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32화 (332/383)

나는 집에 돌아오는대로 일단 주약선을 의원 쪽으로 돌려보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는데, 아마 그 호가라는 남자를 얼른 떼어내려고 하는 내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급할 것도 없으니 천천히 하기로 하고, 나는 일단 주여린을 찾았다.

아니, 정확히는 주여린과 같이 있을 다른 사람을.

"내겐 무슨 볼일인가?"

"예, 앞으로 호위에 더욱 만전을 기해달라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조장은 안 그래도 찌푸려졌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오늘 주여린이 실컷 떡친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을 봐서 그런가, 애초부터 표정이 안 좋기는 했었다.

"네놈의 명령을 들어야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없습니다. 애초에 명령도 아니죠. 하지만 군주님의 안위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자세히 말해봐라."

하지만 주여린을 들먹이자 조장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다. 역시 주여린이 엮여들어가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지만 내 설명을 들은 조장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어딜 봐도 형편없어보이는 자이지만 위험해보인다?"

"...이상하게 들릴 것은 압니다."

그 호가라는 남자가 왜 굳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는지 나는 아직도 신경이 쓰였다.

그냥 아무나한테나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보다는 그것을 구경하고 있던 외곽 사람에게 사정을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약자로 보이는 사람이 실은 초강자니 하는 이야기가 소설의 클리셰니 뭐니 해도 사실은 극소수에 해당된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 남자에게는 묘한 여유가 있었다.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그 태도에서 강하게 풍겨나왔다.

하지만 내 설명을 들은 조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 자가 정말로 위험한 자라고 해도, 군주마마의 위협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네놈이나, 주 의원을 노린 것이겠지."

"그렇습니까? 하긴, 저나 주 의원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군주님께선 눈도 깜짝 안 하겠군요. 제가 괜한 소릴 한 것 같습니다."

"...이 개자식이...!"

조장은 이를 갈았지만 나는 그에 대응하지 않고 일단 그가 분기를 토해내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

애초에 주여린에게 위협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은 반대로 뒤집으면 위협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무턱대고 보호를 강화한답시고 애를 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주변 사정을 파악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겠지.

그럼에도 내 앞에선 거절하듯 말한 것은 그냥 내가 아니꼬워서가 분명했다.

"조장, 제가 저 편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군주님께서 여기 계신 동안은 좋으나 싫으나 공생관계나 다름없는데, 이런 부분은 미리 알려드리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

"사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야 일신의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비무대 위에서 정면대결이나 잘하지, 조장만한 호위의 전문가가 누가 있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아첨도 할 줄 알았군."

내가 달래고 어르자 조장은 비꼬기에 들어갔지만 듣기 썩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 자와 팽 여협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모릅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만약 그 자가 정말 고수라면 초절정은 확실하겠죠."

"크음..."

조장은 신음성을 흘렸지만 그 녀석이 고수라면 초절정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앞에서 내력의 기미를 조금도 들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 호가라는 녀석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누구지? 나는 계속 머릴 굴렸지만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괜히 불안감만 자극하지 말게. 이러다 아무런 일이 없다면..."

"저는 차라리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조장은 다시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실 이젠 기감으로 반 정도는 위치를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런 은신술은 조금 배워보고 싶다.

개멋있네.

주약선은 제 손을 들어올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역용술로 살을 찌웠다고는 해도 손은 본래의 크기와 차이가 없었기에, 아름다운 섬섬옥수였다.

조금 전까지 어떤 손에 힘있게 쥐어져있던 그 손은 아직도 굳센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 다른 손을 뻗어 그 손을 감싸보기도 하던 주약선은 갑자기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손을 내렸다.

그 다음 가까이에 있는 책을 끌어당겨 그것을 펼치자, 인기척이 멈춰섰다.

[주 의원, 잠시 괜찮을까요?]

언소영의 목소리가 들리고, 더불어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언소영과 어미의 품에 안긴 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견이는 비슷한 시기의 아이들에 비하면 훨씬 덩치가 컸는데, 아마 자라면 아버지처럼 체구가 커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이를 대동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주약선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아기씨에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겁니까?"

얼핏 보기에는 건강해보였기에 주약선이 그렇게 묻자, 언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요즘 식사를 잘 안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아마 식사가 재미가 없어서일 거라고 유모가 그러더군요."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무슨 일로..."

"이제 아이가 돌이 지났으니까, 이제 무공의 기틀을 잡아줄 때가 되었는데... 혹시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지 주 의원께서 확인해주면 좋겠어요."

"무공의 기틀...? 아!"

