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경멸하십니까?"
주약선은 사내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 성연군주 주여린이 그녀를 찾아왔었다. 그녀는 증상만을 말할 뿐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주약선은 지난밤 그녀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와 동행한 호위에게 약방문을 적어서 넘겨주었지만, 주여린이 어색하게 웃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없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눈앞의 사내와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그리고 그 짐작은 주약선이 사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게 여기는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경멸이라니... 무슨 말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예?"
주약선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사내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사내가 갑자기 확 다가오자 주약선은 얼른 뒤로 물러났고 그제야 사내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죽이며, 주약선은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몸에서 약재 냄새가 심하게 나서 무심결에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저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약선은 스스로도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이 방 안에 있는 약재가 얼마나 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저는 영락없이 군주님이 다녀간 것 때문에 저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주약선은 당황해서 숨을 힘껏 들이켰지만 사내는 별 반응이 없었다.
사실이기는 했다. 다만 경멸처럼 극단적인 감정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자신이 마음속으로 사내에 대한 거리감을 많이 좁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일뿐.
10대 소녀도 아니었으니 연심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아니로되, 이전보다 조금 사적인 감정이 많이 들어간 마음이기는 했다.
"저는 약재 냄새 정도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주 의원이 풍기고 다니는 향은 청량한 것이 좋더군요."
"으흐흠, 흠!"
주약선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사내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신의 연배가 사내의 부인들과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수작질을 걸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통통한 외모의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쉽게 입에 담아도 되는 말은 아니었다.
"아차,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주의해주십시오."
사내의 사과를 받아들인 다음, 주약선은 사내가 종이를 읽어내려가는 것을 보고 잠시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약 일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사내가 주약선을 불렀다.
"이거, 괜찮아보이는데..."
"어떤 것말입니까?"
그녀가 생각해낸 것들은 제법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본래의 심법에서 변형된 부분이 많은 것들이었다.
"이걸 잘 활용하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실제로 적용해보지 않고서는 가능할지 확답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약선의 배를 힐끔 바라보는데, 지금 시험해보자는 의미인듯했다.
딱히 그녀가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공언해버린 이상 여기서 또다시 사내를 피하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해지기 마련.
'어떻게 하지...'
주약선은 잠시 고민하며 사내의 얼굴이나 손을 살폈다.
무덤덤한 표정과 마치 석상처럼 곧게 내밀어진 손. 거기에서 주약선은 별달리 수상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여인을 마치 짐승처럼 탐하는 자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 보이는 모습은 순수하게 자신의 심법이 지닌 가능성에 관심을 품은 것에 불과해보였다.
'괜찮겠지...'
주약선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 역시도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과연 사내는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고서도 운기행공에만 집중할 뿐, 이상한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몰래 차곡차곡 준비되어가는 사내의 흉계를, 주약선은 짐작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서안 무림맹.
화씨일문이 무림맹에 머물게 된 것은 꽤나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기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전각을 하나 통째로 비워야만 했다.
의각(醫閣)이라는 평범한 이름의 전각은 다행히 규모 하나는 큰 편이었기 때문에 화씨일문 전체가 들어가서 지내더라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편이었다.
명색이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곳이었기에 원래부터 전속 의원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도 화씨일문의 산하에 들어오게 되었음에도 전혀 기싸움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다.
화씨일문이 보유하고 있던 방대한 의서에서 비롯되는 지식들을 선뜻 나누어주니, 이빨을 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비록 악용할 소지가 없는 지식만으로 한정된 가르침이라고는 하지만, 강윤이 의대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던 화씨일문인만큼 수양깊은 의원들에게도 가르칠 것은 많았다.
"덕분에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으흠, 아무리 수련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몸을 충분히 쉬어주는 것 역시도 필요한 일이라네. 잊지 말게나."
그래서 갑자기 넘쳐나게 된 의료인력이 의욕까지 넘치니, 잔병 하나쯤 달고 있던 무림맹의 무사들이 틈만 나면 그들의 의방에 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인근에서 몇몇 용기있는 주민들까지 그들의 치료를 받기 위해 무림맹의 문을 두드리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화씨일문이 여기까지는 왜 왔다고 하는가?"
"예끼, 이 사람. 가는귀가 먹었는가? 못된 사파 놈들이 그들을 노렸다는 말일세!"
"사파? 사파면... 마교인가?"
