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절대고수, 내게 우호적인 상대일 가능성보다는 나를 적대하는 상대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상대가 정말 초절정이라면 섣불리 움직이는 것조차도 위험하다.
"이거 원... 젊은이를 너무 심하게 놀린 모양이로군. 긴장풀게."
꿀꺽
노인은 안심하라는듯 말했지만 코 앞에서 순순히 안심할 수 있을리가.
눈조차 마음놓고 깜빡일 수 없는 상황에서, 노인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마치 뭔가에 올라탄 것처럼 순식간에 치솟아오르는 노인의 신형의 반대쪽으로 몸을 틀면서 말에서 떨어져내린 나는, 즉시 장력을 뿌리려고 했지만 노인의 손이 더 빨랐다.
"윽...!"
"성질 급한 젊은이로세. 긴장풀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지법으로 두어차례, 오른팔의 하박을 얻어맞았을 뿐인데 찌릿거리는 충격과 함께 척택혈까지 넘어왔던 내력이 힘을 잃고 흩어진다.
그리고 그 손이 그대로 내 오른팔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나는 팔을 당기며 왼손 수도로 떨쳐낸다.
그 왼손은 바닥을 짚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깨로 성대하게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고, 나는 아파할 틈도 없이 튕겨일어나면서도 노인을 주시해야만 했지만 노인은 가만히 안장 위에 올라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장난이 심했던 듯하이. 이쯤에서 그만하지 않겠나?"
장난이 심했다?
그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에는 노인의 행동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접근했더라면 모를까, 그런 한줌거리도 안 되는 패거리를 상대로 도망치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내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노인이 지금까지 내 빈틈을 노려서 나를 해코지할 기회가 많았다는 사실 역시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노인은 끝까지 내게 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노선배를 알아보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 이 노인에게 날을 세워서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자 노인은 떨떠름하게 받았다.
"허, 나를 알아보았다고?"
"예, 곤륜의 운절 노선배가 아니십니까? 구름에 올라탄 것 같은 신법을 보고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허어..."
노인, 운절(雲絶) 영운자는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리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절대고수는 의외로 몇 없었다.
삼존은 다 본 적이 있고, 오절 중에는 권절, 검절, 운절, 사패 중에는 검패와 조패뿐이다.
검을 차고 있지 않으니 검절과 검패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있으니 소림승인 권절이 빠진다.
조패야 항상 호조를 차고 있지는 않겠지만 상대적으로 배분이 딸린다고 들었으니 좀 더 젊은 모습일 것이고, 마침 운절이 주로 사용할 신법은 곤륜의 운룡대팔식.
마치 구름에 올라탄 것 같은 움직임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초절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쫄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오는걸 보면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
"노선배께서 불초 소생을 어떻게 알아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난 자네가 누군지 모르네만. 대체 자넨 누군가?"
나는 얼굴이 확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았다. 먼저 접근한 주제에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자네를 보니 누군가가 생각날 것 같았는데, 정작 생각이 나질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란 말일세. 그런데 자네 신법을 보니 은근히 눈에 익던 참이었네. 자네는 어디 문하의 누구인가?"
"예...?"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고보니, 나는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운절 정도 되는 고수면 사부와 충분히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경악한 얼굴로 '아니, 그것은 혈마의 무공?!'이라고 외치면서 골통을 부수려고 덤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 그러고보니 아까 그 분들은 누구십니까? 곤륜의 문하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누구 말인가?"
물론 잡아떼기 위한 스토리는 사부와 미리 다 정해두었다. 나는 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 무공을 익힌 거고, 사부는 자신조차 몰랐던 동문의 존재에 경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순순히 대답하려니 조금 꺼려지는 부분이 있어서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다른 쪽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틀었다.
"아, 그놈들 말이로군. 나도 모르는 놈들일세. 부주의하게 전낭을 바닥에 떨구고 가기에 주워왔더니 그 난리지 뭔가."
"예?"
잠깐 인지부조화가 오는 것 같았다.
한편 영운자는 자기 잘못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던 아까와는 달리 세상 당당하게 말하기에,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노선배께서 그들에게서 금전을 부당하게..."
"예끼, 젊은 친구가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냥 바닥에 떨어진 거라니까.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주인이 어디 있는가 말일세."
그러니까, 훔쳤다는 거잖아?
'당신 도사 아니야?'
명백히 도명까지 가지고 있는 도사가, 당당하게 물건을 훔쳤다고 선언하는 상황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어허, 소형제. 인생 뭐 있는가? 얼핏 봐도 나쁜 놈들이 분명한데 그놈들에게서 돈푼 좀 뜯어온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말이야."
내 시선이 꽤나 따가웠는지, 영운자는 도리어 뻔뻔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선량한 백성들에게서 걷어온 것이 분명한데, 자기가 유익한 곳에 써주는 것이 피해자들에게도 더 나은 일이 될 거라며 큰소리를 치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밀프나 따먹고 다닌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오절씩이나 되는 인간이 남의 돈을 먹어놓고 이렇게 뻔뻔하게 나와도 되는 건가?
"허어엄! 그것 참, 말이 안 통하는구먼! 그러고보니 내 분명 먼저 물었을 것인데 왜 자네가 나를 추궁하고 있는 것인가? 어서 어느 문하의 누구인지 밝히게!"
분명히 내가 대답하기 불편한 내용을 피해서 억지로 대화의 흐름을 틀어버렸던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노인네도, 아무리 봐도 자기가 불리하니까 상황을 모면하려고 드는 것 같은데.
"특별히 사문이라고 할 것은 없이 스승 한 분께 무공을 배웠습니다."
