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효선은 눈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예전에 그가 말했듯, 마교를 멸절하려 했던 그 어떤 정파의 협사도 결국 무림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껏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 두 세력의 다툼을 가라앉히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내의 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방심한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마교 무인들을 중원으로 들여와놓고서, 그녀 앞에 뻔뻔한 낯을 보인다는 말인가.
난처한 표정의 사내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보효선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속아넘어간 그녀를 어리석다고 비웃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으음... 여협,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절대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거짓이 아니라고?"
우스웠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그녀가 품었던 기대가 거짓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일어나는 것이.
"예. 지금부터 설명드리죠."
사내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황보효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자마자 황보효선은 단숨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중원의 물자는 표국이나 상단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그 종착점은 보통 지역 상인까지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수레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은 어떻게든 물건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의 모든 수레가 없어진다면 어찌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원래대로라면 고급 인력이 다수 필요해 채산성을 그다지 기대할 수 없는 사업입니다만, 다행히 명교라면 충분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자, 잠깐 기다리게!"
그녀가 사내의 설명에서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규모의 상단이 개인과 직접 거래하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무림맹 백호단의 부단주, 직함으로서야 그럴듯하지만 그녀는 대규모로 살림을 꾸려본 경험이 없는 것이었다.
좀 더 풀어서 설명을 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강윤이 의도적으로 설명을 압축해서 한 탓에 황보효선은 어렴풋한 느낌밖에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확인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마교도들이 모두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모아놓은 자들이란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사내의 말에 황보효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가 얼핏 보기로 낮게 잡아도 최소한 이류 상급 이상의 고수들이 즐비한 모습이었다.
그런 자들을 표사, 아니 쟁자수에 가까운 위치로 두고 부린다? 정파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교는 정말 고수가 구름처럼 많은가보구나...'
"어떠십니까? 납득이 되셨습니까?"
"아, 아... 그것이..."
사내의 질문에 황보효선은 내심 당황했다. 결국 이 상황이 어떻게 사내의 목적과 부합하는지, 그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적어도 태도만을 보아서는, 그녀를 속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설명한 내용에 거짓 한 점 들어간 일이 없으니 그녀의 직감이 경고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사안이 중대했다.
"미안하지만, 다시 설명을... 아니, 아닐세."
다시 설명을 들어서라도 이해하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황보효선이 다시 같은 설명을 듣는다고 이해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애초에 상인도 아닌 황보효선에게는 굉장히 낯선 개념인데다가, 그녀는 우둔하지도 않지만 특출나게 명석한 것도 아닌 것이다.
'아, 그렇군.'
그녀가 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녀는 여기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강 소협, 여기에 개방의 노 방주가 있을텐데... 강 소협?"
아마도 세 여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방면에 능할 법한 노희방의 이름을 꺼내자,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노 방주께서... 여기에 있단 말씀입니까?"
"몰랐는가? 나, 노 방주, 몽아사태 이렇게 세 사람이 여기에... 잡혀있지."
여상하게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황보효선은 어물거리며 말을 맺었다.
'표정이 왜 저러지?'
곧 사내의 표정은 금방 갈무리되었지만 황보효선은 의아한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골치아프게 됐네.'
내가 황보효선을 설득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정보를 다소 왜곡시키는 방법이었다.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불친절한 설명으로 어렴풋한 이미지만 갖게 하는 것이 목표.
마교에서처럼 예시를 하나하나 들어가며 성심껏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것이 일종의 경제침략이라는 것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애초에 상인도 아닌 그녀가 경제학도 없는 이 시대에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폐해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처럼 포장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황보효선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언젠가는 답을 알테니까, 지금 미리 약간 왜곡된 답을 알려준 다음 추가로 정파 쪽에도 당근을 물려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보효선에게 혼란스러운 정보를 줌 →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경제침략임을 알려줌 → 그러나 그 피해는 결코 크지 않으며 정파에도 그에 대응할 무언가를 쥐어줄 것이니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하게 함
'이런 3단계 작전이었는데, 하필 여기까지 동행한 사람이...'
몽아는 그렇다치고 노희방까지 있다니.
정보단체인 개방을 쥐고 있는 그녀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갔다가는 여길 떠나는대로 개방도들을 굴려서 상황파악을 해서라도, 마교 쿠팡이 실은 중원에 박아넣기 위한 커다란 말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야 말거다.
"왜 그러는가?"
"그것이... 아무래도 부담없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분이 황보 여협 밖에 없어서 고민되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렇군... 그랬어..."
사실 이것도 문제였다. 마교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아는 황보효선은 괜찮다. 하지만 나머지는 뒷감당할 계산이 서기 전에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섭혼술 마렵다, 역용술 마렵다.'
섭혼술은 무공이 최소한 초절정은 되어야 사부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역용술은 화운영에게서 배워볼까 했지만 퇴짜를 맞은지 오래였다.
<어디서 여자를 더 늘려오려구요?>
나는 위급상황에서 모습을 바꿀 재주가 있으면 생존에 유리하다고 주장했지만, 애초에 화운영의 역용술은 안정적인 대신 사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여자들 모두가 불가를 외치는데 나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빠르게 쓸 일이 생길줄 알았다면 반드시 배워뒀을텐데.
