컸다.
내가 봤던 여자들 중에서는 영호경이 그나마 키가 큰 편이었지만, 이 여자는 훨씬 컸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나보다도 손가락 한두마디 정도는 클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온몸이 다 크구나...'
덩치에 걸맞게 무지막지한 가슴과 엉덩이에 시선이 가는 것을 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빛을 바래게 하는 이 중년 여자의 놀라운 부분은 무려, 운절 영운자에게 반말을 툭툭 내뱉는다는 점이었다.
"영감, 분명 맹주가 불렀다고 하지 않았나?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나?"
"흠, 흠... 꼭 내가 갈 필요까지 있겠느냐? 곤륜의 상황은 비연이 네가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느냐?"
혹시나 배분이 높은 초절정고수인가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여자의 무공은 나와 동수거나 약간 위.
아까 끼어들었을 때의 경신법은 틀림없는 운룡대팔식이었으니 아마도 곤륜의 문하일 것이다.
하지만 배분에서도 무공에서도 밀리는 여자가 툭툭 반말을 내뱉는데도 영운자는 전혀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마교를 잘 몰라. 영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라. 영감이 없으면, 제대로 말할 수 없어."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비연이라는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영운자는 심심한 김에 날 따라온게 아니라 할 일도 내팽개치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무림맹과 관계있는 일을.
"이대로 따라오지 않는다면 장문인에게..."
"아, 알겠다. 가면 될 것 아니냐, 가면..."
비연이 협박조로 말하자, 영운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람따라 마음대로 사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장문인에게는 기를 못 펴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기 아이, 괜찮은가? 여럿에게 당하고 있던 것 같은데, 다친 곳은 없나?"
"...저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가 어쩌고 하길래 다급한 상황에서 나온 말실수인가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말실수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 다친 곳은 없습니다. 여협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다친 곳이 없다면 됐다. 그리고 너희들도, 대체 아이를 상대로 여럿이서 무슨 짓이냐. 선인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우렁우렁 울리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지자, 확연히 그 억양이 어눌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서 포권을 했다.
"부인, 저는 강윤이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으로나마 구룡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대단하군. 나는 곤륜의 용비연이다."
"그리고 내 제자이기도 하지. 비연이가 말이 부족해서 조금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해해주게."
역시나 그랬다.
설마 영감 운운하는 사람이 영운자의 제자일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아무튼 말이 서투른 탓에 반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대로였다.
"그랬군요.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너는 내가 두렵지 않나?"
"예?"
용비연의 물음이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두려워? 왜?
나와 마교도들의 내막을 모르는 상태로 끼어들기는 했지만 용비연은 나를 도우려 해주었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 내 표정에 담긴 생각을 알아보았는지 용비연의 눈이 둥글게 휘며 웃음을 지었다.
"남편 이후로 네가 두 번째다. 나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은 건."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교도들 쪽을 힐끔 보니 용비연에게서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금발에 파란 눈, 확실히 이 시대 아시아인들이 보기에는 괴상하게 보일만한 외모였으니 요괴나 도깨비쯤으로 낙인찍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저희와는 조금 다른 외모이긴 합니다만, 아름다우십니다."
"그, 그런가?"
용비연은 확연히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근육 있는 몸매에 어지간한 남자보다도 키가 컸지만, 원판이 워낙 좋아서 그런지 내 눈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용비연이랑 같이 올 것이지...'
애초에 그 자리에 용비연이 같이 있었다가는 영운자는 즉시 서안으로 떠나야했겠지만, 막상 며칠간 길동무를 해야했던 노인네와 미인 밀프를 비교해보면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큼, 크흠... 이제, 가야겠다. 이미 너무 늦었다."
"그렇습니까?"
잠시 후 용비연은 헛기침을 하며 이제 곧 출발할 것임을 밝혔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매어둔 말을 챙겨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내심 굉장히 아쉬웠지만 곤륜파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언제든지 찾아갈 기회는 만들어볼 수 있을터, 겉으로 아쉬운 티는 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용비연이 자리를 비운 틈에 영운자가 슬쩍 접근해왔다.
"인상적이었다네. 알려준 보람이 있구먼."
"...확실히 노선배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위험할 상황이 많았군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흐흐, 그렇지?"
영운자가 생색을 내는 꼴이 열받기는 했지만, 확실히 전혀 다른 느낌이기는 했다.
녹이 슬어 뻑뻑하던 자전거의 녹을 벗겨내고 윤활유를 칠한 것 같은, 내 몸이 매끄럽게 원하는대로 움직여주는 감각.
'어, 자전거? 팔아먹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체인이나 톱니를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로 사정도 걱정이고. 일단 아이디어로서 기억은 해둬야지.
