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73화 (373/383)

영호경은 몸을 씻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하에게서 노희방이 만남을 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내와는 이야기를 나눠 대략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진 상황, 굳이 꺼릴 이유도 없어 영호경은 노희방을 불러들였고 지금 이렇게 그녀의 처소에 마주 앉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말씀도 못 드렸군요.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아무리 장포로 가리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들 가운데 소교주의 배가 이상할 정도로 불러왔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외모로 보아 노희방 자신보다도 연상인데도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아직까지 후계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노희방은 짐작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기씨의 아버지 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걸 그대가 알아서 무엇 하려고?"

마교에는 인재가 많았지만, 그들 중에 알려진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소교주의 반려가 될 정도라면 상당한 기량을 가진 자일터.

언제고 마교의 중심에서 활약할 인물일 것이니 이름자라도 들어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소교주에게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듯했다.

"굳이 알려주실 것도 없이, 조만간 알게 되겠지요. 굉장히 뛰어난 분일테니 말입니다."

"...그래, 조만간 알게 되겠군."

노희방에게는 시종일관 냉담하던 영호경의 표정이 잠시 요상해지는 것 같이 보였는데, 왜 그러는지 조금 캐보려던 찰나 영호경이 선수를 쳤다.

"그래, 그대는 내가 어째서 중원에 들어와있는지가 궁금하겠지?"

"..."

그랬다.

마교도가 일부 중원에 들어와있는 정도는 지금껏 으레 있던 일이었고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찾아낸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 인원을 수용한 지부를 만들고, 그것의 최고 책임자가 소교주라면 대체 얼마나 큰 문제로 연결될지 노희방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교가 그녀를 즉시 제거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

'나를 설득하려 하겠지.'

노희방은 개방의 방주, 만약 그녀를 그냥 놓아주었다가는 마교가 중원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설득이나 살인멸구 뿐인데, 설득을 택했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

즉, 노희방이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불합리한 계획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개방과 무림맹은, 어느 정도 협력은 하고 있지만 당연히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무림맹은 제법 그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성격은 임시기구의 성격을 갖는다.

뿔뿔이 흩어져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는 정파무림이 마교를 큰형님격으로 모시며 따르는 사파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창구이자 중재자.

지금 알려주는 이야기를 무림맹에는 알리지 말라는 의미인가 생각했지만, 소교주가 꺼낸 말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렇다면 귀방이 추가로 수익활동에 나선다고 해도, 강호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닌 이상 무림맹이 간섭할 권리는 전혀 없겠군?"

"맞습... 예?"

또다시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노희방은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수익활동이란 말은 생소한 말이었지만 아마 개방이 각 문파나 무림맹에 정보를 팔아 그 대가로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것에 무림맹이 간섭한다는 의미는...

"소, 소교주, 설마... 귀교는, 본방과..."

"그래. 나는 교주께 적어도 본 건에 한해서는 본교의 모든 입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지."

상상도 못한 제안에 노희방이 경악하고 있는 사이, 영호경은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본교는 귀방과 본 건에 한하여 협력관계를 맺고 싶네. 아, 물론 무림맹과는 별개로."

태연하게 마교의 주구 노릇을 하라 권해오는 그 말에 노희방은 자신이 혹시나 조롱당하고 있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영호경은 어디까지나 진심인 것으로 보였다.

결국 노희방은 영호경이 풀어주는 더욱 자세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까지 루트를 잘못 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황보효선과 마주 앉아서 지금까지의 내 시야가 좁았다는 사실에 통렬한 반성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밀프들(+처녀 한 명)을 상대해왔지만, 항상 나는 상대보다 갑의 입장에 있거나 최소한 동등한 입장에 있었다.

'밀어붙이는게 전부가 아니었단 말이지.'

지금껏 나는 그 위치를 바탕으로 떡칠 기회만 생기면 밀프들에게 달라붙고 구슬리고 자지로 쑤시고 쑤셔서 기어코 내 것이 되겠다고 말하게 만들어왔고, 황보효선에게 시도했던 것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황보효선은 팽연화보다 더한, 자지 한 번 찔러주면 정신을 못 차리는 허접보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조금도 넘어올 여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나중에 일이 어떻게 꼬일지 알 수가 없어서 적당히 우호적인 관계만 유지하며 지지부진하던 상황이었는데, 드디어 답을 찾은 것 같다.

"조금 있으면 식사시간인데, 그 때 나가면 되지 않겠나?"

"그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제가 소교주의 비위를 거슬리게 해서 여기 갇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대체 무슨 생...! 하아..."

