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58화 (358/383)

해가 서서히 기울어 하늘 한쪽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갈 시간.

혼자 남은 강윤이 어떻게 하면 영운자를 쫓아낼 수 있을지 객잔의 침상에 누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노희방은 객잔의 방에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운절 대협. 개방을 책임지고 있는 노희방이라 합니다."

"으음, 오랜만일세."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희방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영운자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방주가 꽤나 자네를 좋게 평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네. 최고의 고수는 되지 못할지언정 최고의 방주가 될 수 있는 아이라고 말이야."

"부끄럽습니다."

제법 관록이 붙어 원숙함을 뽐내는 노희방으로서도 까마득한 배분의 고수에게 듣기에는 수줍어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 사이 영운자는 주변을 둘러보고 두 사람의 여인이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운절 대협. 무림맹의 황보효선이라 합니다."

"아미의 몽아입니다."

"흐음... 뒤를 따르던 것은 이렇게 셋인가?"

영운자가 알아차렸을 것이란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녀들이 영운자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어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뒤를 밟히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분위기가 얼어붙은 사이, 노희방이 앞으로 나섰다.

"먼저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협. 대협께서 강 소협과 동행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지라..."

"아, 그건 괜찮네. 몰래 뒤를 따르는데 허락을 구하라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내저은 영운자는 곧이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뒤를 밟았다는 것은 자네들도 그 친구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대협께서도? 역시 원래 인연이 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대체 그런 괴물딱지를 누가 키웠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는 자가 없어서 말일세."

"괴물... 말씀입니까?"

노희방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 소협은 대협께서 그리 평가할 정도의 고수입니까? 나이를 고려한 말씀이시라고 해도..."

강윤은 분명 후기지수 가운데에서는 손꼽힐 정도의 고수였다. 구룡이 될 당시보다도 훨씬 발전한 무공은 중년의 절정고수들과도 충분히 맞상대할만했다.

화씨일문주의 아우인 화운천의 증언으로는 틀림없이 그 자신보다 우위라고 하였으니 절정 중급 정도는 될 터.

하지만 그 정도의 고수는 한 세대에 한 명 정도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무림이었다. 당장 황보세가의 황보강이나, 젊은 남궁세가주 남궁학 같은 경우가 있지 않던가.

'그 정도를 괴물이라고 칭하기에는...'

"그 친구의 내력이 도문의 내력임은 노 방주도 알겠지?"

"예, 대협."

"하지만 그 내력이 얼마나 정순한 내력인지 알아볼 수 있다면, 자네도 분명히 똑같은 평가를 내릴 것일세."

"예...?"

"우리 곤륜 같은 도문은 축기가 늦다는 한계를 넘기 위해 연단법으로 내력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먹이고 있다네. 알고 있겠지?"

"예, 대협. 아... 설마?!"

노희방은 눈을 크게 떴다.

일반적으로 도문이나 불문의 내력은 본래 그 성장이 끔찍하게 느린 대신 그 정순함이 다른 심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정순한 내력으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면 어지간한 사술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력 역시도 같은 수준의 보통 내력에 비하면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야.'

제 아무리 천재라도 내력이 쌓이는 것이 느리면 무공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도문이나 불문 계열 문파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아무리 도를 추구한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무력에서 밀리는 것을 두고볼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심법을 뜯어고쳐 정순함을 포기하는 대신 축기를 빠르게 만들거나, 영약을 복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나마 후자의 경우 도문 내공의 정순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약간이나마 손색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귀한 영약을 아무에게나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대문파의 촉망받는 제자에게나 가능한 방법.

하지만 영운자의 말에서는 강윤이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방법도 취하지 않았다는 어감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이어지는 말로 사실로 확정되었다.

"영약을 먹지 않고 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내력을 수련한 것인지, 뭔가 다른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네. 더없이 정순하면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력한 내력..."

꿀꺽

"아마 상당한 고수에게 사사했을 것이 분명하네. 나는 30년쯤 뒤에 그 친구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소식을 듣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야."

여인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강호에 몸담고 있는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초절정고수 가운데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세 사람을 천외삼존이라고 부르며 동격에 두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혈마 이자성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가 천하제일인이기 이전에 악독한 색마이기에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뿐.

반대로 말하자면 색마 따위를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할만큼 그 이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잠깐, 색마...?'

황보효선은 중독된 마기를 치료해준다는 핑계로 마교 총단에서 강제로 범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잔뜩, 잔뜩 싸줄게요...! 내 정액 받아들여...!>

불덩이 같은 양물에 정절을 유린당했던 그 감각마저도 기억나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짓눌러 지워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가 혈마의 후인이라면 응당 혈마의 진전을 이었을 것이고, 모르긴 해도 무시무시한 마공을 익혔으리라. 그토록 청량한 내공이 아니라.

그렇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불식시킨 황보효선은 또다른 의문을 꺼냈다.

"대협, 하지만 맹주께서는 제게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미묘한 차이일세. 무공의 경지와는 상관없이 동질의 내공을 익힌 자, 그것도 초절정에 들어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차이이지."

화산파의 검절이 있었다면 분명 알아봤을 것이라는 영운자의 말에, 노희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운절 대협께서는 그가 장래 정파의 기둥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강호를 도탄에 빠뜨릴 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동행하고 계셨던 겁니까?"

"...음? 그건 전혀 아닐세. 그냥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서 따라가는 것뿐이야."

"예...?"

"그러니까 말일세..."

그리고 영운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노희방의 얼굴은 서서히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영운자가 말하길, 무림맹주로부터 부름이 있었다고 하였다.

