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실례했습니다! 귀한 분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괜찮습니다. 그럴만도 했으니까요."
접수원은 내 반응이 수상해서였는지 비상시에 당기도록 되어있는 줄을 당겨서 고수들을 불러모은 모양이었다.
나는 별 일 없었으니 됐다고 말은 했지만, 귀찮은 일이 생길 뻔한 것도 사실.
운이 좋지 않았으면 불려온 고수들을 모조리 때려눕혔어야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형완에게 감사를 담아 인사했다.
"대협이 여기 있어서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난처한 꼴을 당할 뻔했군요."
"어차피 내가 없었으면 한줌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 아니오?"
"제가 여기 싸우러 온 거라면 그렇겠지요."
다 박살을 내놓으면 어느 정도 말을 듣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협조를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로선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 녀석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미산에서 처음 하산한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사천에서 날 습격했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당해서 도망칠 때까지 반말을 찍찍 하던 녀석이 갑자기 하오체를 쓰는 것도 이상하고.
"저는 분명 형 대협께서 소... 그 분을 모시고 계신줄 알았는데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출장을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상 호출에 득달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 여기 시스템에 꽤나 익숙해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즉, 여기에 익숙해질만큼 오래 머물렀다는 뜻.
"흐흠, 별 일 아니오. 그보다 지부장을 만나게 해주지. 따라오시오."
"아니, 지부장은 이제 됐습니다. 그보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몸을 돌리려는 형완을 불러세우자 그가 우뚝 멈춰섰다. 당연하지만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을 그를 통해 연락을 넣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에 지부장은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내가 전할 소식은 일단 전해줄 사람만 있으면 용건 자체는 복잡하지도 않고.
"...젠장."
뒷목을 주물러대는 꼴이, 어지간히 상황이 안 좋아보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말로는 여기로 발령이 났느니 뭐니 하고 있었지만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대강 답이 나오는 것이다.
'좌천당했구나.'
일장로라면 마교에서 교주 다음가는 고수이고 그 직계제자라면 마교 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라고 볼 수 있었다.
무공도 연령대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라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줄 알았는데...
"인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각자가 많은 일을 해서 메워야할 일이 아닌가? 응? 말해보게!"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어색하게나마 쓰던 하오체가 날아가고 내게 따지고 드는데, 말만 들어보면 이 녀석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 같고 자세한 사정도 모르지만 어쩐지 이 녀석에게 잘못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있다.
"그래서 그 분께서 대협을 여기로 보내신 겁니까?"
"...아니, 그 분께서는 모르시... 오. 안 그래도 홀몸이 아니신데, 내 일로 근심하시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완을 좌천시킨 건 영호경이 아니라 그 아랫사람, 정확히는 형완처럼 총단에서 파견된 사람들 중에 고위직들끼리 의견을 모은 결과인 것 같았다.
본인도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일한 것 같기는 하지만 결국 행정직을 할 그릇은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도 의외로 소교주는 배려하려고 했나보네.'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내게 덤볐던 이유가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나중에나 알 수 있었다. 직접 맞붙어보면 알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나 뭐라나.
그런 단세포 주제에 영호경은 나름대로 배려하려고 하는게 마음에 든다고나 할까, 답답하다고나 할까, 애매한 기분이었다.
"대협, 저는 총단에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제가 총단에 가기 전에 꼭 전해야할 소식이 있는데... 대협이 전달해줄 수 있겠습니까?"
"음? 여기에서 총단은 며칠 걸리지도 않는데 직접 전하면 되잖소?"
"...제가 도착하기 전에, 전해야할 소식입니다."
형완은 내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해주자 형완은 표정이 요상해졌다.
"운절이라고?"
"예. 그러니까 도착하기 전에 장소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제 추측으로는 정파의 무공을 익힌 분들도 몇 명 계실 것 같습니다만 그 분들을 통해 연락을..."
"아니, 그보다 그렇게 길 가다 물건 줍듯이 오절을 만날 수 있는 거요?"
내 말이. 하지만 본인이 우연이라는데 어쩌겠어.
솔직히 석연찮기는 하지만 당장 급한 건 그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그보다 반드시, 제 쪽으로 보낼 사람은 곤륜의 무공을 익힌 자는 제외해주셔야합니다. 꼭 전달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자네 같은 사람이 곤륜에 있었나? 같은 소리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형완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분께 형 대협이 여기로 옮겨왔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위도 확실하게."
"...그건 어째서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수하가 옮겨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시면 도리어 더 상심하실 겁니다. 차라리 미리 말씀 올려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사실 영호경이 그 정도 일로 상심할 성격은 아니고, 그보다는 자기들끼리 속닥대서 사람 하나를 내보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자, 즉 교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마교에서 엄연히 다음대 교주로 내정된 사람에게 어떻게 자기들 마음대로 보고를 거를 수가 있어?
경위를 보고한 결과 형완을 내보낸 쪽이 털릴 수도 있고 반대로 형완이 털릴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내가 생각해줄 이유는 없었다.
"귀하는 정말로..."
"예?"
"아니, 아니오. 말한대로 하겠소."
