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지뢰와 착각이 크로스!(7)
레즈우 왕국의 왕도. 판타지하면 떠오르는 중세스러우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주로 수도나 청결 부분이) 거리가 나와 누님의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블랙우드 가문은 그 이름에 걸맞은 검은 나무의 숲을 자랑으로 하며 거리 전체가 암흑성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여기는 그런 어두침침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물이 없는 도로, 높게 쌓아진 벽과 고딕한 느낌의 건물,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와 기도 소리는 거리 전체를 성스럽게 하는 분위기가 있고 거리를 날아다니는 새 조차 흰색인지라 특별한 감상에 빠질 것만 같았다.
나 최현준 개인의 감상으로는 좋았지만 에키시·블랙우드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다. 코드가 안 맞는 건 물론이고 미래에 있을 일을 생각하니 초조함이 피어났다. 자칫해서 전면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순간 맨 먼저 앞장서야 하는 위치기도 하고 누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물러서지도 않을 테니까.
최종적으로 이 거리는 무사하겠지만 우리 가문은 루트에 따라 사라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른 에로 게임이나 악역 영애물과 다르게 주인공과 우리 누님은 연적 관계다. 공주님들 두고 싸우다가 감정을 상하는 건 물론이고 좋게 끝낼 수 있는 걸 블랙우드 가문만 몰락시키려고 하니까 말이야.
누님과 그 치트(주인공) 새끼랑 싸우게 두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그 녀석과 친해져야 했다.
“긴장했어?”
“아뇨, 그럴 리가.”
레즈우 왕도의 중심 끄트머리에는 왕성의 입구가 있다. 중심 도로에 도착해 마차를 왼쪽으로 꺾으면 한층 더 청결한 거리가 나오고 그 끄트머리에서 레즈우 사교 학교로 들어갈 수 있다. 왕도의 안쪽에 따로 성벽을 건설해 부지를 감추고 있는 그 거대한 토지는 말 그대로 특별한 구역이다.
그 부지의 면적은 말할 것도 없이 넓다. 왕도 자체가 워낙 넓은 데다가 학교의 부지만 해도 따로 마을 두세 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니까. 판타지 미소녀 게임의 세계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세계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기사들이 지내는 거리와 귀족들이 지내는 곳이 따로 나뉘어 있는 모양이고 그 안에서도 가문의 등급에 맞춰 또 구역이 나뉘어 있는 모양. 기숙사라고 해도 누군가와 같이 살거나 하는 정도가 아닌 서로 각방으로서 메이드나 집사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양이니 군벌 귀족용 학원에 비교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거리에 들어와 있는 상인이나 점포도 대대로 왕가를 따르던 사람들뿐. 왕도 안에 또 하나의 왕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아이들만 기르게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귀족이나 왕가의 사람이 얼마나 팔불출인지 말 안 해도 느껴지는 장소였다.
“입학식에 맞추지 못했네? 우리 쪽 시종들이 수속을 다 끝마친 거 같지만… 이런 거 첫 경험이기도 하고 좀 아쉬웠던 거 아냐…?”
“첫 경험이라니, 거리가 거리였으니 이 시간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다행 아닙니까. 도중에 주제 모르는 놈들(도적)도 나타났었고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생각합니다만.”
그런 화려한 거리에 들어왔지만 나와 누님은 수업 시설에 가는 건 물론이고 거리의 산책도 하지 않았다. 도착했을 무렵엔 해가 노랗게 변하려 하고 있었던 데다가 서로 피가 튀겨서 목욕을 먼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입학식은 늦었지만 다행히 먼저 도착한 시종들이 기숙사 정리를 끝내놔서 나와 누님은 탕 안에서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우리 가문은 왕가 바로 아래쪽의 필두다. 기숙사라고는 해도 따로 건물 하나를 받아 그 안을 통째로 빌리는 횡포가 용서되는 가문. 참고로 우리 진짜배기 공주님께서는 수업용 연회장이 있는 쁘띠 왕성을 기숙사 대용으로 쓰고 계신다. 격이 다르다는 건 저런 걸 의미하는 거겠지.
“그러나, 수속을 다 끝냈다는 건 수업 일정도 다 짜놨었다는 의미입니까? 왜 저는 듣지 못했을까요?”
“그야 나랑 수업을 겹치게 하려고 그랬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누님의 품을 벗어나게 둘 수는 없잖아?!”
“사리사욕이 가득한 말씀이십니다 그려.”
“몰랐어? 동생은 누님의 곁에서 도망칠 수 없단다~!”
알몸으로 내게 들러붙어 기쁜 숨길을 내뱉으시는 누님. 화려하게 빛나는 노란 조명 아래에서 넓은 탕 중심에서 누님의 몸을 같이 껴안고 물기에 젖은 몸으로 체온을 나눠줬다. 장난이 성공한 어린애 같은 상태였기도 했고 이 정도로 내 계획이 어떻게 될 것도 아니니 화낼 이유는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기숙사까지 통째로 빌리셨고 아예 예상 못 한 부분은 아니니 이번에는 눈 감고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수업이라고 해도 몇 시간 좌학할 뿐이고 나머지는 연회장에서 으스댈 뿐이니 말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곳에 보내는 것도 그렇고 미래의 자기 인맥을 쌓는 곳일 뿐. 학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그런 거다. 맞선을 보는 장소나 마찬가지. 누님이 말했듯 타국에서 온 몰락 왕녀들이 내 매직 스틱을 노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다.