일반적으로 무림세가의 아이들은 빨라도 세 돌은 지나야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하지만, 예외적으로 빠르게 그 기틀을 다져주는 경우가 있었다.

벌모세수.

최소한 초절정고수는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수법으로, 나이가 어려 아직 신체가 깨끗할 시기에 무공에 적합한 체질로 만드는 묘용이 있었다.

넷째 호와 마찬가지로 견이도 강윤의 아들이니 팽연화가 해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겠지만, 언소영이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이상 굳이 그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약선은 대경했지만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럼 잠시만 아기씨를 이쪽에 눕혀주시겠습니까?"

언소영이 선선히 아이를 그 곁에 눕혀주자, 주약선은 곧바로 진찰에 들어갔다.

긴장한 어미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아이는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몸을 나긋나긋하게 주무르니 시원했는지 곧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혈맥은... 이상이 없는 것 같고. 이번에는...'

내력을 투사해서 체내를 탐색하고 가벼운 촉진으로 근골을 확인하는 주약선의 눈에, 조막만하지만 누가 보아도 강윤의 아들로 볼 수밖에 없는 귀여운 얼굴이 들어왔다.

눈앞의 여인은 강윤의 아내, 이 아이는 강윤의 아들.

그 사실을 재확인할수록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주약선은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혈맥에도 근골에도 이상이 될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군요.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혹시 모르니 시술할 때 저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다행이네요. 꼭 그렇게 할게요."

언소영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들었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부담없이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든든하네요. 주 의원 같은 분이 도와주시니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그런 말을 남긴 언소영은 웃으며 자리를 떴지만, 주약선은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쉰 주약선은, 아까까지 자신의 손을 더듬던 기억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날, 주약선은 또다시 사내에게 배를 드러내보이면서 그 감촉에 조금씩 집중하게 되는 스스로를 저주하고 있었다.

주약선이 사내의 생각을 모르는 것처럼, 사내 역시도 주약선의 생각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음... 거골혈을 통해서... 괜찮습니까?"

"네, 괘, 괜찮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에 맞닿은 사내의 따뜻하고 거친 손바닥은 꽤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부위를 내보이는 수치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며칠씩 반복되면서 서서히 수치심은 옅어지고 감각 자체만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말씀드리는 거지만, 조금이라도 아프면 조금은 아프다는 말도 꼭 해주셔야합니다."

"네에..."

게다가 가끔씩 염려해주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리는 것도 듣기 좋았다.

사내의 여인들이 그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가 보기에 사내는 매력적인 남자이기는 했다.

붕붕붕

"주 의원?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그녀가 도리질을 치자,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주약선은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했다.

'안 돼. 엉뚱한 생각 하지마.'

그녀는 남은 삶을 의원으로서 살아가기로 일찍이 맹세한 바가 있었다.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위해 살아가겠노라고.

눈앞의 사내와 만나고, 여기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그저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고 병자들만을 생각하며 살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책맞게 아들뻘 어린 사내에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본모습을 드러내면 사내는 그녀에게도 눈독을 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에 자괴감마저 느끼던 주약선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안 돼.'

전날에 보았던 언소영과 그녀의 아들을 떠올리며 주약선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내에게서 자신의 정체를 감춰준 언소영이 제 속을 알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는가.

하지만 주약선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눈앞의 사내가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던 것을.

그리고 자신의 체내에서 흐르던 내력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아니...?"

그것을 그녀가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때가 늦은 상태였다.

"강 소협, 잠깐만...!"

"예?"

"빨리, 운기를 멈춰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사내의 얼굴을 볼 정신이 없었다. 주약선은 자신의 내력을 필사적으로 붙잡아두려고 했지만 사내의 내력이 이끄는 힘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우득 우드득

'안 돼...!'

그녀의 체내의 소리가 유독 그녀에게만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자 곧 사내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급하게 사내가 자신의 내력을 회수했지만 체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인지 주약선의 몸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약선의 모습이 변하는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통통한 살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변형되었던 골격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과정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사내의 경악성을 들으며 주약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역용술을 지탱하기 위해 별도로 운용되던 내력이 구심점을 잃고 단전으로 환원되며 역용술이 풀린 것이다.

한편 이미 배를 드러내느라 약간 풀려있던 의복이 헐렁해져 흘러내리는 것을 깨달은 주약선은 얼른 옷자락을 당겨 제 몸을 가렸다.

그리고 감겨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다시 떴을 때는, 손바닥에 장력을 머금고 저를 노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당신, 누굽니까?"

경계심 잔뜩 어린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주약선은 사내에게 그 어떤 의심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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