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66화 (366/383)

나는 두 여자를 이끌고 체액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내력으로 따뜻하게 데운 물 속에 들어가자 기분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니, 욕조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네다섯명은 우습게 들어갈 것 같은 크기에, 나는 비교적 크기가 작던 마교 총단의 욕조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욕조가 크네요?"

"여기는 여유공간이 넓은 편이니 말일세."

나는 그게 단순히 마교의 생활습관이라고 생각했는데, 마교 총단은 사막 인근에 있는데다 절벽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만큼 무의미한 공간낭비에 민감한 모양이었다.

막상 여기에 오고보니 전혀 그런 제약이 없어져서 원하는 크기의 욕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흐음..."

"서방님... 가슴은 장난감이 아니에요..."

나는 하얗고 풍만한 젖가슴과 구릿빛의 탱탱한 젖가슴을 아래에서 통통 쳐서 물 위에 띄우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욕조만 보아도 마교 입장에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거기에 내 욕심을 끼워넣는 것에 대해서 영호경은 어떻게 생각할까?

'속으로는 위험한 일이 애초에 생길 일이 없도록 죽이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영호경은 자기 사람에게는 살뜰하지만 남에게는 무심한 경향이 있었다. 내가 원하니까 참아주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은 것이다.

결국 세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꼭 설득에 성공해야한다는 이야기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정말 채수란의 말대로 그 여자들을 자지로 마음대로 한다는게 가능할까?

"이미 몇 번이나 한 일이 아닌가? 새삼스럽긴..."

"아니, 그 때하고는 경우가 다르다니까요."

실사례가 물론 있기는 하다. 언소영이라던가, 매소향이라던가, 눈앞의 채수란이라던가.

얼렁뚱땅 몰아붙이거나, 뭔가 다른 구실로 받아들이게 한 경우와는 달리 강제로 당했음에도 그녀들은 넘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때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이번에는 정파무림 전체의 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눈감으라고 하는 거니까요. 부담이 더 클 거예요."

"흐음... 부정할 수는 없겠군."

당장 물류업을 하겠소, 라는 핑계로 중원 각지에 마교 무인들을 배치시켜놨다가 일시에 기습 작전이라도 벌이게 되면 하루아침에 정파 무력의 절반은 섬멸당할터.

단순히 본인의 거취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걸리게 되면 당연히 가드도 더 두터워지겠지. 어떻게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노희방이란 여자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보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아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과일텐데, 정작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어디를 어떻게 찔러서 설득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씨일문에 있을 때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해볼걸...'

하지만 후회해봐야 이미 때는 늦었다.

정파인의 신분을 버릴 것도 아닌 이상, 안이하게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다는 선택지 따위는...

"...있다?"

"응?"

혼자서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갑자기 입을 열자 각자 편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던 두 여자가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내 얼굴을 본 여자들은, 자세한 사정까지야 모르겠지만 내 표정이 밝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마주 웃어주었고 그녀들의 반응은 옳았다.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지금껏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손쉬운 방법이.

'대체... 뭐지?'

노희방은 하루를 꼬박 갇혀있으면서 이 감옥답지 않게 편안한 방에서 더없이 불편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방주의 자리를 거머쥘 정도의 그녀가 적에게 붙잡혀있다는 사실 정도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보다는 잡혀온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도 스스로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그녀에게 의구심을 느끼게 했다.

혹시나 그녀를 등한시해서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식사는 꼬박꼬박 나왔고 그 외에 생활에 필요한 것이 빠짐없이 주어지는 것을 보아서는 그도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는 그녀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을 끌다보면 개방에서 그녀의 실종을 알아차리고 금방 그녀를 찾으러 올 것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두 사람의 안위가 어떠한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들렸던 황보효선 쪽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확인해보고 싶었다.

[빨리 걸어!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

그 때, 노희방의 귀에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에도 감정이 잔뜩 실린 것이 심상찮은 목소리.

끼이이익

이어서 그녀를 가두고 있던 철문이 벌컥 열리고,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들어가!"

"어억!"

난데없이 뒤에 서있던 사내가 앞에 선 사내를 걷어차는데, 걷어찬 사내를 보니 바로 어제 그녀를 위협했던 청년 고수였다.

그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노희방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강 소협?!"

얼마나 당했는지, 온통 찢어지고 흙먼지가 묻은 옷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력도 다했는지 자신을 부르는데도 반응하지 않고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그 모습에 노희방은 놀라서 얼른 그를 받쳐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다, 당신은..."

사내의 초점 흐린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자, 노희방은 고개를 들며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놈은 너희가 잡혀가는 것을 발견하고 도주하던 놈이다. 저만 살겠다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던 놈을 걱정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가보지?"

노희방은 움찔했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세 사람이 저항했어도 이렇게 붙잡힌 상황이었으니, 사내가 도주를 선택한 것은 옳았다.