‘숨겨진 아이템으로 최음제도 파는 곳이니까…’
남의 식사 권유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니 귀찮기 그지없다.
‘입학식은 오늘 끝났고… 어차피 대학처럼 직접 수업을 고르는 형식이니 교실에서 얼굴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지… 주인공의 행동 같은 거 플레이어가 고르는 형식이었으니 고정 이벤트 이외에는 일정한 패턴도 없고…’
다행히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는 이벤트를 알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누님과 놀아 줄 시간은 없다.
‘일찍 잘까.’
“아?!”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씻을 건 다 씻기도 했고 나갈 준비를 하면 누님의 손이 내 발목을 잡아왔다. 동생의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입술을 삐쭉이는 누님. 마차 안에서 그렇게 해댔을 텐데 뭐가 또 부족한 건지 음란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벌써 나가게?”
“오늘은 일찍 자고 싶거든요.”
“내일 수업 없어… 내일 하루는 거리를 돌아보라고 시간을 내줬으니…”
“개인적 용무가 있어서요. 아침에 볼일 보고 점심에는 누님이랑 거리를 둘러보려 합니다만.”
“이 누님보다 중요한 일이야?”
“사랑하는 동생한테 그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도 그렇고. 꼭 저한테 그렇다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시나 봅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이런 이야기에는 약한 건지 누님이 내 발목을 놓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원숭이는 아닌지라 오늘 한 것도 있고 하루 정도는 풀어줄 것처럼 보였다. 너무 쌓인다 싶으면 시종을 불러 즐길 테니 별문제 없겠지.
“장난입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으응… 그래에…”
아쉬운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떠나보내는 누님. 등을 돌린 욕실에서 자그마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방에 들어가 잤으며 예정대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빵만으로 빠르게 끝내고 옷차림을 정돈해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검은 검을 허리에 매고 길을 나선다. 지도는 이미 봐 뒀고 덕분에 길을 잃을 일 없이 한창 소란스러운 장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멋지고 커다란 새하얀 분수 앞에서 크게 날뛰는 갈색 머리카락의 정장남이 하나… 그리고 그것을 상대하는 새하얀 갑옷을 입은 은발의… 소년? 여성? 어쨌든 성별을 알 수 없는 미인이 하나…
“이 말 뼈다귀 기사 놈이! 지금 뭐라 지껄인 거냐?!”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까?!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버린 쓰레기 같은 놈! 자기 행동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지도 모르는 무능아! 이런 자리에서 여자를 추행하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거냐!”
“어디서 굴러들어온 기사 가문의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를 알고 머리를 숙여라! 나는 레즈우 왕국의…!!!”
“문답무용! 여성을 추행하는 쓰레기의 이름 따위 들을 가치도 없다! 내 이름은 썬·라이니르! 호모우 왕국을 지탱하는 라이니르 가문이 배출한 기사! 태양의 기사 썬·라이니르다!”
“이놈이 끝까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고작해야 기사 가문의 자칭 귀족 나부랭이 놈이?!”
역시 예상대로 이벤트는 시작해 있었다.
‘저 은발 미인이 주인공 썬·호모우… 지금은 라이니르 가문의 이름을 빌려 신분을 숨기고 있지만 저 이름이 더 그럴듯 하구만…’
털 하나 없는 새하얀 몸, 갑옷도 우리 쪽 여기사들처럼 공주 기사 스타일, 허리까지 오는 은발과 새하얀 눈은 아무리 봐도 남자가 아니다. 저런 외형이니까 진성 레즈비언인 누님이나 공주님께서 저 소년에게 흥미를 가졌으리라. 물론 게임상 이야기니까 실제론 안 그럴 수 있다만 저런 외형이니 내 예상이 빗나가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입학하고 거리를 둘러보는 도중에 메이드가 귀족에게 성추행 당하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 귀족과 척을 진다. 기사답게 용감한 모습으로 메이드를 지킨 그 소년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이~?’
몰려든 구경꾼 사이에서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여자가 하나. 소년과 대비되듯 긴 금발과 금안이 인상적인 핑크 드레스 소녀. 순수하게 보여도 일단 남자라면 눈초리부터 세우고 보는 레인·레즈우 공주님이 거기에 있었다.
‘주인공 목소리가 워낙 중성적이니… 아직 여자인 줄 착각하고 계시지… 나중에 정체를 알았을 때 배신감 가득한 얼굴을 할 거지만…’
나중에 적으로 나오는 엑스트라 갈색 머리 귀족과 주인공이 가열차게 언성을 높였다. 이대로 결투까지 하자면서 한쪽이 검을 뽑아들 예정이며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공주님께서 막을 예정이다.
‘이후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깨닫고 이 자리에서 뺨을 때리게 되는 게 이 게임의 프롤로그지만…’
호인상을 줘놓고 굳이 주인공이 뺨을 맞을 이유는 없다.
마침 나도 공주님께 어필을 해야 하니까 그 역할을 빼앗자고 생각했다.
‘생각을 했으면 다음은 직접 행동을 보일 뿐.’
가열찬 언쟁이 계속되고 인내심이 끊어진 귀족이 검을 뽑은 순간 군중 사이를 빠져나와 나도 검을 뽑았다. 내면에 있는 최현준이라 불린 남자의 소시민스럽고 비열한 성격을 안으로 집어넣었고. 그와 동시에 핏줄이 이어준 딱딱한 얼굴을 겉으로 드러냈다.
나는 에키시·블랙우드.
이런 일 따위 별 노력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남자.
물론, 스토리가 정해져 있는 연극에 끼어드는 것도 아주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