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70화 (370/383)

노희방은 눈이 튀어나올듯 놀랐지만, 사내의 호흡이 여전히 느릿한 것을 깨닫고 이것이 잠꼬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안도감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의문에 자리를 내주었다.

워낙에 단단하게 안겨있는 상태였기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단련된 몸을 가진 그녀였기에 아파할 일은 없기는 했다.

그 덕분에 이대로 잠이 드는 것도 나름대로 선택해볼만 했지만, 역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서로 불편해질 것이 뻔했기에 차라리 지금 잠시 잠에서 깨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소협, 소협..."

"으으음..."

"흐읏..."

손을 살짝 뒤로 빼서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그를 불렀지만, 도리어 팔이 더욱 힘있게 끌어당겨 그녀를 품 속 깊이 안았다.

더불어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둔부에 닿은 막대의 감촉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일어나십시오..."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사형제들을 제치고 방주의 자리를 거머쥘 정도의 여걸인 그녀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둔부에 닿는 감촉은 이질적이었다.

이렇게나 크고 단단한, 거기다 뜨겁기까지 한 것이 사람의 몸에 달려있다니.

"일어나라니까..."

"싫어..."

"무슨...!"

뜻밖에 거부의 대답이 돌아오자 노희방은 당황했지만, 곧 그것이 잠꼬대임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계속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니 꽤나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기에 노희방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둬야 하나...?'

어차피 눈을 뜨고나면 별 일도 아닐 것이었다. 상대는 나이 먹은 여자, 그것도 개방도가 아닌가.

조금 어색해지기야 하겠지만 그 외에 무슨 일이 있을리가 없었으니, 지금 소란이라도 일으켜서 둘이 따로 갇히게 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노희방이 살짝 고개를 들어올려 올려다본 사내의 입은 더없이 행복하다는듯 실실 웃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뒤에 뻔뻔하게 달라붙은 사내의 단단한 육신이 주는 낯선 감촉은, 편안한 침상에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잠자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몸에 꽤나 피로가 남아있었는지,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얌전히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했다.

잠에 취한 상태로 하마터면 자연스럽게 여자의 몸을 만지려고 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아마 바로 잠이 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방주, 혹시 잠을 잘 못 주무셨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절정고수 정도 되면 운기행공만으로도 수면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을텐데도 묘하게 노희방이 피로해보이기는 했지만,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노희방의 탈출 계획은 심플하면서도 효과적이었지만, 애초에 계획을 수행할 사람 가운데 배신자가 한 명 끼어있다는 시점에서 성공확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의 컨디션이 좋거나 나쁘거나, 어차피 그녀의 탈출 계획은 실패한다.

'문제는 이 다음인데...'

실패를 연출한 다음 어떻게 그녀를 회유할까 생각하던 내 귀에, 그녀의 전음이 울렸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노희방의 말대로, 주변을 돌아다니는 무사들의 기척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당연히 이 곳 장사성에도 택배를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 집하장으로 출발했겠지.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경계가 허술해진 것을 확신한 노희방은 지금 탈출할 것을 결정했고, 이미 밑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역할 분담도 이미 끝난 상태였기에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노희방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미안합니다, 소협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맡겨서...]

[괜찮습니다. 제가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결정한 것 아닙니까?]

노희방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해오자, 난 양심이 찔렸다.

그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해도, 아무튼 속이고 있는 셈이긴 했으니까. 덤으로 나는 다칠 일이 전혀 없을 예정이었다.

[저보다는, 노 방주야말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노 방주 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연극을 한 번 하는 이유는 당연히 괜한 희망고문은 아니었다.

확인해야할 것이 한 가지, 그리고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몇 가지가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만약 위험할 때는 본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세요.]

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노희방의 곁에 나란히 섰다. 노희방은 그런 나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시작이다.

"하아아암..."

간수 노릇을 하고 있던 마교 무인은 크게 하품을 했다. 하루이틀 정도야 꽤나 긴장하면서 지켜보았지만, 아무리 지켜보아도 당최 무슨 일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력이 온전하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만도 한데...'

6조의 손에 잡혀왔다는 정파 무림인들.

지금의 사업에 명교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1년은 엄중히 지켜져야할 비밀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살인멸구의 지시가 내려올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교주는 그녀들을 감금하는 것을 선택했고, 굳이 내력을 봉쇄할 필요도 없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녀들을 가둬두고 있는 뇌옥은 통짜 쇠판이 들어가있는 건물이었으니 절대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마교 무인들 중에는 차라리 그들이 빠져나오길 원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베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테니 말이지.'

물론 그 혼자서는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암호랑이들이었기에 합격진이라도 써서 맞서야겠지만, 적어도 단시간에는 절대 저 쇳덩이를 부수고 나올 방법은 없다.

그 사이에 동료들을 불러모으면 얼마든지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는 것이다.

끼이-

"아이구,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내가 남겠다고 할 것도 없... 음?"

기지개를 쭉 켜던 무인은 갑자기 질러놓은 빗장이 툭 벗겨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쇳덩이로 만들어져 튼튼하게 질러진 빗장이 허무하게 툭 떨어지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었지만, 문이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무인은 슬금슬금 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아무래도 빗장 자체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누군지 어리버리하게도 빗장을 허술하게 걸어둔 모양이었다.

"쯧..."

무인은 혀를 차며 다시 빗장을 질러두기 위해 손을 뻗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묵직한 빗장을 두 손에 쥔 순간, 문이 열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비...!"

