를 탐험하듯 걷는 것이 그 무거운 이름과는 다르게 꽤 풋워크가 가벼운 분이셨다. 혹여나 친구를 사귀지 못할까 봐 고민이셨다고 하는데 그리 말씀하시면서 나를 친우 취급해주셨다.

“전 부끄럽습니다… 정말로 기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대포적인 행동에… 아까 그 사건 하나로 레즈우 왕국의 귀족들에게 편견을 가져버렸으니 말입니다…”

“악의라니?”

“메이드가 추행당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대체 뭘 하는가? 왜 나만 이렇게 서 있고 다른 분들은 멀찍이 서서 구경하는가? 자신의 종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이를 돌보지 않다니… 하고 말입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있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공주님께서 해결할 사건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 대다수가 그것을 알고 있었을 뿐. 그러나 에키시 공은 그런 나의 어리석은 행동마저 긍정해주셨다.

“마땅한 분노 아닌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 점이 기사답다고 생각한다만. 그 자리에서 핏대 하나 내지 못한 남자가 있었으나 넌 달랐다. 누구보다 올바르게 화내고 있었지. 그걸 누가 비난하겠나.”

“분위기도 못 읽는 바봅니다… 거기에 있던 분들에게는 광대로 보였겠죠…”

“광대도 손님에게 미소를 줄 수 있는 일이다. 좋게 생각해.”

“너무 칭찬만 해주십니다.”

“나는 마음을 든 상대에게 끝없이 칭찬을 하는 타입이다. 아마 네가 숨만 쉬고 있다고 해도 미점을 찾아낼 자신이 있어.”

“으으으으…”

같은 남자라고 하는데도 낯 뜨거운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야오이 교단의 신자인가 싶어서 물어봤다만 단호히 아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라며 당당히 공인하고는 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생긴 동성(?) 친구…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남자는 친구끼리 이렇게 밀착하는 건가… 여태까지는 이렇게 가깝게 다가온 남성이 없었던지라 연극하기가 영… 부끄러워서 얼굴로 티 날 것 같은데…’

그 말을 증명하는 건 아니겠지만 내 어깨에 손이 올라가 가식 없는 얼굴로 크게 웃고 있는 게 이쪽이 진짜 성격인 것 같으셨다. 서슴없이 내 은발을 만져 휘저어놓기도 했고 마치 나이 차가 있는 여동생을 상대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에키시 공은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하자며 다가왔지만 이쪽이 명백히 어리기도 했고…

‘남자로 숨어 살다가… 설마 같은 남자에게… 이런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될 줄이야…’

실제로는 여자였으나 그런 부분은 버리고 진짜 남자처럼 살자고 정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외형도 갖춰있어서 자연스럽게 여자를 홀리게 만드는 사람이다. 색을 모르는 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마을의 처녀나 학교의 여성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에키시 공… 같은 남자라고 해도…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이런, 너무 가까웠나?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사과하겠다만.”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요…”

“방금도 말했듯 친구가 적어서 말이야. 쓸쓸함이 겉으로 드러나나 봐.”

“방금 막 만난 기사에게… 그것도 타국에서 온 사람에게 말할 것도 아닌 내용입니다만…”

“친구의 푸념이라 생각하고 듣고 흘려주게.”

“생각보다 장난기가 많으신 분이네요…”

나도 모르게 하하핫 웃고 말았다. 타국의 귀족 앞에서 허물없이 웃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행동을 무례하게 생각하지 않은 건지 에키시 공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다시 들러붙어 오셨다. 정말로 남색이 없으신 건지 의심이 들었지만 적어도 에키시 공은 내게 악의가 있진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공작 가문의 자제분이면서도 너무나 친근한 행동에 의심을 품고 만다. 혹시 우리 언니를 노리고 기사인 나에게 접근한 게 아닐까? 무심코 그런 무례한 생각을 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금방 정정했다. 잠깐이나마 저지른 망상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에키시 공에게 있어 얼마나 무례했던 건지 나 자신의 추레함을 반성할 기회가 됐다.

에키시 공 덕분에 좀 어색했을 지도 모르는 거리 탐방을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고 언니와 함께 올 가게도 눈동냥으로 찝어둘 수 있었다. 레즈우 왕국은 처음이었기에 이 나라의 특산물 같은 것도 몰랐으나 이 시기에는 이런 것이 먹기 좋다며 꽤 가정스러운 조언조차 들을 수 있었던 거다.

‘왕가에서 고르고 고른 상인들이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뢰할만한 사람까지 소개해 줬으니… 막 전입해 왔다고 하면서도 이 거리의 상인들을 잘 아는 모양이었지…’

본인은 아버지의 위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했지만…

“길거리 음식도 의외로 괜찮군요. 여태까지 괜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야 들어오는 사람들 전원이 신분이 확실히 보증된 사람들 뿐이니 그렇지. 왕도라고 해도 위생을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해대는 무리들이 넘쳐난다. 먹거리는 직접 자기 눈으로 재료를 본 후 고르는 편이 좋을 거다.”

“의외로 자세하시네요?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공작가의 자제분 같지 않은 지식입니다.”

“후후, 블랙우드 가문의 무능아. 그 이름에 걸맞은 방탕함이지.”

“무능이라니, 단순히 자유로우신 것뿐이라 봅니다만.”

“자유라~?”

내 건방진 말을 웃어 흘러넘기며 질문을 던져오는 에키시 공. 말의 흐름이 그러기도 했고 이상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뜬금없는 건 확실했다.

“혹시 자유를 동경한 적 있나?”

“자유요?”

