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67화 (367/383)

사천당가.

사천 굴지의 무가이자 명가인 이 가문은, 지난 몇 년간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거쳐왔지만 외부에는 그런 부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차이를 인식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수십년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가주가 실각하고, 그 휘하에 있는 각주들에게 권력이 옮겨갔다고는 하지만 조금 무공 수련이 고달파진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가주의 두 자녀만큼은 꽤나 격심한 변화를 겪어야했는데, 그 이유는 서로 다른 이유라고는 하지만 각각 가주와 가모의 권한을 일부 대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누님, 저 좀 숨겨주십시오..."

"무슨 일이니?"

당영은 남동생이자 소가주인 당무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에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련각주가 저를 아주 잡으려고 합니다.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무련각주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던 당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일한 직계로서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아버지 당조명이 가문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시절, 각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팽연화에게 우호적이던 인물이 그였다.

가주의 눈밖에 나는 한이 있더라도, 당가의 미래를 생각해 팽연화를 옹호했던 그였기에 당가에 대한 충성심은 그야말로 절대적.

결코 소가주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으니 당영은 동생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누님도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최근 강 소협의 소문을 어디서 듣고 온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즘 점점 수련의 강도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하..."

당영은 그제야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달아났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동생은 제법 성실한 편이니, 아마도 무련각주 쪽에 문제가 있을 터.

"...오래는 못 숨겨준다."

"감사합니다, 누님."

동생이 실없이 웃는 것을 흘깃 보고는 당영은 다시 붓을 들었다.

소가주인 당무혼이 무공을 비롯한 가주로서의 교육을 받느라 바쁘다면, 당영의 경우에는 강호를 유람중인 팽연화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바빴던 것이다.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어머니는 대체 언제쯤 돌아오시는 거지?'

일이야 나름대로 손에 익어서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1년 이상 외유가 이어진다니 너무 길지 않은가.

팽연화의 무공을 고려하면 혹시나 변을 당했을 리는 없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영은 가슴 속을 채우는 답답한 기분을 입 밖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왜 그러십니까, 누님?"

"...아무것도 아니다."

당무혼의 물음에 당영은 고개를 저었다. 요 몇 년 사이 제법 자라서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아직 어린 동생.

경험도 일천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어머니의 존재감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봐야 걱정만 늘어날 뿐이었다.

'강 소협...'

이럴 때 마음에 두고 있는 님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또 훌쩍 어딘가로 가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한편 당무혼은 어두워진 표정의 누이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고보니 누님, 알고 계셨습니까? 강 소협의 무공이 그간 엄청나게 진일보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강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자기 일처럼 반응하던 당영이었기 때문에 꺼낸 화제였건만, 정작 당영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안 그래도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가 강윤과 무관하지 않은데, 게다가 이미 알던 사실을 들어봐야 반응이 좋을리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무혼은 집요했다.

"그렇구나, 한 마디로 끝내실 일이 아닙니다, 누님. 듣기로는 절정고수가 포함된 적을 몇이나 꺾을 정도로 무공이..."

"뭐, 뭐라고? 그럼 다친 곳은?!"

"...예?"

"아, 아니다."

무심결에 되물었다가 이미 강윤이 무사한 모습을 확인했던 것을 떠올리고 당영은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바보같이...'

당영은 역시 자신은 무가에 어울리는 성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동생은 좋은 소식을 전해줄 생각으로 말해주었음이 분명한데, 도리어 걱정만 되지 않는가.

평범한 무가의 여식이었다면 그저 찬탄하였을 것을, 그녀는 사내가 위험한 싸움에 발을 들인다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런 누이를 보던 당무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머니께서 같이 계셨다니 위험할 때는 어련히 잘 보호해주셨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이니?"

당영은 동생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갑자기 외유 중인 어머니가 왜 나온단 말인가?

"모르셨습니까? 무련각주가 듣기로는 거기에 어머니도 함께 계셨다고 하던데..."

소문의 근원지인 화운천의 기준에서, 인상깊었던 사람은 단연 강윤과 당혜원이었다.

실질적으로 문도들 대부분을 보호해준 것은 팽연화와 제갈미령 쪽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은 그가 인상깊게 느꼈던 것이 주로 퍼졌던 것이다.