맹주의 서신에는 '작금의 상황에 만약 마교가 중원을 노린다면 실로 안과 밖에서 적을 맞이하는 셈이니, 만약 일이 벌어졌을 때 곤륜 홀로 얼마나 마교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모처럼 곤륜 산자락에서 무림맹이 있는 서안으로 걸음하는데, 곤륜산이 있는 청해에서 사천은 지척이라.

조금 길을 돌아가는 셈치고 잠시 사천 구경이나 하러 나왔는데 굉장한 애송이를 만나버린 탓에 호기심이 생겨 동행하기로 하였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맹주께는 연락을 하셨는지?"

"비연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을게야. 내가 없으면 없나보다, 하고 먼저 길을 갈 아이니까."

말하는 양을 보아하니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 세 여인의 마음 속에서는 눈앞의 노고수에 대한 존경심이 초봄의 눈처럼 희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운자는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이만하면 내가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네. 추후로도 자네들이 내 뒤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어라 할 생각이 없는데 말일세..."

"..."

"실은 내가 이리 찾아온 것은 자네들에게 도움을 청해볼 수 있을까 해서 온 것이네."

"도움... 말씀입니까?"

지금쯤 서안으로 향하고 있을 곤륜의 용비연을 찾아 소식을 알릴 생각을 하던 노희방은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사내와 동행하고 있을 뿐인 영운자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 것인지, 얼른 짚이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 친구와 동행하면서 시비를 일으킨 것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네."

"예, 보았습니다."

꿀꺽

"상당히 고절한 신법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도통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더군. 그래서 싸움을 붙여보았네만, 도무지 넘어오질 않아."

"예...?"

노희방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강호에서 남몰래 알음알음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타 문파의 무공을 탐색하려고 드는 것은 무례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같은 문파도 아닌 그녀 앞에서 꺼낼 말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노희방이 잠시 당혹감을 얼굴로 드러냈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으리라.

"뭔가 뾰족한 수가 없겠는가? 그 친구가 알면서도 걸려들만한..."

노희방은 노인의 정체가 운절 영운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가 강윤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행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절 정도의 고수라면 그녀들이 뒤를 밟고 있음을 모를리가 없는데, 강윤이 그녀들을 알아챈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영운자가 그녀들의 존재를 강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강윤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 괴상한 녀석이 아닌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네만 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면 사람이 구름같이 몰려들 것인데..."

하지만 막상 영운자의 눈에서는 경계심은커녕 호기심만 잔뜩 읽히는 것을 깨달은 노희방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기계적으로 노인의 말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영운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점소이를 불러 이 근방에 운가상단 지부가 있는지를 물었다.

운가상단은 불법적인 경로로 형성된 자본이 많고 정파나 관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는 지부의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 곳 저 곳 확장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제법 큰 마을인 이 곳에도 지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다행히 빗나가지 않았다.

'그 노인네를 쫓아내는 건 일단 포기해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우선 마기를 보유한 사람을 모두 치워두라고 급하게 연락을 보내는 편이 차라리 더 안전하겠지.

"총단에 말씀입니까...?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총단의 어느 분께 전달해드리면 될지?"

하지만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시 골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영호경에게 받은 옥패를 보여주어도 접수원이 도무지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원래 그녀가 내게 이것을 줄 때는 당연히 상단의 총단까지 찾아가서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오히려 조금 큰 정도의 마을에 있는 지부에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혹시, 지부장을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용무를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지부장 정도라면 알아볼까 싶어서 물었지만 갑자기 용건을 선회하자 접수원은 내게 경계심 어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워낙 걸리는 문제가 많았다. 정파 후기지수인 내가 마교 소교주에게 연락한다는 사실을 오픈하기에 이 사람은 너무 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대신 댈만한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말씀드리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군요. 보여드릴 것이 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접수원은 천천히 일어나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 걸음걸이가 너무 느려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가려면 빨리 가던가... 아니, 잠깐?'

"잠깐...!"

콰당

사사사삭

접수원의 눈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급속도로 접근하는 기척과 함께 사방팔방에서 무사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일류가 소수, 대부분이 이류인 구성이었기에 내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조금 늦게 접근해오는 기척 하나에 정신을 집중했다.

'절정고수?'

나보다는 조금 아래인 것 같지만 만약 이 많은 숫자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유기적으로 공격해온다면 꽤나 골치아플 수가 있다.

"이노옴! 감히 본교... 아니지, 우리 상단에서 무슨 행패를 저지르려는 것이냐!"

"어, 당신..."

"잔말말고 덤벼라!"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외침과는 전혀 다른, 음유한 지력이 날아오는 것을 한 차례 장력을 휘저어 흩어버리자 상대는 잠시 주춤했지만 즉시 짧은 단검에서 뻗어나오는 검기로 내 상반신의 요혈을 노려왔다.

"이, 이놈이!"

하지만 나는 검기는 상대하지 않고 각법으로 상대의 다리를 쓸어갔고, 기세가 절반 이상 날아간 검기는 허무하게 표적을 잃고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영환 대협 아닙니까!"

"내 이름은 형완이다! 아니, 그보다 네놈이 내 이름을 어떻게..."

기죽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려던 영환, 아니 형완은 잠시 멈춰서더니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네놈은...!"

아니, 알아봐준 건 고마운데 삿대질은 하지말고.

그래도 혈마의 제자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만해도 감지덕지일까? 나는 경악하며 입을 뻐끔대는 형완을 보고 그래도 조금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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