"마교는 아닌 것 같고... 사파라고만 들었는데... 아무튼 못된 사파 놈들이 불로불사의 비약을 노리고..."
"불로불사의 비약?!"
엉터리 같은 이야기까지 덤으로 달라붙어 온갖 소문이 퍼졌지만 아무튼 화씨일문이 사파 어느 문파의 표적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무림맹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서안 전체에서 파다하게 퍼졌다.
다행히 운가상단의 이름으로 천천히 중원 상계에 파고들 예정이던 마교가 약간 힘을 쓴 덕분에 그것이 마교의 소행이라는 소문은 미연에 봉쇄할 수 있었지만, 화씨일문 사람들로서는 알 도리도 없었고.
"이 어리석은 녀석아,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느냐?"
"제가 뭘 말입니까?"
화씨일문주 화운악은 동생 화운천에게 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화운천은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귀를 후볐다.
"제가 언제 저희가 도망왔다고 했습니까. 그 정도야 이미 무림맹의 주작단 선에서 쫙 퍼진 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네게 들었다는 사람들의 말은 무엇이냐?"
"그건 그냥... 무용담 비슷하게..."
결국 말했다는 이야기였다. 한숨을 푹 내쉰 화운악은 화운천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녀석이 그러느냐."
그럼에도 화운악이 못 말리겠다는듯 적당히 꾸중을 하고 넘어간 것은 지난 습격 당시 모든 식솔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화운천의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사실적이었습니다, 사실적."
화운악은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정파의 거대문파들이 무림맹을 중심으로 뭉칠 것이다. 적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다는 것이 맹주의 의견이야."
"...예, 형님."
"그 때는 본문도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 적을 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최대한 많은 고수들을 구해내야할 거야."
지금은 이렇게 별 도움이 안 되고 밥만 축내고 있었지만, 검성은 그것까지 고려하여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니 이상한 소문 퍼뜨릴 생각하지 말고 당분간 자중하고 있거라. 특히, 팽 여협을 비롯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퍼뜨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아."
화운악은 화운천이 짧게 흘린 목소리에서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동생을 다시 보니, 화운천이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 이 녀석... 나이는 어디로 먹는 것이냐...!"
"...아무래도 또 환자가 온듯합니다. 소제가 나가서 확인해보도록 하죠."
화운천은 가볍게 경신법을 발휘해서 신형을 날렸다.
의술이라면 모를까 무공실력은 그리 자신이 없는 화운악으로서는 그저 이를 갈 뿐이었다.
"으음..."
미간을 살짝 찌푸린 주약선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조금 애를 써보는 것 같더니 주약선은 슬쩍 내 배에서 손을 떼었다.
"어렵군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정해진 형태에서 변형시킨 심법이니까요."
주약선과 보내는 시간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첫째로, 등선공의 마이너 카피 버전인 심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
둘째로, 그 마이너 카피 버전인 심법을 나 이외의 사람, 주약선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일이었다.
막상 치료를 해야할 주약선 본인이 심법을 운용하지 못하면 아무리 치료법을 개발해도 내 도움이 필요하니 반쪽짜리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실 쉽진 않겠지.'
애초부터 등선공은 손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배에서 출발하는 심법도 아니었다.
그저 내 경지가 높아졌기 때문에 조금 곁가지를 달아서 효율을 낮춰서라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
그걸 등선공의 기틀조차 잡히지 않은 주약선이 하려고 하면 쉬울리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경지가 낮더라도 색천문의 중급심법으로 내력을 갈무리한 주여린이 더 확률이 높을 것이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일단 같이 있는 동안은 최대한 도울테니까... 심법을 쓸 수 있게 되면 훨씬 사정이 낫겠죠."
사실 내가 내력을 유도해주면 훨씬 쉽게 주약선이 배울 수 있기는 하다. 마음만 먹으면 해줄 수 있지만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닌데다가, 애초에 주약선을 자빠뜨린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참자.'
나는 내 내력으로 주약선의 내부를 지난 며칠간 꼼꼼하게 탐색해왔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찾아냈다.
아마 애초에 본인은 내 수비범위도 아닐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방심하고 있었겠지.
"일단 오늘도 운기행공은 해볼까요?"
"네? 네..."
역시 머뭇거리는 것이, 뭔가 나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 같았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쪽이면 좋겠는데...
나는 조심조심 상의를 젖히고 드러나는 주약선의 통통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앞으로 하루. 하루 뒤에는 주약선이 아니라 화운영의 배를 만지고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