그녀의 표정이 차분해진 것을 알아보았는지 청년 고수는 김샌 얼굴로 문을 도로 닫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 사람을 이대로 둘 겁니까? 치료를..."

"기력이 쇠했을 뿐이다. 정 걱정이 된다면, 네가 돌보면 될 일 아닌가?"

매몰차게 말하며 문을 닫아버리자, 노희방은 기가 막혔지만 사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급한대로 맥문을 짚어 체내를 탐색해 내상 여부를 확인하고, 어디 부러진 곳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그러고나서야 일단 적어도 큰 부상은 없다고 결론지은 노희방은 간단하게 사내의 옷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다시 맥문을 잡으며 천천히 내력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내력을 정말 한계까지 쥐어짰는지, 공허하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에 노희방은 말을 잃었다.

"으윽..."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괜찮아질 것이니..."

이 정도의 고수라면 육신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기를 끌어모으려 할 터. 그녀가 할 일은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기력을 보충시켜주는 것이었다.

마치 다 말라버린 황무지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녀의 내력이 사내의 내부로 흘러들어가자 곧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급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엇, 이, 이건?!"

하지만 그 반응은 노희방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대기를 흐르고 있던 자연의 기가 마치 실체를 가진 것처럼 세차게 유동하다 그의 몸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가 염려될 것 같은 기세였지만, 세차게 빨려들어간 기는 자연스럽게 사내에게 스며들고 다시 빠져나오는 것을 반복했다.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엄청난 양의 기의 흐름을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노희방은 서서히 그의 몸에서 손을 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게 운절 대협이 말씀하신, 그의 진면목인가?'

고수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내력만이 무공의 전부는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내력이 뛰어난 자는 당연히 남들을 압도하기에 유리하며, 내력이 부족한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고수가 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대자연의 기를 감응시킬 정도의 엄청난 내력을 지니고 있는 눈앞의 사내는 그 누구보다도 고수가 되기 위한 토양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아..."

그 사실을 새삼 곱씹은 노희방은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눈앞의 사내가 서서히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협, 소협, 들립니까? 강 소협?"

"조금만 더 자구요..."

"...저도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여의치가 않습니다. 일어나세요."

나는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계속 잠에 빠져있고 싶었지만, 나를 잠에서 깨우려는 그 목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이제야 일어났군요. 다친 곳은 괜찮습니까?"

"누구...? ...아!"

"기억해낸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하죠. 개방의 방주를 맡고 있는 노희방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의 소개를 듣고 나는 눈꺼풀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던 잠기운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나는 이 여자에게 접근하려고 형완에게 그토록 얻어터진 것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되겠는가?>

<맞아요, 혹시 서방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여자들은 내켜하지 않아했지만, 나는 형완에게 오로지 서서 막기만 할테니 나를 공격해달라고 주문했다.

내 무공이 많이 늘어 형완보다 한 수 이상 위라고 하지만, 그렇게 반격도 회피도 않고 멍하니 서서 방어만 하고 있어서야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도 당연지사.

난 결국 박살이 났고, 버텨내느라 내력을 바닥까지 긁어낸 나를 형완이 여기로 던져놓고 갔던 것 같다.

응, 내력과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후반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리 내 쪽에서 부탁했어도 그렇지 너무 기꺼이 팬 건 조금 괘씸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노희방이 나를 의심하는 기색을 안 보이는 점은 높이 사도록 하자.

"아, 여기는...? 노 방주께서 도와주신 겁니까?"

"아니, 저도 놈들에게 잡혀왔습니다. 이렇게 보이지만... 쉽게는 나갈 수 없는 곳으로 되어있죠."

그건 이미 영호경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겉으론 평범한 방으로 보이지만 철로 온통 감싸서 만든 감옥이라고.

이음새를 부수거나 강기라도 써서 단시간에 부수지 않는 이상 절대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는 노희방에게, 나는 면목없다는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은..."

"아까 강 소협을 데려온 그 자에게 들었습니다. 몸을 빼내다 놈들에게 잡혔다구요."

노희방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강 소협이라면 누군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올바른 선택을 한 겁니다."

"..."

묘하게 양심이 찔린다. 이 여자들이 잡혀온 거야 내가 관여한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그녀를 속이고 있는데도 도리어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노희방은 안심하라는듯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버티고 있으면 본방의 방도들이 찾으러 올 것이 분명하니, 우선 적들이 손을 써오기 전까지는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두도록 하죠."

"다행이군요. 저도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웃는 낯으로 대답한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방주께서는 호남성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가볍게 물었지만, 내게는 이것도 꽤 중요한 질문이었다.

황보효선에게는 역으로 추궁당해 질문할 기회를 놓쳤지만, 우선 이것부터 확인해봐야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노희방의 표정이 경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