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누굽니까?"
단숨에 차가워져 냉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주약선, 아니 화운영은 가슴이 떨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사내가 자신에게 음심을 드러내는 것만 걱정했지, 지금처럼 적대적으로 나서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꽂아넣으려는듯 장심에 맺힌 새하얀 내기가 위협적으로 넘실거리는 가운데,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주, 주약선이에요!"
다급하게 대답한 화운영은 사내가 미간을 모으는 것을 보고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그렇겠군요."
사내는 의외로 허무하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화운영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내부를 탐색하고 있던 상대였기 때문에, 오늘 갑자기 바뀐다고 해도 못 알아차릴 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사내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화운영은 사내의 기세가 너무 살벌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질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손은 여전히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죠."
"네...?"
"그게 본래 모습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의도로 접근한 겁니까?"
지금껏 사내가 내보이던 경계심과 적의가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면, 이제는 배신감에 사무치는 어조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차라리 적의를 내비치는 쪽이 더 나았다는 생각과 함께, 화운영은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오해에요. 이건 그냥..."
"오해라구요? 그냥? 저는 그동안 주 의원을 한 식구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저만 했던 모양입니다."
화운영은 억울했다. 사내가 평범한 상대였다면 얼마든지 진실을 밝혔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내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황하는 그녀의 기색을 사내도 알아본 것인지, 사내의 어조가 조금 차분해졌다는 것이었다.
"하아...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만은 믿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들어야겠습니다."
그 말을 맺으면서 사내가 손을 내려놓자, 그제야 화운영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저... 그런데 강 소협?"
"예."
"죄, 죄송하지만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시면..."
화운영은 헐렁한 옷을 억지로 부여잡고 몸을 가리고 있는 꼴을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고, 사내 역시도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로부터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내는 다시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여자 혼자 몸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모습이어서야 귀찮은 일이 많았을 것 같긴 하군요."
"이해해줘서 다행입니다."
나는 화운영의 설명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화운영은 꽤나 안심한 기색이었다.
사실 좀 더 살벌하게 몰아붙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몇 마디 따졌더니 울상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나도 미안함을 느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다고 해야겠군요. 화 의원 덕분에 소영도 목숨을 구했고, 저도 고쳐주었는데 터무니없는 의심을..."
"아, 아닙니다."
나는 화운영과 서로 내 잘못이 크다, 아니 내 잘못이 더 크다 하고 사과하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몰래몰래 감상했다.
엉망진창으로 다쳐서 가물가물했던 그 날 밤에 보았던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녀가 당황한 탓에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 대신 성숙한 아름다움에 걸맞지 않는 귀여운 느낌이 났다.
잘록해진 허리와 늘씬해진 팔다리 때문인가 가슴과 엉덩이가 그리는 풍성한 굴곡이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참자, 아직은 아니다...!'
간신히 화운영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지난 며칠간 그녀의 내부를 탐색해서 어디를 어떻게 건드리면 역용술이 풀릴까를 뇌 주름이 풀릴 정도로 조사한 결실을 본 것이다.
하지만 주약선이 실은 화운영이었다는 것은 내 여자들은 전부 알고 있던 사실이니, 이것을 명분으로 써먹기는 약하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군요. 특히 저 같은 사람 앞에서는 더욱 감췄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화운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십중팔구는 그런 생각이었을테니까.
"많이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옳은 판단이었다고는 생각합니다. 이렇게나 아름다우니까요."
"소, 소협..."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화 의원이 그렇게나 명확하게 의사를 표시했는데 추근댈 정도로 도리를 모르지는 않으니까요."
"...네?"
반응이 이상했다.
나는 일단 화운영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말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당황스럽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주면 감사하겠어요. 저, 저로서는 물론 강 소협이 특별히 싫어서라거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뭐지, 이건?
화운영의 표정이 묘했다. 살짝 실망한 것도 같고, 안도하는 것 같은 그런 묘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대면서 중얼중얼 말하는 모습이 꼭...
"이, 이 모습이어서야 조금 불편하겠지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새로운 치료법이 완성될테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장기간 역용술을 유지하려면 특수한 대법이 필요한데, 그것을 하는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당분간은 이 모습인 상태 그대로 하자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딱히 이 모습이라고 해서 안 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거 혹시...'
진짜 그린라이트인가?
늦은 저녁, 나는 후원의 바위 위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원래 내 계획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고 나면, 심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회음혈에서 직접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구슬리는 것이었다.
즉, 가랑이에 손을 얹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뜻.