"그, 그럼 우선 내게 다시 한 번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황보효선이 자신없는 표정으로 말해왔다. 그래도 노희방을 만날 수 없는 내 사정을 고려해주려는 것을 보면 나를 그나마 믿어보기로 한 건가?
하지만 이미 내 계획은 물건너갔다.
"아닙니다. 우선 불편하시겠지만 여기에 있어주시겠습니까? 생활에는 불편이 없도록 부탁해두겠습니다."
여기서 황보효선을 어떤 방식으로 구슬리든 상관없이, 노희방을 설득하지 못하면 내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노희방까지 고려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 생각이 정리되는대로 다시 와주게."
그래도 황보효선이 내 말에 따라주는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영호경과 합류했다.
"...이렇게 된 것이네."
"이런 멍ㅊ... 아니, 생각이 짧은 사람들 같으니."
고운 말, 고운 말.
나는 영호경에게 추가로 전후사정을 듣고나서 치미는 욕설을 혹시나 아기가 들을까 자체검열하면서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빠가 나쁜 말 쓸뻔해서 미안해..."
"너, 너무 유난 아닌가? 어차피 기억도 안 날텐데..."
"그래도 좋은 말만 쓰는게 더 좋죠."
사실 오늘밤에는 훨씬 불건전한 것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평소에라도 최대한 고운 말만 써야지.
"그건 그렇고... 하아..."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영운자가 혹시 여기로 올지 모르니 잠시 본거지를 비워두었던 수하들이 귀환하면서 황보효선 일행과 충돌한 것은, 그래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문제는 그 다음, 제압한 그녀들을 여기로 어서옵쇼 하고 데리고 왔다는 점이다. 아니, 더 양보하면 데려온 것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어차피 죽일 거라는 안일한 판단 아래 그녀들을 멀쩡히 눈뜨고 있는 상태로 데리고 왔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었네. 최종적으로는 정파와의 결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몇몇만 아는 기밀이라서..."
"네, 이해합니다. 미리부터 동네방네 퍼뜨려봐야 분열만 일어나겠죠."
이 사업에 관여하는 마교도 중 대부분은 중원에 말뚝을 제대로 박고 나면 그 때부터는 정파와 한 판 붙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교도들에게 은밀행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골치가 아파지게 된다.
'정파의 고수에, 비밀로 부쳐져야할 자신들의 존재를 알았다. 당연히 죽일줄 알았겠지.'
어쩌면 죽이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가슴을 열어보지 않고서야 알 도리는 없다.
"차라리 그냥 두고 도망왔으면 은령회의 졸개들인척 누명을 씌울 수 있을텐데 말이죠."
"누명을 씌우다니... 나쁜 말은 안 쓰기로 하지 않았나?"
"...이게 나쁜 말인가요?"
영호경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부턴 쓰지 말아야지.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단숨에 두 개로 좁혀진다. 셋 다 구슬리거나, 황보효선을 포기하고 셋 다 살인멸구하거나.
하지만 영호경이 지나가듯이 날린 팩트가 내 옆구리를 후비고, 후자의 가능성마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솔직히 살인멸구의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실은 그랬다. 나름 냉정한척 살인멸구, 살인멸구 하고 있지만 이미 속살의 맛을 본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다가 노희방도 명색이 개방이라 전혀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충분히 아름다운 밀프였다.
솔직히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 침묵에서 충분히 대답을 얻어낸듯, 영호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얼마나 여자를 더 탐해야 만족할텐가?"
"..."
"그야, 나는 그대와 혼인하기로 한 것도 아니니 이런 일로 불평할 자격도 없겠지."
"그, 그건 아닙니다."
제일 처음, 목숨을 구해준 포상으로 영호경이 내게 보지를 허락하기로 했을 때 분명히 약속하기는 했다. 아이는 가지되, 혼인은 없을 거라고.
자신이나 뱃속의 아이를 이용해서 마교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미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다.'
"아경, 침소가 어디죠?"
"그, 그건 왜 묻는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영호경이 혼인하기로 한 것도 아니라는 말을 꺼낸 것은 틀림없는 신호였다.
다른 여자를 건드릴 생각을 하기 전에, 일단 내 여자인 자신에게 마음을 쏟아달라는 신호.
"아읏...♥"
나는 영호경을 향해 손을 뻗었고, 내 손이 영호경의 투실투실한 가슴을 꽉 틀어쥘 때까지 그녀는 조금도 제지하지 않았다.
"왜긴, 잊어버렸어요?"
"흐응... 뭐, 뭘..."
나는 영호경에게 몸을 바짝 갖다붙이고 반대쪽 손으로 엉덩이까지 틀어쥐었다.
"당신이 명교 교주가 되더라도... 남들 없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내가 대달라고 할 때 대주기로 했잖아요."
어차피 노희방을 설득하려면 좀 더 정보를 모으고 궁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장은 고민해봐야 큰 의미도 없고, 지금은 얼굴을 붉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 밀프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자.
"보지 대줘..."
"으응...!"
아가야, 이건 나쁜 말이 아니라 엄마를 굉장히 사랑한다는 말이란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가도 알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