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약선의 배 위에 얹힌 손의 위치를 잘 조절하며 운기에 집중했다.
그야 물론 운기 중에는 집중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런 당연한 이유 이외에도 내게는 더욱 집중해야될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반응하지 마라...!'
나는 주약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최대한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심을 드러내기라도 했다가는 끝장이었기 때문에, 나는 주약선의 눈을 보지 않고 최대한 이 동그란 배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렇지도 않을줄 알았는데...'
아무리 본모습이 꼴리는 밀프라고 한들, 지금은 그냥 푸근한 인상의 옆집 아줌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맨살을 만지고 보니 머릿속에 계속해서 본모습이 떠오르면서 손이 야릇한 움직임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안 되었다. 적어도 중간 목적이라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소협, 힘이 많이 듭니까?"
"예, 예?"
"땀이 엄청나게 나고 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왼손으로 내 이마를 만져보니 척척했다. 완연한 겨울 날씨에 실내라고는 해도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으면 걱정이 될만도 했다.
"예, 그럼 잠시 쉬겠습니다."
"그럼 제가 차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고려해 주약선이 내온 시원한 냉차를 마시고, 내가 쉬고 있는 사이 주약선은 종이에다가 뭔가를 정신없이 써내려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자기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경과를 정리하고,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떠오르는 생각을 대충 휘갈겨 적고 있는 듯했다.
"그리 예쁘게 쓴 글씨는 아닙니다만..."
내가 건너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주약선이 어색하게 말했다.
"아, 혹시 보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소협이 봐준다면 저야 좋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기엔 조금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당치도 않습니다."
주약선에게 작업을 치는 것과는 별개로, 굳이 주약선에게 등선공의 일부까지 전수해주는 것은 혹시 내 여자들이 다쳤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종이를 내미는 주약선에게서 종이를 받아들며 빠르게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음...? 이건 독을 밀어내는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까?"
"예, 환자가 의식을 잃었을 경우 더욱 효과적으로 독을 뽑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보았는데..."
"이 방법이라면 무모하게 입으로 독을 빨아내려다 본인도 중독되는 경우를 막을 수 있겠군요."
"맞아요! 그 부분도 염두에 두고...! 고안... 한..."
주약선은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말하다가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죄, 죄송해요. 너무 목소리가..."
"아니, 아닙니다. 저도 주 의원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좋군요."
"..."
사내가 기껏 달래주었음에도, 주약선은 오히려 민망함이 더해갈 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던 것이다.
이전부터 지식의 범위가 넓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의술에 관련된 지식도 제법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
'주책이야, 정말...'
그녀에게 있어서 의술을 실제로 베풀어 사람들을 돕는 것 역시 즐겁지만, 이렇게 새로운 의술을 궁구하는 것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주약선은 자신이 궁구한 바를 사내가 씹고 뜯고 맛보는 것이 그녀의 그런 즐거움을 더욱 돋워주는 것을 알고야 말았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한 번 읽어보았는데, 실제로 가능할지는 저도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른 할 일이 많지 않나요?"
"생각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으니까요. 주 의원의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 그럼 부탁드릴게요..."
주약선이 받아들이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종이를 내려놓고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휴식은 이만하고 다시 하던 것을 계속하자는 사내의 무언의 신호에, 주약선은 여며두었던 허리끈을 풀었다.
동그란 배가 다시 드러나고, 사내의 손이 다시 한 번 배 위에 닿는 순간.
"힛...!"
"...?"
주약선은 무심결에 제 입에서 새어나온 이상한 소리를 얼른 억눌렀지만, 이미 사내는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딸꾹질이..."
"그렇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사내의 시선이 다시 배쪽으로 집중되자, 주약선은 이를 꽉 물었다.
'왜 이러는 거지...?'
뭔가, 그녀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투박한 손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낀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이 말라오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주약선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강윤이 주약선을 자빠뜨려보려고 조금씩 티나지 않게 손을 쓰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에도 강호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화씨일문은 강한 세력은 아니었으나, 강호의 모든 세력이 손대지 않는 일종의 중립지대 같은 곳이었는데, 그 곳이 의문의 적들로부터 습격을 받았으니 조용할 수가 없는 것은 필연.
이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는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껏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황보효선이 생각하기에, 그 중에서도 아마 지금 가장 바쁜 것은 사천분타가 아닐까 싶었다.
"이놈아! 우선순위를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은령회인지 금령회인지 하는 그놈들보다는 우선 손룡이다, 손룡!"
"아이고, 분타주! 제 집에만 처박혀있는 놈의 정보를 무슨 수로 캐낸다는 말입니까!"
거지라기보다는 대지주 밑에서 일하는 악랄한 마름 같은 인상의 사천분타주는, 타구봉을 땅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이미 손룡의 의원에 송문이 들어가있지 않느냐! 송문 그놈에게서 뭐 들어오는 거 없느냐?"
"없으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분타주의 휘하로 보이는 거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황보효선의 눈도 영 옹이구멍은 아니라, 그들의 대화가 영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 분타주. 그러니까 손룡에 대한 정보는 못 찾겠다, 그 말인가?"