"호오... 스승의 함자가 어찌 되는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속세의 이름 따위 알아서 무엇이 중요하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 주제에 너무 기어올라도 위험한 법이다.
순순히 대답은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셈이었는데 영운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정말 기막히게 영험한 도사처럼 보이기는 해서, 내심 혀를 내두르던 나는 노인답지 않게 맑게 빛나는 눈이 다시 나를 응시하자 바짝 긴장했다.
"흐음, 그렇구먼... 알았네."
지금껏 말안장 위에 올라있던 영운자는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마치 부유하듯 느릿느릿 바닥으로 내려섰다.
'더 얘기 안 해도 괜찮은건가?'
하긴 애초에 내 내력부터가 도문의 내력이니, 영운자 입장에서는 그저 흥미본위로 질문했을 뿐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마치 자신의 신법이 이 정도라는 듯이 과시하면서 내려오는 노인에게 나는 다시 한 번 포권을 하며 약간의 아첨을 곁들였다.
"곤륜의 신법이 구파 가운데에서도 손꼽힐만하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마치 감겨있던 눈이 뜨인 기분입니다."
"흐음... 그 정도는 아니네만... 어흠, 어흠..."
"노선배를 이렇게 만나뵌 것은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만, 소생은 지금 찾아가야할 곳이 있는지라... 아쉽지만 이만..."
"그렇구만!"
슬쩍 비위를 맞춰준 다음 얼른 말을 타고 여기를 뜰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영운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자네, 혹시 어디로 가는가?"
"예?"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불길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더럽게 꼬일 것 같은 느낌.
"내가 잘 생각해봤는데 말일세... 비록 내가 자네를 속인 탓이라고는 하지만 두 번이나 이미 자네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즉, 은혜를 입은 셈이란 말이지."
"전혀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도리어 제가 괜한 참견을 했을 뿐인데 건방지다 하지 않으시고 그 보답까지 하려 하시다니 노선배께선 실로 뭇 강호인들의 귀감이 되시는 분이라 하겠습니다."
실은 양아치들 주머니나 터는 노인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 회피기동을 시전했다.
"아니야, 아니야. 올바른 행동을 한 자에게는 마땅히 그에 걸맞는 보상이 주어져야하는 법이지. 아니그러한가?"
"과연 이르신 말씀에 그른 바가 없으나, 저는 타고난 성품이 용렬하기 그지없어 자칫 제 잇속을 채울 생각으로 거짓 선행을 하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니 노선배께서는 말씀 거두어주시지요."
"흐음... 허나 내 말 좀 들어보게. 내가 자네 가는 길에 동행하며 가르침을 베풀 것이야. 내 가르침을 받은 이는 곤륜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네."
역시.
"제게 그런 과분한 보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어허, 끝까지 들어보게. 물론 자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겠지만 내게도 득이 되는 부분이 다 있단 말이야. 내가 분명 자네 신법이 눈이 익다고 말했지?"
"...?"
"내가 다른 사람의 신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는가? 그만큼 그 신법의 주인은 엄청난 신법의 대가였을 것이 분명해."
그건 사실이었다. 일단 전설의 능공허도를 심심하면 선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이를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말이 되는가? 하지만 자네를 가르치다보면 내 분명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 그 말일세."
잠깐, 뭐?
"자, 잠시만, 하지만 타 문파의 제자에게 어찌... 스승님께 허락을 받아야합니다만?"
"내 무공을 전하겠다거나 반대로 자네 무공을 탐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그저 일반적인 가르침, 내가 줄 수 있는 것만을 가르쳐주겠네. 그런 정도라면 굳이 스승의 허락을 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용인되는 선 아니겠는가?"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 초식의 외형 따위만을 아무리 보고 외워봤자 구결을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무공이 유출될 일은 당연히 없을 거고.
하지만 내게는 껄끄러운 일 투성이였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이 마교의 지부인데다가 내 무공이 밝혀지는 것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공 이름까지 물어보면 흔쾌히 대답해줄텐데 그건 오히려 들어봤자 모를 거라면서 물어보지도 않으니, 나중에 들통난 다음 '색혈마 개새끼 해봐' 할 것 같아서 영 느낌이 안 좋은 것이다.
'게다가 나한테 무공을 가르칠 사람이 부족하지도 않고.'
메리트는 없다시피한데 리스크만 수두룩빽빽이니 이런 제의는 당연히 거절이다.
"이런 과분한 호의는 받을 수 없습니다. 대단히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사양하도록 하겠..."
"그런가? 그럼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예?"
영운자의 맥빠지는 대답에, 나는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싫다는 사람한테까지 가르침을 베풀만큼 아쉬운 사람은 아닐세."
"...호의만은 감사히 받아두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나타내며 슬그머니 영운자의 눈치를 살폈지만 딱히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나름 호의를 베푼 것을 거절했는데도 왜 별 반응이 없는 것인가. 그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자네를 따라갈 거야."
"예?"
"마침 말을 살 돈도 이렇게 생겼으니, 여행길에 방해될 일은 없을 것이야. 안심하게."
'그건 훔친 돈이잖아.'
그러니까 이 찰거머리 같은 노인네는...
"마방에 다녀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게. 자네가 지금 그냥 가더라도 상관은 없어. 젊은 청년이 저는 말을 타면서 허리 꼬부라진 노인네는 걸어서 따라오게 내버려둔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나를 엿먹이라는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 혹시 마방에서 따로 필요한 것이 있는가? 내 다녀오는 길에 사다주지 못할 것도 없네."
나는 영운자의 청수한 얼굴이 미소짓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힘만 있으면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치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