하지만 팽연화도 엄연히 절대고수인지라, 화운천이 그녀를 간단히 언급했을 뿐임에도 소문에 그녀의 이름 역시 종종 포함되고는 했다.

"...누님?"

당무혼은 누이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움찔해서 그녀를 불렀지만 당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모님...'

강윤이 당시 부재중일 때, 분명 당혜원도 함께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팽연화와 동행했다는 것은, 십중팔구 당혜원은 팽연화의 행방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영은 당혜원이 어째서 자신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감추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희방은 사내의 질문에 살짝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어쩐 일로 왔느냐.'

강호에는 우연이 많이 일어난다. 심지어 가끔씩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우연조차도 일어나는 것이 세상사인 법.

그녀들 세 사람이 그야말로 우연히 강윤의 근처를 지나다 변을 당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연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으나, 노희방이 보기에 사내는 이미 우연이 아닐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강 소협."

"예, 방주."

"조금 마셔도 되겠습니까?"

"...예?"

노희방은 의아한 기색의 사내에게 술이 든 호리병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병을 본 사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노희방은 마개를 열고 입에 병을 가져가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액체가 입 안을 타고 들어오며 향긋한 주향이 코를 간질이고, 마침내 목구멍을 넘어가자 타는듯이 화끈한 감각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주정이 몸 안에 스며들자, 살짝 취기가 올라와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것을 느끼며 마개를 닫은 노희방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이걸 마셔야 마음이 편해져서."

"...술은 너무 과하면 몸에 해롭습니다."

"예?"

이번에는 노희방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그녀가 술을 마시거나 취한 모습을 보일 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노희방은 화를 내던 사람들이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다,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후우..."

맨정신으로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살짝 취기를 빌렸는데도, 노희방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먼저 소협에게 사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야했다. 인사불성이 되어 잡혀온 것을 보니 아직 사내는 모르고 있겠지만, 전혀 다른 문파의 세 사람이 동시에 여기에 잡혀있다는 것을 알면 사내의 의혹은 확신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 때 가서 사내 스스로 진실을 알게 되느니, 지금 그녀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소협도 짐작했겠지만, 저는 소협의 뒤를 밟고 있었습니다."

"..."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역시나 예상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흥분하는 기색이라도 보일만도 한데, 사내는 그저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변명처럼 들릴 거예요. 그래도 괜찮다면..."

노희방은 천천히 말을 하면서 사내의 안색을 살폈다.

스승도, 무공의 기원도 알 수 없는 의문의 청년고수의 등장. 그리고 그와 시기를 같이 해 강호 무림을 암약하기 시작한 의문의 세력.

평소에는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들이 나타날 때는 그 청년고수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서지 않는가.

차라리 그가 표적이었다면 모를까, 진짜 표적은 따로 있고 그가 항상 돕는 구도가 나온다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군요. 만약 제가 내통자이고 이대로 명성을 얻는다면 정파 깊은 곳에 비수가 하나 겨누어지는 셈이니까요."

"터무니없는 가능성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함께 여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수. 노희방은 여전히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었지만, 적어도 당장은 사내를 신뢰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사내가 역으로 질문을 건네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굳이 그들이 저를 키워서 쓸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저를 키운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딱 봐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제가 만약 저 같은 사람을 내통자로 들여보낸 장본인이라면 저처럼 노골적으로 수상하게 행동하도록 두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

"강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하고, 몇 가지 협행도 더 곁들이겠죠. 1년이나 굳이 숨겨두는 편이 오히려 더 수상하지 않습니까?"

노희방은 말문이 막혔다. 사내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도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만약 사내가 스스로 말한대로 행동했더라면, 노희방 역시도 큰 의심을 하지 않고 지나갔을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에게서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기어코 뒤를 밟기까지 한 이유는...

'이 남자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랬다. 결국 그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사내의 행보만 보아서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을 개방에 몸담아온 그녀는 정보를 모으고 모으다보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 나아가 그 사람의 인물상까지 알아볼 수 있는 상황에 익숙했다.

누군가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그것이 은령회에 관여해서가 아닌가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여길 벗어나면 결백을 증명할 생각부터 해야겠군요."

하지만 자신이 의심받고 있었음을 알면서도, 그리고 은근히 아직 그 의심이 남아있음을 안다고 피력하면서도 피식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노희방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