"방주께서 명하신 일인데 저로서도 면목없습니다만, 이놈이 이리도 못하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방주, 노희방의 질문에 분타주는 냉큼 대답했다.
이미 개방 사천분타는 총력을 다해 은령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사람 하나하나가 부족해서 죽어날 지경인데, 거기에 난데없이 방주가 나타나서는 손룡이 수상하니 그의 뒤를 캐보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황보효선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방주에게 직접 탄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바탕 연극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잠시 얼이 빠졌지만, 노희방은 익숙한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 잘 알았다. 이 빌어먹지도 못할 놈들."
노희방은 자연스럽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분타주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이 그녀들의 앞에서 모습을 쓱 감추었다.
개방 특유의 분방한 위계질서 앞에서 넋을 잃은 황보효선은, 노희방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하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황보 여협, 미안합니다. 이 거지소굴까지 와주셨는데 방도들이 보다시피 정신없이 바쁘군요."
"아... 아닙니다."
"당분간은 황보 여협께서 나설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거지소굴에서 머물러야한다는 말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황보효선은 노희방에 말에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개방 분타에서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역시도 조금은 안도할만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개방이 강윤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안심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노희방을 따라나선 것은, 혹시나 강윤이 개방에 꼬리를 잡히는 일이 생길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치 그녀가 안심하는 것은 못 봐주겠다는듯, 노희방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리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조만간 본방이 나서지 않더라도 강 소협이 바빠질테니까요. 그 때쯤이면 직접 접근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죠."
"네?"
황보효선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고, 노희방의 대답을 듣고나니 과연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개방이 나서는 것보다도 더욱 곤란해질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좋지...?'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 되는 일이기도 했고.
황보효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희방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뒷조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본다면 강 소협은 언젠가 정파무림의 큰 기둥이 될 겁니다."
"..."
"만약 그의 무고가 밝혀질 경우 저는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겠죠.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부디 제 과한 의심이길 바랍니다. 진심으로요."
과연 과한 의심일 것인가.
그것을 확신할 수 없는 황보효선의 불안감은 커져만 갈 따름이었다.
내가 여자를 늘려서 여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단 한 명과만 하룻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내력이 깊어진만큼 더 짧은 시간에 만족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여자들이 욕구불만을 느끼는 경우는 없지만, 섹스가 더 거칠게 하는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닌 것이다.
"오늘은 둘이서만 하자구요?"
"그렇다."
그래서 오늘 저녁, 주여린이 내게 둘이서만 하자는 제의를 해오자, 나는 자연스럽게 양하정을 돌아보았고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주여린과 양하정 둘과 동시에 잘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주여린이 방실방실 웃는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아이가 생겼어요?"
"이런, 본녀가 말하려고 했거늘!"
아무래도 아이가 들어섰으면 이제 슬슬 진맥으로도 확정적으로 알 수 있을 시기라서 대충 찍었는데 정답이었나보다.
애초에 주여린이 이렇게 대놓고 좋아할 때라고 해봐야 전부 견이를 비롯한 우리 애들이 관련되었을 때뿐이기도 했고.
"이런 것 정도는 여자가 말하게 하거라... 너도 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하고 싶었지 않느냐?"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다시?"
"오늘은 둘이서만 하자구요?"
"아하하하하!"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물어보자, 주여린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군주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아, 하아... 정말 이상한 자로구나."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나?
주여린은 웃음으로 가빠진 숨을 고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다..."
"예."
"본녀가, 네 아이를... 푸흐흐흐흡...!"
아무래도 아이를 가져서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가, 웃음이 굉장히 헤퍼진 주여린은 내게 와락 안기면서 말했다.
"네 아이를 품었노라! 기쁘더냐?"
"네. 엄청 기뻐요."
이건 진심이었다. 주여린의 몸에 문제가 없으면, 내 슈퍼 정자를 받고서 아이를 임신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또 생긴다는 것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고마워요. 당신도, 아이도. 나한테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가, 갑자기 왜 이러느냐... 나, 낯간지럽구나..."
자기가 먼저 안겨온 주제에, 주여린은 내가 마주 끌어안자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꼼지락거렸다.
"그, 그렇지! 주 의원에게 보여보니 아이는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혹시나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느니."
"...주 의원이요?"
"당연한 것 아니냐? 네 아이와 그 어미들을 돌보기 위해 그녀를 들인 것이 아니더냐?"
주여린은 당연하다는듯 말했지만 나는 약간 신경이 쓰였다.
대체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약선은 요 며칠 나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원래도 그리 나쁜 태도는 아니었지만, 좀 더 사근사근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음...'
생각이 지나쳤나? 주약선이 나에게 연애감정 비슷한 것을 품었는데, 주여린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도리어 그 감정이 악화된다거나...
"왜 그러느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만약에 곤란하다면 오늘 밤은 그냥 쉬어도 좋다만."
"아뇨. 그래도 좋은 일이 있는데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일단 당장 기뻐하는 주여린이 눈앞에 있는데 딴 생각을 할 수는 없지.
나는 주여린을 그대로 안아들고 그녀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