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난 용비연이 영운자를 회수해간 덕분에, 마교도들이 급하게 둥지를 비운 것은 괜한 수고를 한 셈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바로 옆에서 목격해준 마교도들이 있는 덕분에 양치기 소년이 될 걱정은 덜었다는 점이랄까.
<우리는 먼저 귀환해서 소교주께 보고를 올릴 것이니 천천히 오시오.>
천천히 오라고는 했지만, 기껏해야 하루 걸릴 길이었기 때문에 한 번 해가 지고 다시 뜰 때쯤에는 나 역시 호남성 장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물어물어 도착한 운가상단에서, 영호경에게 받았던 패를 접수원에게 보여주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
"왔는가?"
응접실에서 기다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호경이 상기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초절정의 무위를 가진 그녀가 조금 서둘렀다고 저렇게 얼굴이 붉어질리 없으니, 그녀도 나와 만날 것을 꽤나 기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장이라도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안내인을 의식한 나는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사실 마교 총단에서 파견된 인원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아마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도 없을테니, 영호경에게는 더욱 깍듯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좋겠지.
"이만 물러가거라."
"예, 소교주."
따뜻한 차가 담긴 다구까지 탁자에 내려놓은 안내인이 고개를 깊이 숙인 다음 나갔다.
문이 닫히고,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는 것을 기척으로 감지...
"너무 늦지 않았는가!"
와락
"자, 잠깐, 소교주... 이러시면..."
"더 못 기다린다. 얼마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는가?"
접수원이 충분히 멀어지기도 전에 나를 먼저 끌어안고 몸을 부벼오는 영호경의 몸에서 야한 살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자지도 그 냄새에 반응해서 미칠듯이 발기했지만 나는 문쪽을 돌아보며 혹시나 영호경의 목소리를 접수원이 듣지 않았나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하아... 진짜다... 정말로, 그대가 왔구나..."
그 말에 나는 엄청나게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중간에 귀찮은 일이 제법 많이 있기도 했지만, 좀 더 일찍 찾아와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다못해 나는 그녀를 달래듯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주변을 맴도는 막대한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영호경을 내려다보자, 그녀 역시도 여유롭게 웃었다.
"아무렴 내가 뒷일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 여겼는가?"
"그 잠깐을 못 참고 덤비는데,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요?"
주변을 가득 메운 기의 정체는 강기막. 예전에 팽연화가 그랬던 것처럼 영호경 역시도 주변을 순간적으로 강기막으로 감싸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대가 너무 늦지 않았는가... 호북성까지 갔었다면 잠시 내게 얼굴이라도 비추면 좋았을 것을..."
"...미안해요..."
영호경에게 서신은 보냈으면서 정작 잠깐 들를 생각은 못했다는 것이 한심했다.
당시엔 주약선이 화운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라서 머릿속이 꽉 차있었기에, 나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영호경은 그것을 이유로 내게 바가지를 긁는 것보다는 좀 더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여자였다.
"한 달 보름 정도는 머물다 갈 것이라고 했었지? 미안한줄 알면 거기서 한 달 연장하게."
이 얼마나 달콤한 불평등조약인가. 타국의 실책을 놓치지 않고 조약을 고쳐쓰다니 영호경은 제국주의 시대에 태어나야했을 여자가 틀림없다.
"아경...!"
"자, 잠깐, 대답은... 흐으음...♥"
나는 온통 부드러운 야한 몸매에 바짝 달라붙은 상태로 영호경의 입술에 키스했다.
정말, 이런 여자가 어떻게 마교 소교주일 수가 있지?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컷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은 야한 암컷인데!
'게다가...'
벌써 7개월은 되어 불룩하게 부풀어오른 배에 내 아이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흐읏, 안 돼...! 아기한테, 비비지마...! 아응♥"
"당신이... 야한게 잘못이잖아...!"
지금 여기서 해버릴까?
빳빳하게 일어선 자지를 배에 문대다가 엄마 뱃속에서 잘 자고 있을 아이에게 폐를 끼치느니 짧고 확실하게 끝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고 바지를 내리는 쪽으로 점점 생각이 기울던 차에, 영호경이 나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아, 이런..."
그리고 나도 금방 그 이유를 깨닫고 그녀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 누군지 몰라도 정말 눈치는 더럽게 없는 사람이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나와 영호경은 서로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내력으로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소교주, 급히 말씀 올릴 것이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들어와라."
영호경도 꽤나 몸이 달아있었는지 목소리가 퉁명스러웠지만, 수하는 그것을 알아차린 기색이 아니었고 급히 예를 올린 다음 보고를 시작했다.
"복귀가 늦던 6조가 지금 귀환했습니다만, 복귀 도중에 정파의 고수와 충돌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실수했어, 설마 적들이 그렇게 강할 줄은...'
노희방은 제법 잘 꾸며진 방의 벽에 손을 얹은채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후회했다.
은밀하게 인적이 없는 곳을 이동하는 자들. 불문의 내공을 지닌 몽아사태로부터 그들이 마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이탈했어야했다.
거기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보였으니, 가까운 개방 분타로 가서 정보를 종합하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꽤나 거리도 두고 있었고, 잠행을 유지하고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뒤를 밟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를 따르던 또다른 적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결국 적에게 발각당한 그녀들은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분전했지만, 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유인책이었나? 대체 어떻게...'
당연히 아니었다.
정파의 일부가 은령회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영호경은 일부러 각자에게 휘하 무인들을 이끌게 하고 신뢰할 수 있는 또다른 수하에게 그 뒤를 밟게 했던 것이다.
