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31화 (331/383)

주약선은 사내가 배에서 손을 떼자 몰래 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살을 만지는 사내의 손길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과연 그녀의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속으로 일축한 주약선은 사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배웅하려는데, 그녀의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원님, 계십니까요?]

"아, 들어오십시오."

주약선의 허락이 떨어지자,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노복이 들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쌀이 다 떨어졌습니다만..."

"벌써요?"

물론 그들이 쌀을 살 형편이 안 되어서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일손 자체가 워낙에 부족하기 때문에 쌀을 사다두는 일을 시킬 손조차도 아깝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상회에서 최근에..."

"자, 잠깐만요."

주약선은 얼른 노복의 말을 막았지만, 이미 강윤은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것 같았다.

"상회에서 최근에, 뭘 어쨌다는 말씀이죠?"

노복은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약선을 보다, 젊은 무림인에게 지목을 받으니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겉으로는 유력자와의 연결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의원에, 인근의 상회가 눈독을 들였다.

사람이 많아 사가는 것은 많은데, 보아하니 특정 유력자와 끈이 있는 것도 아닌듯하고 주변의 평판에 꽤나 얽매이는 곳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심한 핍박을 당했던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일손과 맞물려서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가져다주지 않겠다는 핑계로 가격을 꽤나 올려받는 정도의 소소한 괴롭힘은 피할 수 없었다.

"흐음..."

주약선은 사내가 미간을 모으고 턱을 만지작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가 비교적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역시 무림인.

장사치에게 휘둘릴 수는 없다며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들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던 주약선은 사내가 박살을 내주겠다고 날뛰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한심하긴..."

"소협, 안 돼요!"

그녀가 무력에 호소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나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서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바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취한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까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뭘 걱정하는지 몰라도, 아마 안 될 일은 아닐텐데요."

하지만 주약선은 몰랐다. 사내는 무림인으로 살아온지 이제 고작 만 2년 정도가 다 되어가는 몸, 아직도 무림인보다는 현대인에 가까웠다.

"본인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는 것뿐이니까요."

그런 사내의 웃음은 그저 유쾌하기만 해서, 주약선은 저도 모르게 기대가 드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 감사합니다. 지불하신 금액은 이쪽 전표로 바뀌게 됩니다만, 배송을 수령하실 때 전표를 제출해주시면 절차가 완료됩니다."

"예? 아, 예..."

주약선은 담당자의 물흐르는 듯한 설명의 전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지만 어차피 다 내가 아는 것들이니까 도와주면 되겠지.

"이번에는 쌀과 소금 대량구매 절차를 이용해주셨습니다만, 정기구매를 신청하면 더욱 저렴하게 구매가 가능..."

"설명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우선 당장은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앗, 그러십니까? 그럼 추후 혹시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저를 찾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내가 끊어내자 다행히 담당자는 질척대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무래도 벙찐 얼굴의 주약선에게 이 상황이 길어지는 것은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운가상단의 물류업, 그러니까 마교 쿠팡에 주약선을 데려왔다.

솔직히 어느 상회인지는 몰라도, 그 상회가 한 짓거리는 어리석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근처에 좋은 우량고객이 생겼으면 조상님께 감사하고 친절하게 잘할 것이지, 어디서 등골을 빼먹으려고 각을 보는가.

그나마 주변에 대체할 곳이 없다면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모르지만, 마교 쿠팡이 침투하고 있다는 것 정도도 모르고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가, 강 소협... 그게 실은..."

"나중에 다시 다 설명드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약선은 난데없이 신문물과 마주한 충격이 컸는지 조금 패닉상태였다. 어머니, 그러니까 한국의 친어머니도 인터넷 배송에는 애를 먹었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생각났다.

"일단 저희가 받은 전표는 저희가 쌀을 구매한다는 증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중에 의원으로 배송이 올 거에요."

"그, 그렇군요..."

주약선은 일단 내가 전부 이해한 것 같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이렇게 하자고 만든 것이 난데, 모를 수가 없긴 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실 다들 대동소이한 기색이었다. 호남에서 시작해서 사천으로 넘어온 것이 최근이니, 다들 별로 적응이 된 모습이 아니었다.

'조만간 적응하면 이게 없이는 못 살겠지만.'

주약선은 판매목록이라고 적힌 책자를 뒤적이며 잠시 보는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고보니 사진이 없어서 처음 보는 물건은 설명만으로는 알아보기 어렵겠구나.

그림이라도 넣어보자고 해볼까.

"이제 갈까요?"