형완이 뭔가 말을 하려다 도로 삼키는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내 말대로 해주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다. 따지고보면 자기들을 위한 일도 되는 셈 아닌가.
용건도 끝났으니, 나는 원래 여기 사람에게 들려보낼 예정이었던 서신을 형완에게 건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만하면 영운자 그 노인네가 나보다 먼저 들어오지 않았기를. 자기 용건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내 용건은 집요하게 캐물을 것 같으니까.
내 바람이 통했는지, 영운자는 내가 돌아간 뒤에도 제법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객잔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와 영운자는 객잔을 출발해서 길을 가다 어떤 야산을 넘기 시작했다.
야산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산이었기에, 말을 타고 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말을 끌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영운자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법의 기본이란 허리일세. 일반적으로는 쾌속한 움직임을 보이려면 다리에 먼저 내력을 보낸 다음 잔존한 내력을 허리로 보내는 방식을 많이 쓰지만..."
휘리리릭
영운자는 잠시 설명을 멈추고 신형을 날렸다. 확실히 쾌속하면서도 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움직임.
"이렇게 허리에 미리 3할 정도를 배분하는 것이 더욱 안정적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게 해주지. 물론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체격이 다르니 비율은 조금 다를 수 있네."
"...그렇습니까?"
나는 몰래 내력을 움직여 허리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면서도 겉으로는 평범하게 걸었다.
확실히 안정감이 있는 것이, 실제로 신법을 써봐야 정확하겠지만 아마도 쓸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는 노선배께 더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괜찮네. 자네는 그냥 듣고만 있어도 상관없어."
자기는 가르치는게 아니라 그냥 혼자서 떠들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눈에 밟히는 놈들을 상대로 일부러 시비를 걸어대서 내가 무공을 쓰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어온 건가?'
사실 내가 영운자의 제안을 망설임없이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가르침이라는 것에 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컸다.
당장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부야 그렇다치더라도 팽연화나 언소영에게 배워도 충분한 것이다.
나는 대외적으로도 팽연화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있으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후하게 가르침을 베풀더라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이게 엄청나게 쓸만하다는 건데.'
실제로 써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나도 절정고수다. 체내에서 내력을 움직여보면 그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파악할 능력이 된다는 소리다.
아마 지금껏 팽연화나 언소영이 알려주지 않았다는 건 초절정이 된다고 다들 손에 넣는 노하우는 아닐 것이다.
신법으로 인정받는 운절 영운자이기에 가능한, 막상 알고나면 대단치 않지만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요령이 분명했다.
"결국 신법이란 최종적으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완벽하게 아우를 수 있어야 제대로 익혔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하체만의 움직임이 아니라네."
문제는 그런 개꿀팁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주자, 내 속이 은근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난 이런걸 원한 적이 없다. 이건 틀림없는 팩트였다.
하지만 저렇게 하나하나 알려주면서 실제로 눈앞에서 시연까지 해보이니, 마음이 동하는 것이다.
'강매당하는 기분이네.'
내가 언제 가르쳐달랬느냐고 쿨하게 무시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형체없는 부채는 오히려 사람을 더 골치아프게 옭아매기 마련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얼마를 빌렸고 얼마를 돌려주면 채무가 사라진다고 명시적으로 써있는게 낫지.
"꽤 부담스러운 모양이군? 내 말하지 않았는가. 그냥 듣기만 해도 상관없네."
애매한데.
생긴 것 하나는 선풍도골 그 자체인 영운자가 허허롭게 미소짓자, 솔직히 나는 겉으로는 도저히 이 노인에게서 수상함을 읽어낼 수 없었다.
"내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러모로 방식이 석연찮았던 것은 사실일세. 그것은 진정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이해하게. 뛰어난 후기지수를 보니 늙은이의 주책이 심해졌음이야."
영운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정 부담스럽다면, 요 며칠간 자네에게 폐를 끼친 것을 갚는 거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더이상 자네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걸세."
실제로 속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사과하고 노선을 틀어버리니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굴 만나고 왔길래...'
내가 지난 며칠간 봐온 영운자는 이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렇게 행동하라고 훈수를 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이런 식의 접근이 내게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만한 누군가가.
'근데 그런 사람이 누가 있지?'
내 여자들을 제외하면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여기로 갑자기 나타나서 영운자를 만날리는 더더욱 없고...
'너무 생각이 지나쳤나?'
단순히 방법을 바꿔본 것뿐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시비를 걸고 일을 벌여도 내가 피해가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고민해본 결과, 나는 그냥 영운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호의를 강요당하면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이것을 빌미로 어떻게 엮일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은 들었다.
하지만 운절 정도 되는 배분을 가진 인간이 이렇게 숙이면서까지 베푸는 호의를 별다른 이유도 없이 거부하기에는 내 입지가 아직 너무 좁은 것이다.
'어차피 영호경에게 연락은 했으니까, 이제 마교 쪽 걱정은 덜어놔도 될 거고.'
도착한 다음 별게 없으면 이 인간도 떨어져나가겠지.
나는 그것만을 기대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