마음씨 좋은 화운영이라면 '이거 빨리 익히면 참 많은 도움이 될텐데~ 그런데 네 사정 때문에 늦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라는 식으로 살살 건드리면 결국 하나하나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옷 위에, 그 다음은 맨살에, 마지막은 자지를 넣는데 성공하고 며칠 정도 정액절임으로 만들어주면 아무리 금욕적인 화운영이라도 넘어오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건가?'
남자로서의 나를 은근히 꺼리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요 며칠 붙어있으면서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물론 다짜고짜 내 여자 하라고 하면 알겠다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호감이 쌓인 것 같은 상대를 구슬려서 얼렁뚱땅 자지를 박아버려도 되는 건가?
가망이 보였다면 그 동앗줄을 타고 올라가서 자연스럽게 화간부터 시작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어쩐지 그 호감을 배신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영 찝찝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문제인데.'
아마 화운영은 티를 낼 생각이 없을 거다. 내가 들이밀면 도리어 거리를 둘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
내 여자들 눈치도 보일 거고, 본인이 세워놓은 원칙 때문에 거부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데...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뭐하고 있어?"
"잠깐 생각하고 있었죠... 어?"
무심결에 대답한 나는 뒤를 돌아보니 매소향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고민할 일이 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너무 생각에 깊이 잠겨있어서 그런가, 매소향이 내 뒤에 접근할 때까지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모르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게 고민이 아니라고?"
"음, 그게..."
사실 이런 것은 같은 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는 했다. 하지만 매소향에게 물어보기는 조금 그런데.
"...빨리 말 안 해?"
매소향이 서서히 쌍심지를 치켜올리자 나는 결국 두 손 들었다. 사실 말하기 난처한 것과는 별개로 내가 고민하고 있으면 억지로라도 들으려고 해주는 것이 조금 고맙기도 했다.
문제는 이걸 매소향에게 말하면...
"너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매소향과의 관계는 협박으로 시작해서 강제임신(의도한 건 아니었지만)으로 이어지는 관계였기에, 말하자면 지금 내가 화운영에게 고민하고 있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자기는 억지로 임신시켜서 반쯤 강제로 내 여자로 삼아놓고서 화운영은 정상적인 관계부터 시작하는게 옳지 않은가 하는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
나는 얼른 일어나서 매소향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냄새가 내 콧속으로 들어오고 자지가 설 것 같았지만 나는 살짝 허리를 뺐다.
"미안해요. 그 때는 당신을 너무 안고 싶어서..."
"바, 밖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매소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내 등을 찰싹찰싹 쳤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더욱 힘껏 안아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예쁜데, 날 너무 싫어하니까..."
"아,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
자기 목소리가 더 큰 것은 모르는지 매소향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손은 나를 밀어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슬그머니 내 허리에 감긴 팔의 감촉을 느낀 나는, 매소향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고개를 들게 한 다음 입술을 맞추었다.
달달하고 끈적하게 감겨오는 혓바닥을 실컷 맛보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지고, 매소향은 뜨거운 숨을 한 차례 길게 내 목덜미에 불어넣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정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주니까 뭘 해도 된다고 착각하지마. 애초에 화 의원을 건드리는 것도... 흐음...!"
등 뒤로 팔을 넘겨서 탱탱한 엉덩이를 꽉 틀어쥐자 말이 끊기고 신음성이 울렸다. 당혹해서 눈이 커진 그 표정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런게 싫지는 않죠?"
"...싫지는, 않아..."
내 웃음소리가 더 커지자 매소향은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 중얼거렸다. 아줌마 주제에, 왜 이렇게 다들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답은 대충 나온 것 같네."
"네?"
말을 돌리고 싶은지, 정말 내 고민에 성실하게 대답해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소향이 입을 열었다.
"화 의원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얼렁뚱땅 매달려서 넘어가려고 하는 거."
"...그럴까요?"
매소향이 당장 실사례를 보여주면서 말하자 내 귀에는 꽤나 솔깃하게 들렸다.
"애초에 남자와 엮이기 싫다고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무조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마 싫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흐음..."
"그리고 네 진짜 특기는 따로 있잖아? 그 사람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뭔가를 쥐고 흔드는거."
"미안하다니까요..."
웬일로 성실하게 답변해주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비꼬는 것을 보니 매소향은 매소향이었다.
그래도 생각은 대충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이제 내일부터 다시 화운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적당히 탐색해서 마저 방향을 정해봐야겠다.
그러니까 오늘은 우선...
"하앗♥ 뭐, 뭐야?"
"이제 고민 끝났어요!"
매소향의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손끝으로 쓸어준 나는 그녀를 두 팔로 안아들고 처소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려줘, 내려달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얼른 시선을 돌리는 것을 알아차린 매소향이 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내가 조금 급해서.
나는 혹시나 싶어서 매소향을 침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급하게 바지를 내리고 밤을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