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여자를 건드리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꺼낼 수 없는 나에 비해, 몽아에게서 들을만한 이야기는 꽤나 많았다.
당시의 그녀는 이미 지금은 은령회라고 밝혀진 자들과 엮이면서 고초를 겪고 있던 상황.
'천무비경이라고 했던가?'
몽아가 그 행방의 단서를 쥐고 있다는 전설적인 무공이 담긴 책.
전대의 천하제일고수의 무공이라고는 해도, 말장난 같은 단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물론 여기저기 소문까지 퍼뜨리다니 하는 짓이 졸렬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아미파의 윗사람도 믿지 못하게 된 몽아는 검성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동안은 무림맹에 의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면 자네도 그 자들과 관여되었던 모양인데..."
"맞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더군요."
그렇다. 정말 어쩌다보니, 였다.
내가 유난히 그놈들과 엮인 것 때문에 노희방은 얼토당토않은 의심을 품은 모양이던데, 나도 대체 왜 그놈들이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 몽아는 도리어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이 본인과 엮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나와 연루되어 분풀이를 당한 것이 아닌가?"
"그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나와 조우한 그들 쪽이 당황하는 눈치였으니까. 아마 나를 표적으로 삼았던 것은 언소영을 죽일뻔했던 그 사복검 노인 정도일 것이다.
'개새끼, 다시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독에 당했던 언소영은 결과적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지만 생명의 위험은 물론이고 몸에 생긴 흉터 때문에 한동안 나를 피하기까지 했었다.
나를 걱정해서 임신한 몸으로 뛰쳐나와준 팽연화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렇게 그놈을 곱게 보내도 과연 괜찮았을까.
이미 뒤늦은 상상이었지만 그놈을 고통스럽게 만들 방법을 상상하던 나는, 몽아가 한층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정말 사태의 책임이 아니니 사태께선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몽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그녀가 더 뭐라 하겠는가. 그저 몽아는 한 마디 당부를 할 뿐이었다.
"자넬 도울 사람이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만, 혹시 내가 도움이 될만한 일이 생긴다면 내게도 사양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게."
"사태..."
그녀의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있어서 따뜻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일부러 격동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그녀를 자빠뜨릴 떡각을 찾아서 매의 눈을 반짝이고 있던 입장이라는 점이 조금 찔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을 굳이 걷어찰 필요도 없는 법.
몽아는 고마움의 감정이 가득 실린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순수한 호의로 말해준 것이었는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 것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양심이 찔렸지만 나는 어차피 마교와 결탁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이 대화조차도 일종의 밑작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직시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젠 해가 완전히 기울어 날이 깜깜해지고, 내가 슬쩍 높은 쪽에 작게 뚫린 창을 올려다보자 몽아는 내 시선에 이끌려 바깥을 내다보고는 말했다.
"흐음, 날이 많이 어두워졌군. 그럼 오늘은 이만..."
거기까지 말한 몽아는 미간을 모았다.
"그러고보니 침상이 하나였군..."
그렇다, 여기도 결국은 침상이 하나. 노희방과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만, 나를 회복시켜야한다고 주장하던 그녀와는 달리 몽아에게는 꼭 같이 침상에서 자야한다는 명분이 없다.
게다가 한 번 뒷구멍을 털린 그녀로서는 나와 같이 침상을 쓰는 것을 꺼려할 것이 뻔한 노릇.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바닥행 확정이다 그 말이다.
며칠은 같이 지내겠지만 눕는 공간이 바닥과 침상으로 갈려버리면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손을 대기는 난감해질 것이 뻔하니,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먼저 나서서 바닥에서 잔다고 어필하면...
"다, 다행히 침상이 그리 작지는 않군. 두 사람이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어."
우호적인 관계를 미리 강조해둔만큼 몽아도 '그래, 자넨 바닥에서 자게'라고 말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질...
"예?"
나는 잠깐 내 귀가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멍청하게 되물었고, 몽아는 몸을 홱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바, 바닥에서 재울 수도 없지 않은가.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게."
난 딱 한 가지, 그녀가 머리를 길러서 생긴 단점을 지금 처음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민머리였다면 그녀의 목덜미가 붉어졌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만,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지금의 몽아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자지열차 출발하라고 대놓고 켜놓은 그린라이트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나는 이불을 정돈하기 시작한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며 대체 어느 쪽인가 두뇌를 풀가동시키며 저울질을 해야만 했다.
