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그렇구나. 잘 알았다. 고생했구나."
영호경은 서신 건너로 시선을 보내며 바짝 얼어붙은 모습의 남자, 형완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고생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것 또한 본교와 소교주를 위한 일! 오히려 소교주께 도움이 되었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그, 그런가?"
형완은 꽤나 무리해서 서둘렀는지 그 입성이 말이 아니었다. 곳곳이 찢어지고 흙먼지가 묻은 옷 때문에, 거적을 쥐어주고 길바닥에 앉혀놓으면 딱 어울릴 모양새.
그래서 얼마간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이었는데 도리어 당사자가 아니라며 부정해오니 영호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잠시, 영호경은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서신 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는구나.'
올 것이라는 연락은 진작에 받은 상태였지만, 지척까지 다가왔다고 하니 새삼 재회가 기대되었다.
이상한 불청객이 끼어들어서 좀 더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 같지만, 그 정도는 별 일 아니었다.
"이 서신에 적힌 내용은 알고 있나?"
"예, 대강은..."
"그렇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군. 지금부터 인원 배치를 변경한다. 본단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 다수를 외부로 배치할 수 있도록 하게."
"예...?"
"그동안 나는 안가에서 지내고 있을테니, 지휘는 네게 맡기겠다."
본래대로라면 영호경은 현재 상단에 자리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최고수.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만큼 마기마저도 완벽히 감출 수 있기에 굳이 모습을 숨길 필요는 없지만, 현재 그녀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호경이 불룩 솟아오른 자신의 배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는 모습에서 얼른 눈을 돌리면서 형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외, 외람된 말씀이오나, 명에 따르기가 어려움을 용서해주십시오."
"...무슨 말이냐?"
"실은 보고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만..."
이어지는 형완의 보고에 영호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명교 역시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인만큼 모든 일에 수장의 승인을 받아서야 일이 되질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완은 무려 절정고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그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마땅히 그녀에게 사후보고라도 올라왔어야하는데 영호경은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잠시 손을 떼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몸이 불편해졌기 때문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강윤이 제안한 물류업은 상당히 평이 좋아 순조롭게 세를 확장해나가는 중이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배가 부른 그녀가 수하들의 일을 일일이 감독할 정도로 위급한 사안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녀가 물러난 사이 벌어진 일.
'그저 날 배려해서라면 좋으련만...'
영호경은 수하들의 충성을 믿었지만, 이미 강윤을 통해 정파의 일부가 은령회와 내통하고 있음을 안 이상 명교 역시 마냥 안일하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한 번쯤은 흔들어보는게..."
"예?"
"아니다. 잘 말해주었다. 추후 자세한 내사가 있을 것이나, 우선 네게는 원래의 권한을 회복하고 무인들을 인솔할 것을 명하겠다."
"예... 예!"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휘하의 무인들을 이끄는 상태로 그녀의 시야 바깥으로 벗어난다면 분명 그 틈에 꼬리가 잡힐 위험이 큰 일을 해치우려 할 터.
'모처럼 편지 심부름 이외의 일을 맡기게 되겠구나.'
"그렇다면 경로는 자유롭게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단, 웬만하면 네가 지나온 여로를 피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이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라 일러라."
"예, 소교주."
영호경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나는 형완에게 가볍게 손짓하고는, 흉흉하게 치켜올라가는 눈매를 억지로 내리깔고 짐짓 뱃속의 아이에게 '어미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라며 되뇌이는 것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것 맞습니까?"
"허, 고얀 친구로세. 내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일렀거늘."
몇 번이나 일을 꾸민 주제에 당당하게 지껄이는 영운자의 목소리가 아니꼬웠지만 이번만은 영운자에게는 죄가 없었다.
[강 소협이라고 하셨소? 미안하지만 잠시 이대로 대치하는 시늉이라도 해주시오.]
[...어쩔 수 없군요.]
"잠시 짐을 확인해보겠다는데 어째서 저항하는 것이냐? 근자 들어 수상한 무리가 암약하고 있어 확인만 할 뿐이라 하지 않았느냐!"
"여러분이 포쾌입니까? 지나가는 사람의 짐을 다짜고짜 뒤지겠다고 할 권리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놈이 그래도!"