“아, 잠깐만, 무심코 나온 말이다. 지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줘. 방금 건 내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오글거렸으니까.”

본인은 낯 뜨거운 대사라며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건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이었다.

“아뇨, 전 상관없습니다만. 흠, 자유라? 추상적인 단어네요. 요즘 그런 말을 하는 귀족이 많기도 했고. 혹시 그들처럼 돈에만 구애받는 상인이나 혈연에 구애받지 않는 평민이 되고 싶으셨던 겁니까?”

“아니, 상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사랑을 못 받고 크진 않았고 평민이 되고 싶을 정도로 부자유로운 삶을 살진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새가 날아다니는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날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냐 묻는 거지.”

“아아아…”

혹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건가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을 예시로 들어 내가 알기 쉽게 질문을 해주셨던 거다.

“그런 거라면야… 매일 하네요…”

“나도 그래.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을 정도의 고민은 아니지만 새를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날고 싶을 정도의 고민은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놀랐습니다만… 대체 무슨 의도가 있는 건지…”

“별것 아니다. 모처럼 생긴 벗이니 그런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으니까 말이야.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정도로 무거운 고민이 아니라면 친구에게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 너 정도 청렴결백한 기사라면 그럴 자격도 있고 말이야.”

“아………”

“역시 너무 낯간지러운 말이었나? 내가 부담스럽게 한 거 같은데.”

“그, 그, 그런 건 아닙… 니다만…”

“하하핫!”

아까부터 좋은 사람이고 좋은 기사라며 칭찬해주셨지만 첫 만남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난 빈말로 흘러 넘겼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다. 에키시 공은 나 같은 소인배의 생각보다 더욱 진지하게 나와의 관계를 고민해 주고 계셨다.

‘농담이 아니었던 건가.’

일시적인 친구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이 사람은 귀족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이상한 사람이다. 내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몰라 하고 있자 시선을 넘겨버리는 것도 그렇고 나와 달리 혀가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기도 했다.

“슬슬 점심시간이군.”

“아, 혹시 다른 예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난 이제 누님을 만나 뵈러 가야 한다. 내가 거리 탐방에 권유해놓고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서 미안하지만 다음엔 좀 더 친근히 대해줬으면 좋겠어. 그때는 나도 말을 놓을 테니 안심하고 말을 걸고.”

“알겠… 습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조만간 익숙해지겠지! 하하하하하!”

“으… 으으…”

나와 달리 단번에 말을 놓고 언행까지 바꿔버리는 에키시 공. 다음에는 이름 뒤에 공이란 단어 빼고 반말로 좋다며 크게 웃고는 내 어깨까지 두드린 후 자리를 뜨셨다. 가벼운 뜀박질로 저 멀리 달려가는 것이 마치 평민 소년과도 같았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나는 여전히 멍한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폭풍 같은 사람. 내가 신기루를 본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손에 남은 길거리 과자가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저게 정말로 공작가의 인간이 맞는지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이런 걸 바랐는지는 몰라도 난 오늘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좋은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광장에서 싸울 뻔한 뒤로 아직 시간이 그리 흐르지도 않았는데…’

오늘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기분으로 기숙사로 돌아오게 됐다. 왕가의 인간들이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거대한 저택. 아버님이 보내온 시종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면 나와 똑 닮았음에도 좀 더 성숙해 보이는 은발의 여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언니, 일어나 계셨네요?”

“아, 썬? 산책 나갔다고 들었는데…”

“벌써 끝마치고 왔습니다.”

“어머나, 그래? 깨워도 됐는데…”

“언니가 너무 곤히 주무신지라 그럴 수 없었어요. 마차 안에 오래 있기도 했고 일부러 배려한 거예요.”

아이·호모우. 나와 똑같이 은발과 백안을 가진 우리 언니. 눈꽃 공주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자랑이며 나와 달리 여자라는 걸 숨길 필요가 없으므로 긴 머리카락을 좀 더 여성스럽게 관리하고 있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은색과 잘 어울리는 청록 계열의 네글리제 차림으로 눈을 비비고 있는 게 같은 여자면서도 아름다운 분이었다.

만약 내가 진짜 남자였다면 이 자리에서 덮치고 싶을 정도로 몸매도 볼륨이 있으셨다. 껌딱지 같은 가슴이라 남자라고 속여넘길 수 있는 나와 달리 언니는 말 그대로 폭유. 그러나 가족이라 그런지 질투심은 없었고 내가 속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후후후,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 있었니?”

“네? 왜요?”

“오늘따라 기분이 엄청 좋아 보여서. 산책하는 도중에 무슨 일 있었구나?”

“그런 걸 어떻게…”

“떨어져 있어도 네 언니니까. 평소라면 딱딱하게 있을 말투도 지금 풀어져 있기도 했고. 얼굴도 새빨개져서 토마토 같아.”

“평소랑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억양이 틀리단다.”

우리 아이 언니는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자매끼리 있는 거니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자며 아까 봤던 에키시 공과 똑같은 말을 내뱉고 계셨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고 언니께 상담을 해야 할 내용이기도 했으므로 결국 내용을 불긴했다. 솔직히 말해 오늘 광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혼날 생각으로 각오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아무런 화도 내지 않으셨다.

그보다…

오히려…

매우 상냥한 것 같은 눈빛으로…

오늘 하루 종일 능글거린 얼굴로 나를 지켜보셨는데…

‘으으… 죄송합니다… 에키시 공…’

「지금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건 오해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를 믿을만한 기사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해주셨을 텐데…’

나는 언니의 예상대로…

나를 높이 사준 상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