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57화 (357/383)

"바, 방주... 정말 괜찮은 겁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원래 주변에 녹아드는 방법의 기본은 당당해지는 거니까요."

노희방은 대수롭지 않게 술을 따라서 잔을 기울였지만, 황보효선이 보기에 그녀들은 너무 눈에 띄었다.

당장 구성만 봐도 그렇다. 여승, 여자 거지, 대검을 멘 여고수. 이런 모습으로 대체 누구의 뒤를 밟는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두 여인이 옷을 갈아입어주었더라면 그녀도 자신의 독문병기를 어떻게든 감춰보려고 했겠지만, 일행의 구성은 그녀가 검을 감춘다 한들 어떻게 눈에 띄지 않을만한 조합이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황보 여협께서 몽아사태를 처음 보았을 때 순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죠."

"그, 그 얘기를 어째서 지금..."

황보효선이 살짝 몽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몽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요점은 주의력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무림인의 주의력이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나 기척에 할애되기 마련이고, 그 부분을 조심하기만 하면 도리어 일반인보다 둔감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듯하면서도 꽤나 설득력있는 말에 황보효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그 말로부터 또다른 문제점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따라갔다가는 강 소협은 몰라도 운절 대협께는 무조건 들키지 않겠습니까?"

그랬다.

강윤의 무공 경지가 아무리 일신우일신하며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아직 여기에 있는 여인들을 압도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조심하기만 하면 기척을 들킬 염려가 없지만, 운절 영운자의 경우 그 경지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

"이미 들켰을테니까요."

"...아니, 그러면...!"

황보효선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노희방이 검지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얼른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묵묵히 옆에서 음식을 먹고만 있는 몽아를 힐끗거렸지만, 황보효선으로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녀들 세 사람이 서둘러 사천을 떠나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한 것은 이틀 전, 사내가 여행길을 떠난 날이었다.

노희방이 추측했던대로 강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사내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황보효선은, 노희방이 그의 뒤를 쫓겠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실 황보효선 자신도 강윤에게서 직감적으로 수상한 구석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튼 '의도적으로 명성을 쌓으려고 상황을 조작했을 수 있다' 라는 노희방의 의심은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

<몽아사태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이미 그보다 더 전부터 그 자들과 연이 있다는 모양이더군요. 어쩌면 지금 자리를 비우는 것은 더 큰 심모원려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황보효선이 모르는 사이 몽아 역시도 사내와 만난 적이 있었는지 뒤를 밟을 것을 은밀히 종용했고, 결국 두 사람이 가는 것을 내버려두기에는 불안했던 황보효선 역시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고 강윤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내는 여전히 뭔가 감추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했던 호언장담, 정사파가 중원에서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겠다는 그 말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그가 나아갈 길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어디 이 어르신의 주먹맛 좀 볼테냐!"

"아이고, 형장! 참으십시오! 제가 이렇게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내가 어디 틀린 소릴 했더냐? 제놈이 늦게 왔으면 응당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릴 것이지, 어찌 저 어린 것을 구박한다는 말이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루가 걸려 따라잡고 나니 사내는 이미 절대고수 가운데 한 사람인 운절과 동행하고 있었고, 그들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기만 하면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대체 운절과는 무슨 관계지...?'

이미 화절 팽연화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마도 마교 교주와 소교주와도 끈이 있을터인데, 운절까지 면식이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운절은 건달로 보이는 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치고 강윤은 그것을 옆에서 말리고 있으니 도통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황보효선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맥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걸까요...?"

건달로 보이는 자는 의외로 꽤나 단련한 흔적이 보이는 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준은 아마도 이류, 사내라면 손짓 한 번으로 그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을터.

그런데도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 황보효선의 눈에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노희방의 눈에는 달리 보인 모양이었다.

"글쎄요, 하지만 저기 저 점소이를 생각해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라면 강 소협의 선택이 현명하다고는 할 수 있겠군요."

"네...?"

술잔을 기울여 한 번에 잔을 비워버린 다음 노희방은 말을 이었다.

"결국 강 소협은 떠날 사람이고, 강 소협에게 보복을 할 수는 없을테니 저 자는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할 겁니다."

"아..."

"저 자를 죽이거나, 혹은 저 자의 패거리를 모조리 박살낼 생각이 없는 이상은 섣불리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괜히 손을 봐주려 했다가는 저기 저 점소이나 객잔 주인에게 자칫 해를 끼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노희방의 말을 듣고보니 과연 그럴싸한 이야기라, 황보효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나 다른 일반적인 무림인에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사내 나름대로 약자를 위해서 취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아.'