영호경의 뜻을 전하러 온 정파의 무공을 익힌 마교 무인들은 오로지 내게만 기세를 집중시키며 일갈했다.
사정이 어찌 된 것인고 하니, 영호경은 내 연락을 받고 즉시 휘하에 데리고 있던 마교 무인들을 흩어버렸다고 한다.
너무 대규모로 이동하면 금방 움직임이 포착될테니 현명한 결정이었고, 인적이 드문 루트로 이동하라는 지시 역시도 훌륭했다.
'문제는 우리 쪽이지.'
영운자의 무공 강매를 은근슬쩍 받아들이던 중,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길을 위주로 이동하다보니 그들 중 한갈래와 상당히 가까운 위치까지 접근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저 최단경로로만 갔어야했는데, 인적 드문 곳을 찾다보니 마침 인적 드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을 그들과 접근하기 일보 직전.
마침 내게 소식을 전하러 접근했을 정파 에디션 무인들은 그들과 조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눈깔이 뒤집힌 시늉을 하면서 내게 고래고래 시비를 털어대는 상황이었다.
"떳떳치 못한 것이 있어 감추는 것이 틀림없구나! 이 악적들 같으니!"
[미안하네, 강 소협. 우리가 당하는 시늉을 할 것이니...]
"하! 그리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수상하군요! 혹시 녹림에서 새롭게 써먹는 수법입니까?"
[안 됩니다. 제대로 덤벼주셔야됩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못 들으셨습니까?]
아, 느껴진다. 뒤통수에 꽂히는 기대어린 시선이.
이 영감탱이, 결국 내가 거하게 한 판 붙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겠지. 아마 머릿속으로는 춤이라도 추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 영감이 보고 있는 이상 짜고치는 고스톱을 했다가는 금방 들킬 것이 틀림없었다.
'무공을 드러내는 건 역시 조금 꺼려지지만... 너무 숨기는 티를 내면 오히려 나중에 들켰을 때 안 좋게 작용할 수도 있어.'
한편 내 말을 이해했는지 지금껏 고함을 지르던 마교도는 검을 내게 겨누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녹림...? 네놈이 지금 나를 모욕한 것이냐?"
"다를 것은 또 무엇입니까? 산에서 도적질을 하는 자들을 녹림이라 하는 것이니, 도적이 아니던 사람이라고 해도 도적질을 한다면 녹림이라 봐야겠지요!"
"이놈...!"
검에서 푸른 검기가 피어오르며 무인은 거리를 급격하게 좁혀오기 시작했다.
[소협, 내가 익힌 검법은 청성의 청운적하검일세. 검에는 눈이 없으니, 조심하게나.]
그렇게 말해줘도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청성의 검법이라고 해봐야 요정립이 쓰던 칠십이파검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해보니 전혀 결이 다른 검법이라는 것이 확연히 전해져왔다.
도도하게 풀려나오는 검로는 쾌검인 칠십이파검과는 달리 매끈한 경로를 그리며 내 옆구리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흘렸다.
그리고 연이어 손바닥을 뒤집어 장력을 떨쳐내자 단숨에 튕겨나간 검은 간신히 남자의 팔에서 부르르 떨리며 머물렀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날카롭게 다듬은 지풍을 허벅지를 향해 쏘아냈다.
'어, 너무 빨리 쐈나?'
텅
정말 그대로 부상이라도 입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그 사이에 끼어든 도가 지풍을 장작패듯 내리찍어 흩어버렸다.
"고, 고맙네!"
"방심하지 말게. 상당한 고수야."
음, 저희 이거 짜고 치는 것 맞죠?
도객에게 고마움을 표한 다음 검수의 눈에서 한순간 투지가 불타고, 이번에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그려지는 검로는 그 머뭇대는만큼 도리어 시원스럽게 뻗어나가는 기세를 잃어 위력이 덜했지만, 대신 조금 더 까다롭다.
거기에 이번에는 그 도객까지 끼어들어서 도를 휘두르기 시작하는데, 묵직한 도가 너울너울 춤추다 마치 벼락처럼 내 어깨에 내리찍히는 움직임은 상당히 음산하고 절묘했다.