비상을 외치며 얼른 몸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지만 비호처럼 달려든 사내에게 입이 틀어막힌 직후 무인은 수혈이 따끔하는 것을 느끼며 시야가 어두워져갔다.

의식을 잃어가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낸 것처럼 떨어져나간 걸쇠 조각과, 끊어져나간 자물쇠였다.

"후우..."

사내는 무너져내리는 무인의 몸과 빗장을 받아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탈출은 그다지 순조롭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비상! 놈들이 탈출한다!"

"이런..."

사내는 혀를 차며 간수를 바닥에 팽개치고 쇠로 된 빗장을 또다른 마교도에게 집어던졌다.

풍차처럼 돌아가면서 험악한 소리를 내는 빗장을 마교도가 황급히 피하는 사이, 뒤따라나온 노희방은 사내와 눈짓을 교환하고 즉시 신형을 날렸다.

노희방의 계획은 간단했다.

사내가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에, 노희방이 남은 두 여인을 찾아내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쉽게 달아나지 못하는 것은 튼튼한 감옥이나 감시자 때문도 있었지만,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일부만이 탈출할 경우 남은 자가 위험해진다는 문제점이 가장 컸다.

게다가 혼자서는 도저히 다른 자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남은 일행을 챙길 자신이 없었지만, 둘이라면 가능한 것이다.

웬만하면 무림의 선배로서 위험한 일을 후배에게 떠넘기는 것은 그녀로서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인선을 택한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으아악!"

"이,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어느새 적들이 조금씩 모여오기 시작했지만, 힐끔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진천뢰가 터져나가는 것처럼 사람이 튕겨나가는 광경이었다.

며칠 전, 청성파의 고수들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묘기가 재현되고 있었다.

절세의 보법을 바탕으로 빈틈을 파고들며 어지러이 적들을 흐트려놓는데, 그녀의 취팔선보로는 도저히 저 정도로 적들을 농락할 자신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사내의 무공은 이미 그녀보다 한 수는 족히 윗줄이었고, 그것이 그에게 시선을 끄는 역할을 맡긴 까닭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둘러야해...'

황보효선의 위치는 들렸던 소리를 바탕으로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따로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면 분명 그 쪽에 있을터.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몽아였는데, 적어도 일 각 안에 일을 마치지 못하면 안 되었으니 결코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 있... 크엑!"

파옥권을 배에 박아넣어 한 명을 기절시킨 다음, 노희방은 자신이 예측한 방향에 건물이 한 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을 한 차례 두드린 다음 외쳤다.

"황보 여협, 거기 있습니까?"

[노 방주...?]

이미 소란에 반응하고 있었는지 황보효선의 목소리가 들렸고, 노희방은 얼른 은사를 꺼내들며 자물쇠에 걸며 외쳤다.

"지금 문을 열겠습니다!"

은사에 내력이 실리자, 자물쇠는 허무하게 끊어지고 빗장을 뽑아내 문을 여니 황보효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떻게...?"

"급합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아... 네!"

노희방의 말에 황보효선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왔고, 곧이어 몽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몽아사태를 찾아야합니다. 흩어져서 찾아보고, 찾는다면 신호를!"

간결한 설명에 황보효선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두 사람은 즉시 둘로 갈라져서 몽아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보효선은 얼마 가지 않아서 뜻밖의 광경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강 소협...?"

마치 삼두육비라도 된 것처럼 요란하게 싸우며 적들을 넘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틀림없는 강윤이었다.

그 유려한 몸놀림에 감탄하는 것은 노희방과 마찬가지였지만, 황보효선은 노희방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다.

'어째서...? 강 소협은 마교와 내통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다툴 이유가 없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당혹한 황보효선의 눈은 곧이어 더더욱 커졌다.

"소교주?!"

헐렁한 장포를 걸치고 나타난 영호경이 쥔 검집에서 검이 출수되었다.

검병에는 손을 얹지조차 않은 이기어검의 쾌속한 한 수에, 막 마교도의 팔을 붙잡았던 강윤은 그를 내팽개치며 즉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다시 땅을 짚은 손을 밀어내며 똑바로 일어난 다음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는 그를 끊임없이 쫓아가는 이기어검의 공세.

'죽일 생각은... 없는 건가?'

가까이에서 상대했다면 그런 것을 알아볼 겨를도 없었겠지만, 멀리서 보고 있으면 조금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다급해보이는 상황이지만, 강윤이 본래 마교의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과 그녀의 감이 제법 예리하다는 점이 한몫한 결과 황보효선은 저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 상황이 전혀 다르게 비칠 수도 있는 것이다.

"멈춰요!"

어느새 노희방의 손에 구출되었는지, 외침과 함께 달려든 몽아가 황보효선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비호처럼 신형을 날리던 그녀는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춰세웠다.

"흐음... 그대가 말한대로 멈춰주었다. 이제 되었는가?"

"크윽..."

이기어검의 강대한 기세에 사정없이 밀리던 강윤이 결국 구석에 몰린채 목에 검이 겨누어진 것을 보고, 몽아는 침통한 표정으로 들어올린 손을 내렸다.

그 광경을 본 황보효선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몽아사태가 강 소협과 저 정도로 교분이 있었나?'

그녀가 알기로 몽아와 강윤은 그다지 접점도 없었거니와, 이번 여행길에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큰 관련이 없는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보효선이 보기에 몽아의 표정이 거짓인 것 같지도 않았다.

한편, 뒤늦게 그녀의 곁에 서는 노희방을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모두 모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그녀들이 이 곳을 벗어나는 길은 요원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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