그리고 황보효선은 새삼 깨달았다. 강윤의 저런 일면이야말로 그가 정사파가 나란히 무림에서 공존하는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그 방식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황보효선으로서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써왔던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황보효선은 역시 이 두 사람과 동행하다가 여차 일이 잘못될 것 같다면 강윤을 감싸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앞의 닭국물을 비워버리는 것이었다.

"흐음... 내 그러고보니 그 자리에 남게될 사람들 생각을 하지 못했구먼."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결국 음식은 대강 급하게 먹어치우고 그 자리를 벗어난 나는 영운자에게 왜 그 한주먹거리밖에 안 될 상대에게 빌빌대야했는지 설명해주었다.

"확실히 모조리 뿌리를 뽑지 않는 이상 우리가 떠나는 순간 그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이. 자네 보기와는 다르게 생각이 깊구먼."

"과찬의 말씀입니다."

내 생김새에 대한 욕인지 머리에 대한 칭찬인지 애매한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갈았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건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피하고 있어도 그렇지 계속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대고, 당신 정말 도사 맞아?'

일반적인 무림인 인식이라면 그런 식의 충돌이 발생했을 경우 상대를 누르는 것이 기본인 모양이었다.

사파가 아니라 정파라도, 상대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뿐이지 절대 남에게 얕보일 수는 없기 때문에 거기서는 보통 안 참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나 승률이 100퍼센트에 가까워보일 때는 더더욱.

'응, 하지만 안 해.'

명색이 무림인인 이상 내가 수련하는 모습을 대놓고 훔쳐볼 수는 없을 거고, 아마 이렇게라도 일을 벌여서 내가 등룡보법을 쓰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미 처음 만났던 날 내 보법은 충분히 보여줬고, 몇 번쯤 더 보여준다고 해서 갑자기 뇌리에 벼락이 치고 기억이 떠오를 가능성은 별로 없기는 하다.

하지만 이 찰거머리 같은 노인네가 계속 따라오는 탓에, 나는 목적지가 가까워져올수록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데 굳이 이 노인네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준다?

머리에 총이라도 맞기 전에는 그럴 일은 없다.

"흐음, 허나 자꾸 그런 잡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여서야 자네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겠는가?"

"허명일 뿐이지요. 어차피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강호에는 많지 않습니까? 세인들의 눈이란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현명하니, 제 그릇에 맞는 평가를 찾아갈 뿐입니다."

어차피 강호에서 지금의 내 위치라고 해봐야, 조금 뛰어난 후기지수 수준.

절정 중급이라고 하면 사실 어딜 가서도 어깨에 힘을 줄 정도는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나이를 고려해서 소문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생각할테니까 그 정도가 적절할 거다.

게다가 내 이마에 내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난 철저하게 영운자의 기대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흐으음..."

과연 영운자는 더 할 말이 없는지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는데, 그 모양이 꽤나 통쾌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지.'

대체 곤륜산에서 사천까지 뭘 하러 왔길래 내 뒤만 따라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대로 길을 가다보면 곧 호남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니, 영호경을 만나기 전에 이 노인네를 어떻게 쫓아내야되나 골이 아픈 것이다.

방치했다가는 정말 끝까지 따라와서 손님 노릇까지 하려고 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바보가 아니고서야 다들 귀식대법이라도 써서 마기는 감추고 있겠지만 영운자쯤 되는 고수가 상대가 마교도임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다.

'몰래 연락이라도 넣을 수 있으면 내 목적지를 가짜로 만들어서 시간을 끌다 돌려보내면 되겠지만...'

당연히 연락을 넣을 방법은 없다. 괜히 마중을 보낸다고 수하나 내보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보게."

"예, 노야."

내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사이 생각을 끝냈는지 영운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날이 저물 것 같은데, 이 객잔에 머물 것인가?"

"...그래야겠지요?"

사실 해가 지려면 조금 시간이 더 있지만 급하게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서둘러봐야 이 노인네를 떨쳐낼 수 없다면 차라리 느긋한 편이 나았다.

"흐음, 그렇구먼. 그렇다면 여기로 돌아오면 되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잠시 만나고 올 사람이 있네. 금방 다녀올 것이니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나."

과연 영운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도망칠 수 있을까? 잠시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긴 나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알겠습니다, 노야. 다녀오십시오."

하다못해 이 노인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를.

나는 방을 잡고 나서 영운자에게 위치를 알려주면서 그저 그렇게 기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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