내가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사이 주약선은 대강 책자를 다 보았는지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다음에도 또 올 수 있으니까 그 때 마저 고민을 하기로 하고, 나는 주약선과 함께 의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매소향과 주여린이 주문했던 음식들을 사서 돌아가는데, 주약선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것은 사람을 시켜서 사올 법도 한데..."

"제가 직접 사가면 좀 더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잘 모르겠군요."

주약선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나란히 걸었다.

애초에 운가상단이 그다지 멀지도 않은 곳이었기에 곧 의원 가까이에 도착했는데, 이상하게 인파가 많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주약선은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정확히는 의원이 아니라 의원 주변 공터에 인파가 몰려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몇몇 사람이 그 중앙에서 뭔가를 하면 사람들이 와 하고 환성을 지르는데 차력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림인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검기 검강을 휙휙 날리는 시대인데도 저런게 통하는구나.

"그냥 지나가죠. 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이보시오. 여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요?"

고개를 돌려보니, 꽤 체구가 좋고 잘생긴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나를 지목하며 묻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그 남자에게서 허리에 찬 검을 발견한 나는 살짝 경계심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닙니다. 아마 약장수가 저 중앙에서 재주라도 부리고 있는 모양이죠."

"흐음... 약장수라?"

말이 나온 김에 내력을 끌어올려 청력을 강화시켜보니 확실히 '이 약을 먹으면 바위도 뽑아낼 괴력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내공을 익힌 낭인무사라도 고용하고 있겠지.

하지만 사실 내가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은 눈앞의 남자였다. 검을 많이 사용한 흔적은 없고, 내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원래 이런 놈일수록 숨겨진 강캐라는 것이 클리셰인 것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거의 그럴 확률은 없겠지만, 어쩐지 묘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게다가 인파 속을 헤치고 왔으니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정도야 납득이 가지만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니 경계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허어,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구려. 여기서 벗과 만날 약속을 하였는데, 장소가 이래서야..."

"그럼 혹시 잠시 저희 의원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저 건물입니다만..."

"아니, 그럼 친구분과 확실하게 못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주약선이 별 생각없이 남자에게 권하는 것을 보고,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뭔가 잘 모르겠지만, 이 남자와 오래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렇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여기서 오래 기다리는 것이 방법 아니겠습니까? 저 자들도 여기에 하루종일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그럴 수밖에 없겠구려."

다행히 남자는 별 속셈은 없었는지 내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조금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기도 하지만, 원래 귀찮을 소지가 있는 건 애초에 손을 안 대는 것이 제일이었다.

"고맙소. 우선 여기서 좀 더 기다려보리다."

"예. 귀하께서도 친구분과 무사히 만나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얼른 주약선을 끌고서 남자에게 급히 인사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남자가 말했다.

"나는 호(虎) 가요."

"...저는 강(强) 가입니다. 그럼 이만..."

다짜고짜 자신의 성을 밝히는데 아무리 보아도 거짓말 같았다. 성으로 범 호 자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서 나도 굳셀 강 자를 불러주고는 물러나와버렸다.

호가라는 그 남자가 내 등 뒤를 향해 뭐라고 말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마침 인파가 내지르는 환호성에 막혀서 뭐라고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감이 좋군."

인파를 헤치고서 중년 여인을 이끌고 제 집으로 돌아가는 강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호령은 피식 웃었다.

황두명 몰래 찾아온 일귀라는 자가 떠드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몰래 보러나왔는데, 그에게 묘한 경계심을 보이는 것이 영 맹탕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은 살려주지.>

일귀는 반드시 강윤을 죽여야한다고 강변했지만, 호령이 보기에는 그렇게까지 위협이 될 정도의 존재는 아니었다.

'혈마의 제자라지만...'

일귀의 입에서 나온 사실에는 놀랐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별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혈마는 이미 저 나이에 초절정을 넘보고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강윤은 고작 절정 중급에서 조금 윗줄인 정도.

무공이라는 것이 위로 올라갈수록 경지를 높이기가 어려운만큼, 강윤의 오성은 혈마에게 크게 못 미친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굳이 그 자를 지금 자극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혈마도 그의 표적이 될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굳이 강윤을 해쳐 혈마를 자극하기에는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혈마를 죽인 다음에 정리하거나, 아니면 혈마를 끌어낼 미끼로 쓸 수 있는 존재. 그의 눈에 강윤은 고작 그 정도의 존재였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살려주마."

간신히 인파에 밀려서 나타났을 때와는 다르게, 호령은 자연스럽게 인파 사이로 녹아들며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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