'나보다 경지는 아래지만...'
바짝 긴장한 두 사람의 공격은 결코 얕잡아볼 것이 못 되었다.
일단 뻗어오는 일도와, 그것에 반응하는 순간 생기는 빈틈에 찔러올 검격.
만약 길을 떠나오기 전의 나였더라면 내력을 우겨넣은 일격으로 맞상대하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아니! 어떻게...!"
"큭...!"
벼락같이 떨어져내리던 일도를 피하고, 피한 순간 찔러오는 검격을 다시 한 번 흘려보내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이 다르다. 한 번 동작을 취한 다음, 이후 동작으로 넘어가는데 생기는 빈틈이 훨씬 작아진 것 같은 이 감각.
'저 영감이 히죽대는 꼴만 눈에 안 들어왔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로 정리하자면 '그래, 이놈아! 써보니까 좋지? 좋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영운자의 득의양양한 웃음.
못 볼 것을 본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깟 녀석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저 자, 보통이 아닐세. 신중하게 쳐야해."
상대가 하나 늘었다.
어, 저기, 정말 마교도들 맞으신거죠?
다시 없을만큼 진지한 그들의 태도에 나는 그들이 진짜 청성파 소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전음을 보낼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영운자는 사내가 보이는 춤사위에 흡족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 지적하자면 하루 밤낮을 꼬박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르침을 준지 며칠만에 보인 성과로는 제법 준수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노 방주가 손을 쓴 것인가...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눈요기는 제대로 하는구먼.'
역시 사내가 선보이는 신법은 곤륜의 것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 고절한 신법이었다.
언뜻 상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움직임이 완성되는 순간 구궁의 이치에 따라 비어있는 하나의 방위를 만들어내 신형을 그 곳으로 빼내게 만드는, 더없이 도가의 이치에 충실한 신법.
상당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청성의 사람들 역시 목숨을 취할 기세는 아니었기 때문에 영운자는 느긋하게 사내의 신법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놈...! 지금이라도 사죄해라!"
상대는 셋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나마 사내는 버텨내고 있었다. 검과 도를 권장법을 동원해 걷어내고 빈틈을 노리고 쏟아지는 지력은 피하거나 여의치않을 경우 각법으로 격파하는 움직임은 아름다운 춤사위라고 할만했다.
상대는 전부 다섯. 아마 넷부터는 조금 위험해질테니 그가 좀 더 긴장할 필요가 있겠지만, 영운자는 사내가 자신이 베푼 가르침을 빠르게 체화해나가는 것을 보며 기대감을 높여나갔다.
'기재로다, 기재야...'
물론 그 자질로만 말하자면 부족한 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 큰 틀은 지키고 있되, 세밀한 부분에서는 도리어 그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의 깨달음이란 마치 옷처럼 개개인에게 차이가 있는 것. 왜소한 체격의 영운자에게는 안 맞는 것이, 당당한 체구의 강윤에게는 맞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결국 셋으로도 부족해서 네 번째가 춤사위에 끼어드는 모습을 보고 영운자는 손에 땀을 쥐었지만, 그가 기대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놈들! 당당한 청성의 고수가 어찌 여럿이서 어린 아이를 핍박하느냐!"
내력이 짙게 서린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주변을 울리고, 멈칫한 네 번째 사내와 이미 어우러져 겨루고 있던 사내들과의 사이에 한 명의 사람이 끼어들었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청성의 선인들께서 이 모습을 보면 부끄러워하실 것 아닌가!"
"귀, 귀하는 누구시오?"
내력이 거두어졌음에도 우렁우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부여잡고 싶은 것을 참으며 청성의 무인들 가운데 하나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비호처럼 신형을 날렸다.
"찾았다, 영감. 어딜 또 가는 거지?"
육척 장신의 여인이 왜소한 체구의 노인의 앞을 막아서며 맹수처럼 웃는데, 머리칼이 노랗고 눈이 파란색이라 그 외양이 마치 낮도깨비 같았다.
주변인들이 숨막히는 얼굴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영운자는 어색하게 억지미소를 지었다.
"와, 왔느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달아나려던 좀도둑이 집주인에게 잡힌 것 같은 상황으로 비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