결국 어느 쪽인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이불 속을 꼬물거리며 기어들어온 사내의 머릿속을 몽아가 알았더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아마도 정답은 그녀 자신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도 아닌데 아무런 구실도 없이 허튼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그의 배분이 아래라고 해서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그녀의 입장에 따라, 사내는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이불 아래에 있는 그녀에게 달라붙는 것도 자유, 모른척 그대로 잠을 청하는 것도 자유.
기실 사내에 대한 호감이 제법 높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사내가 또다시 그녀에게 손을 댔을 때 몽아가 사내에게 품는 것이 더 큰 호감일지 혐오감일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흐으으음...'
마음 같아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몽아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규칙적으로 숨을 쉴 뿐이었다.
내가기공을 익힌 고수의 입장에서는 숨소리조차도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몽아가 무방비하다고 판단하게 만들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안 움직이네...?'
사내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숨을 쉬며 꼼짝도 않고 누워있을 뿐, 그 외에 다른 행동을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로 잠이 든 것도 같고, 그냥 누워있는 것도 같다. 일어나서 그의 얼굴을 직접 보면 어떤 상태인지 알 것도 같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 사내가 자고 있지 않다면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대체 왜...?'
몽아는 가슴 속이 술렁였다.
물론 사내가 손을 대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인식은 그랬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거부하는 몽아를 어르고 달래서 범했던 그가 아닌가. 그렇다면 뭔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 더없이 추운날 밤,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구며 엉켜돌아간 사내의 육체가 얌전히 그녀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하자 몽아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아니다.
그녀의 무의식에서 피어오른 의문을, 이성이 즉시 찍어눌러 분쇄했다.
그럴리 없었다. 그날밤의 기억이 조금 강렬했다고 해서, 사내에게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리가 없지 않은가.
이것은 그저, 검증의 과정. 그녀가 곁에 누운 사내가 그리 밉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결코...
"...자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까스로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만은 막았지만,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오금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사내는 잠들지 않고 누워있을 뿐이었다. 사내의 몸이 뒤척이는 기척이 나고, 한 이불 안에서나마 거리를 두고 있던 몸이 조금씩 가까워져오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자나...?"
사내의 투박한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오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의 숨결이 그녀의 뺨까지 닿는듯했다.
왔다, 왔다.
몽아는 들키지 않게 호흡을 최대한 통제하면서 대체 사내가 무슨 짓을 할지 온 신경을 기울였다.
쪽
'무, 무슨...!'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버리고...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사내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하자, 몽아는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확 쏠려버린 탓에 그것을 가까스로 감출 수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된다니...'
당연히 그런 것까지는 상정해두지 않았던 몽아로서는 기함할 소리였지만, 어느새 조금씩 뻗어나간 손이 그녀의 목덜미나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무심결에 눈을 꼭 감아버렸다.
혼란스러웠다. 혹시나 자신이 이런 것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사내의 손이 뻗어오는 것을 느끼고 보니 이것을 받아들여야하나 거부해야하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의 손은 점차 대담하게 움직이며 옷에 가려진 그녀의 살갗을 조금씩 해방시켜나갔다.
매듭이 풀린 허리끈이 느슨해지고, 앞섶이 헐겁게 열리며, 젖가리개의 매듭 역시도 풀려버렸다.
'멈춰야하나?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눈을 뜨고 호통을 크게 한 번 치면 사내는 즉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다음 다시는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억지로 범해질지도...'
대체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내의 무공수위는 이미 그녀를 추월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범해진다. 이미 한 번 더럽혀진 육신이, 다시 한 번 이 남자의 손에 떨어지려하는 와중에 몽아는 갈팡질팡하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살짝 살이 붙은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고 급기야 바지 안으로 손이 들어가자 몽아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앞은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고맙다고 해야할까?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속삭인 말의 사이사이에 욕정으로 얼룩진 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그녀를 한 번 범한 이 남자의 뒤를 따르는 것을 결정한 것은 분명 몽아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이 이렇게 되도록 사내를 침상에 눕힌 것도 그녀 자신.
그럼에도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척 눈을 꼭 감은채, 몽아는 사내에게 품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