"하지만 아직 멀었네. 내가 가르쳐준 것을 되새기며 거기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필요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지난 며칠동안 그와 동행하면서 귀찮은 일도 많았지만, 막상 헤어질 생각을 하니 시원섭섭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영운자의 가르침이 사실 굉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과, 훈훈하게 웃으면서 조언하는 노인의 웃음이 꽤나 그림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신법을 보고 뭔가 느낀 건 없었나?'
결국 이 노인네는 끝까지 '자네는 혈마의 제자였군!' 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침 주변에 인적은 없고, 저 마교도들이 청성의 제자라고 알고 있을 영운자 입장에선 내가 사부의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죽이든 제압을 하든 하는 쪽이 정상이니까 아마 못 알아본 것 같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살펴가십시오."
"감사는 무얼... 정 고맙다면 익힌 무공으로 강호의 평안에 힘써주게."
"물론입니다."
결과적으로 무공도 증진되고 사부와의 연결점도 들키지 않았다.
그 사실에 나는 마음이 편해져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고 영운자 또한 그답지않게 강호의 대선배다운 면모를 보이며 하얀 수염을 쓸어내렸다.
역시 종종 요상한 짓거리를 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그도 정파인. 강호의 평안에 힘써달라는 말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있었다.
내심 감탄하면서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이, 용비연이 자신의 말을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영감, 이제 간다."
"그래, 알았다."
짧은 대답과 함께 훌쩍 말 위로 뛰어오른 영운자는 고삐를 잡고 천천히 말을 몰아서 멀어져갔다.
마침 해도 지고 있어 꽤나 그림이 되는 구도였기에 묘한 감상을 품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갑자기 영운자의 말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런데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말이야."
영운자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입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자네 신법을 본 적 있었다는 말, 거짓말이었네."
역시 엿같은 노인네였다.
"영감, 정말 저대로 두고 가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것은 또 무엇이냐?"
용비연은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청성파 문도들에게 충분히 엄포를 놓고 오기는 했지만, 언제 또 상황이 어긋나서 맞붙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영운자는 천하태평이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에서 맞선다면 저 다섯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아이가 맞서지 않고 달아난다면 저 다섯은 절대 그 아이를 해할 수 없느니라."
"...안 달아날 것 같은데."
"달아난다. 무조건."
영운자가 본 강윤이라면 틀림없었다. 젊은 무림인 특유의 호승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라면,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잡배에게도 간단히 숙여주는 그라면.
하지만 영운자와는 달리 강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용비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흐음, 그 아이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로구나. 그런데 그 나이를 먹어서 남편 아닌 남자를..."
"그, 그런 건 아니다!"
용비연은 기겁을 하며 영운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20년도 더 된 소녀 시절, 해적에게 납치당해 여기저기 팔려다니며 중원까지 흘러온 그녀를 구해준 것이 바로 영운자였다.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 떨어져 하루하루가 불안하던 와중에도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영운자와 그의 제자였던 지금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운좋게도 무공에 재능이 있어 상당한 경지까지 익힐 수 있었고, 이젠 마음만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의 고향은 곤륜이었다.
그저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뿐인데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아이를 보니 친근감을 느꼈을 뿐, 외도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냥, 아들? 아들 같아서 한 말...!"
"농이니라."
아들이라는 익숙치 않은 단어를 발음하던 용비연은 영운자가 농이라며 실실 웃자 열불이 치밀었다.
이렇게 묘하게 사람을 긁는 부분이 아니었다면 좀 더 존경할만한 스승이었을텐데, 배분이 미치지 못하고 무공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계속 이 문제로 이야기가 늘어져봐야 그녀만 손해였으니, 용비연은 대화의 물꼬를 살짝 틀었다.
"영감, 사천에서는 뭘 구경했지?"
"구경이라고 할 것이 있겠느냐, 그저 바람따라 적당히 돌아다니다보니 그 아이를 만났고, 그 다음부터 동행하며 길동무 노릇을 조금 했을 뿐이니라."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던 탓에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했던 강윤이 들었더라면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겠지만, 영운자는 천연덕스럽게 '길동무 노릇을 했다' 라는 한 문장으로 여정을 정리했다.
하지만 용비연에게는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 아이를 보려고 갔던 건 아니고?"
용비연이 아는 영운자는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약속을 내팽개칠 정도로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연히 그렇게 도망나왔다가 강윤을 만났다는 것보다는, 어떤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상태에서 애초부터 그를 만나기 위해서 용비연을 따돌렸다고 하는 편이 훨씬 앞뒤가 맞는다.
"글쎄... 어떨 것 같으냐?"
하지만 용비연이 영운자에게서 얻어낼 수 있던 대답은 그의 얼굴에 걸린 함박웃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