영호경은 그저 내부에 내통자가 없는지 가볍게 흔들어본 것에 불과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노희방으로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강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은밀행동을 하고 있던 그녀들의 존재를 알던 것은 단 한 사람.
"설마... 운절 대협이...?"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우연이 아닌 계획된 것이라면 그녀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가능한 사람은 운절 영운자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라며 일축하려고 했지만, 항상 최악을 가정하는 것이 습관이 된 노희방은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자, 자네가 여기 왜...!]
그 때, 비명과도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리다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마도 노희방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황보 여협...?'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서 감금당했다. 서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
방금 전의 외침으로 목소리를 높이면 서로에게 닿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노희방은 그보다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끊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안 돼!"
꽝
노희방은 단전에서 옥현귀진신공의 내력을 끌어올려 즉시 장력을 떨쳐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나무벽의 손상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철로 된 문보다는 이쪽이 빨리 부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인데, 부수어진 틈을 보니 거기에도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내력을 봉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노희방은 내력을 담아서 크게 외쳤다.
"멈추세요! 그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내게... 내게 묻는다면 정보든 뭐든 알려줄 수 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끊긴 목소리. 내력으로 강화된 그녀의 귀는 음성이 굉장히 깔끔하게 끊긴 것을 감지해냈다.
그녀의 입을 틀어막거나, 폭력으로 입을 열 여유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끊긴 음성은, 애초에 소리를 낼 부위 자체를 떼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보효선의 목이 잘리는 모습을 상상한 노희방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나운 인상의 젊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용히 해라, 여자."
"대체 내 동행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겁니까?"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자신보다 최소한 10년 이상 젊은 남자가 무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노희방에게는 그보다는 황보효선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만약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정말로 네가 걱정하는 짓을 저질러주마. 뭐든 하다보면 그 중에 하나는 걸리겠지."
사내가 위협하는 말은 어쩐지 어색하게 들렸지만, 노희방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조용해진 노희방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갔고, 그녀는 혼자 남았다.
'아직... 아직은 무사하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노희방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애초에 적들이 표적을 황보효선에서 그녀로 바꾼다고 해도, 순순히 정보를 토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개방의 방주였다. 종종 가까운 분타를 들러 인근의 정보를 수집했으니 그 동선에서 그녀가 실종된다면 방도들이 머지않아 이상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녀가 생각해야할 것은 두 가지, 방도들이 그녀를 찾아낼 때까지 무사히 버텨낼 방법, 그리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이 곳을 탈출할 계획.
'부디 무사하길...'
노희방은 치밀어오르는 무력감을 억누를 술기운을 빌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아쉽게 여기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자,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대체 여기에는 왜 계신 겁니까?"
황보효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물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었다.
화씨일문에서 짜이찌엔한 사람이 대체 뭐가 어떻게 돼서 이 호남까지 와서 마교도들이랑 엮이고 있는지, 나로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상상도 가질 않았던 것이다.
황보효선 일행과 충돌했던 마교 무인들 가운데에는 총단에서 파견나왔던 무사가 끼어있었던 모양이라, 다행히 황보효선의 얼굴을 알아본 덕분에 살인멸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임신한 영호경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뭣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신 황보효선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참고로 영호경은 기척을 죽인채 바로 문 앞에서 살짝 문을 열어두어 전음으로 대화할 수 있게만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으로 가셨던게 아니었습니까?"
"...갔었지. 그리고 여기에는 임무로 왔을 뿐이다."
어쩐지 거짓말 같은데...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흔들어서 말실수를 유도하기에는 영 쉽지 않아보였다.
"그보다, 자네야말로 대체 뭔가?"
"무슨 말씀입니까?"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여기에 있는 수많은 고수들! 이들은 모두 마교도가 아닌가!"
잡혀온 주제에 기죽지 않고 화를 내는 모습은 과연 황보효선다웠다. 솔직히 나 같으면 똑같은 상황에서 이런 배짱을 부리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뭐가 문제지?
"자네는 분명 내게 말했지? 정사파가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겠다고 말이야!"
"예, 그랬었죠."
"그런데 이런 곳에, 이렇게나 많은 마교의 고수들을 침투시켜놓고서 내게 정녕 할 말이 없단 말인가?"
황보효선이 불길이 이글대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나서야 나는 그녀와 나의 인식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내가 볼 때나 편리한 쿠팡맨들이지 얘가 봐서는 마교 고수 집단으로밖에 안 보이겠다.'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말이 쿠팡맨이지, 짐을 싸들고 달릴 내력을 손이나 무기에 담으면 즉시 무력집단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남들이 보기에는 오해고 나발이고 없다는 이야기.
[어떻게 할까요?]
[흐음... 어렵군...]
살인멸구라는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황보효선은 마교의 장기적인 미래를 보았을 때 가급적이면 살려두는 편이 유리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이유의 10퍼센트 정도고, 내 개인적으로는 황보효선이 꼴리는 밀프라는게 이유의 대부분이지만.
"변명이라도 좀 해보게! 자네는 말만 그럴듯하게 해서 나를 속인 것인가?!"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니 마교에서 실질적으로 경제침략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보니, 진실을 밝혔을 때 과연 설득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걸 어쩐다...?'
나만의 문제였다면 좀 더 결정이 쉬웠겠지만, 이건 내가 발안하기는 했어도 마교가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나는 문 틈으로 들려올 영호경의 전음이 언제쯤 들려올까 기다리면서, 황보효선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레이저를 견디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