봐라.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을 보고 황보효선은 언성을 높이다말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황보효선을 상대로는 불도저처럼 마구 밀고 나가는게 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 내가 소극적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자마자 세게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이불에 오줌싼 아이처럼, 문제집 살 돈으로 피시방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들킨 아이처럼 움츠리고 있자, 황보효선은 고개를 돌린채로 내 쪽을 계속 흘끔거렸다.

특히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내 자지 쪽을.

꿈틀

"히익...!"

자지가 요동치며 치솟은 바지 앞섶이 꿈틀대자, 황보효선이 질겁하는 목소리를 냈고 나는 고개를 더욱 떨구었다.

그렇다, 지금의 나는 욕정(혹은 연심이라고 해도 좋다)을 가누지 못해 발기 자지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슬픈 중생인 것이다.

애초에 이 발기의 원인제공도 본인이 했겠다, 나를 강하게 꾸짖지는 못할 터.

"...강 소협."

"예, 부인."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게."

"예, 여협."

"하아..."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황보효선이 두 손을 눈 위에 얹은채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틈새로 내 얼굴을 힐끔 보는 것 같더니, 손을 내리고 내게 말했다.

"강 소협,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가?"

"..."

"난 남편도 자식도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나이가 안 맞아. 자네 정도면 훨씬 알맞은 상대가 있을 거란 말일세."

"..."

"다른 상대를 찾게. 지금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네가 지금 하는 일이 마무리되고 남들 앞에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때가 되면 황보세가에서 적당한 아이를 소개해줄 수도..."

"...싫습니다."

다른 상대는 물론 있다. 엄청나게 있다. 하지만 그게 이 여자를 순순히 놓아줘야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 정도는 저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제가 바보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

"조금도 안 됩니까? 잠시도 안 됩니까? 당신은 내게... 마음 한 구석도 내줄 수 없는 겁니까?"

먹힐까? 안 먹힐까?

적어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어물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 효과도 없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가 한 발짝 물러서기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황보효선은 미칠 지경이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 사내에게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사내는 늘 자신만만했다. 그녀보다 무공이 한참 하수이던 시절에도 말로는 조금도 지지 않았다.

그 때만 떠올리면 열불이 치밀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런 눈으로 보지마...!'

그런데 저렇게 애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매몰차게 거절하고 있는 자신이 나쁜 것 같지 않은가.

저 마음을 받아주는 순간 불륜이다. 남편에 대한 배신이 되는 것이다.

황보효선은 그렇게 되뇌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안 되네. 조금도, 잠시도 안 돼."

한 번 입이 열리자 봇물터지듯이 다음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자네가 나를 곤란하게 만드려는 것이 아닌줄 알아. 하지만 지금 자네가 품고 있는 마음은 결코 장래에 좋은 것이 아니네. 자네에게도, 내게도."

"하지만..."

"마저 듣게! 나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 만에 하나 내가 그들과 연을 끊고 자네의 마음이 이루어졌다고 치세. 하지만 그 다음은 어찌 되겠는가?"

남자의 침울한 안색이 더욱 깊어져보이는 것은 그가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결과일까, 그에 대한 황보효선의 동정심이 더욱 커졌기 때문일까.

"강호의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손가락질할 것이네. 자네의 평판은 엉망이 되고 말겠지."

하지만 황보효선은 독한 마음으로 사내를 쳐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때가 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네. 겨우 나 같은, 나이먹은 여자를 얻기 위해서 자네가 거머쥘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을 놓아버렸다고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거야."

"..."

사내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비통한 표정의 사내는, 자신의 무릎을 쥔 채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황보효선은 그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 때, 사내는 흠칫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일그러진 표정을 수습했다. 눈물이 맺힐락말락한 눈이 가라앉고, 입꼬리가 억지로나마 파들파들 움직여 살짝 올라갔다.

"실례했습니다, 여협. 제가 잠시 정신이 이상해졌던 것 같습니다. 더는 여협이... 곤란할 일은 없을 겁니다."

황보효선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개운하다거나 후련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지금의 사내가 크게 상처받았다는 것을, 그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마지막으로 단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든지 말만 하게!"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사내가 꺼낸 말에 섣불리 그러마 대답해버린 것은.

"이거... 한 번만 빼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내의 표정에 정신이 팔려있느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양물이, 여전히 빳빳하게 일어선 상태로 뒤늦게 그녀의 눈에 인식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투명한 봉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손을 둥글게 말고 살짝 위아래로 흔드는 것을 보니 자신을 안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아니던가.

"으음..."

황보효선은 가늘게 뜬 시선을 사내가 어색하게 피하는 것을 보면서, 마지막이라면 이 정도는 받아줘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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