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제대로 자는둥 마는둥하면서 급하게 달려왔던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당연히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급하게 몰아치지만 않는다뿐이지 그렇게 여정이 느리지만은 않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와 팽연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너무 작잖니."
확실히 같은 아기지만 이젠 걷기도 하고 단어 한두마디 정도는 할 줄 아는 큰 아이 둘과는 달리, 이제 막 신생아를 벗어난 셋째 융이와 넷째 호는 걱정이 될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돌봐준다고는 해도, 자기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화씨일문의 사정도 있고 해서 지금껏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뿐이고, 사실은 여전히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두 분..."
"아니오. 우리가 돕기로 한 일 아니오?"
주약선이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하자 팽연화는 얼른 손사래를 쳤고, 어머니도 거들었다.
"이미 다 끝난 일로 더 감사하고 사과하는 일은 없도록 해요. 어차피 앞으로도 신세를 질 건데 계속 공치사를 주고받는 것도 이상하니까."
"제갈 여협..."
그렇게 훈훈하게 분위기를 정리하고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나는 주약선의 통통한 뺨 너머에 감춰져있는 여인의 미모를 겹쳐보고 있었다.
'뭐 이해는 하지만...'
다른 여자들에게 사정을 들어보니 납득은 했다. 현대 한국에서도 여자 혼자 살면 위험할 수 있는데 중세 중국에 무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렇게 추근대는 남자들을 주의하며 살아왔는데, 자기 나이대의 여자들을 몇 명씩 데리고 사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주 의원은 돌아가면 바빠질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저는 조금 피로한 정도지만 환자들이 아픈 것과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불끈 주먹을 쥐어보이는 그 모습은 정말로 고결하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주약선을 자빠뜨리기로 진작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내 여자가 되어준다면 나 이외의 다른 남자가 얼쩡대지 못하게 막아줄 생각이니, 오히려 그 쪽이 효율이 좋을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나는 그렇게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사천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계속 말을 몰았다.
"이게 무슨 꼴인가!"
"죽여주십시오!"
황두명은 일귀의 절절한 외침도 듣기 싫었다.
화씨일문 따위를 없애기에는 과분하기 그지없는 전력을 쥐어주었다. 대체 호령이 어디에서 전력을 보충해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 합하면 백 명에 가까운 고수들을 붙여주었다.
그 중에서 몇몇은 절정 수준의 무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도리어 어설프게 무위가 높은 탓에 우선적으로 공격당해 반수 이상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지 않은가.
"강윤 그 자만 아니었더라도..."
"멍청한 놈들! 궁지에 몰린 쥐라면 얼른 물어죽이고 돌아왔어야지! 시간을 끌어 그 상황을 자초한 것은 네놈들이 아니더냐!"
이귀가 변명처럼 입을 열자 추상같은 외침이 터져나왔고 일귀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대인께서 명하신 바를 완수하지 못한 몸으로 무슨 변명을 더 하겠습니까? 하오나 대인, 부디 제가 한 말씀만 올리도록 해주십시오."
"...말해보거라."
황두명은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일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가 일을 틀어지게 한 것은 분명 저희의 방심 이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하오나 강윤, 그 자는 반드시 지금 죽여야합니다."
"그깟 애송이를 핑계로 삼을 생각이라면..."
"애송이가 아닙니다. 그 자는 저와 삼제를 동시에 상대하고도 거의 대등한 승부를 펼쳤습니다."
"뭐라고...?"
황두명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지만 삼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얼마나 악랄한 암기에 당했는지, 기식이 엄연하여 생명조차 장담하지 못할 부상을 입은채 누워있는 것이다.
자신을 영초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노의원의 말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했다.
내부를 파괴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암기가 바스라져 작은 칼날이 되어 체내를 헤집어놓은 탓에 주요 혈도가 걸레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언감생심 무공을 다시 펼칠 생각은 하지 말아야된다고 하니 사실상 삼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놈이 제아무리 내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사실입니다, 대인! 놈은 마물이나 다름없는 놈이란 말입니다!"
황두명은 일귀를 신뢰했다. 그의 직속 수하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나기도 했지만, 진중하고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수하들 중 수좌에 앉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째서인지 믿기가 어려웠다.
"죽여야합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 초절정고수, 아니 그보다 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혈마 같은 자가 강호에 또 하나 나타나서 우리를 적대한다면...!"
"시끄럽다! 놈이 아무리 무공이 빠르게 늘어났다고 해도 그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대인!"
놈은 애송이다. 애송이여야한다. 죽여서는 안 된다. 놈은 대국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한다.
"크윽...!"
"대인! 괜찮으십니까?"
열변을 토하던 일귀는 황두명이 이마를 짚으며 휘청이자 얼른 일어나 그를 부축했지만 황두명은 그 손을 밀쳐냈다.
"되었다... 너희는, 피해 상황을 정리해서 보고할 준비를 갖추도록, 해라... 호령에게는 내가 보고할 것이니..."
"...예, 대인."
믿고 맡겨준 일이 실패로 끝난 부끄러움도 무릅쓰고서 충언을 올렸지만 흐지부지되어버린 탓에, 일귀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핏발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주군의 명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일귀는 처량하게 물러나야만 했다.
'대체...'
은령회와 자신들 모두 알게 모르게 강윤이라는 자의 손에 몇 번이나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거늘, 주군은 어째서 그 자를 방치하려고 하는가, 일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황두명의 이상한 고집을 꺾을 방법은 없고, 그의 명이 없다면 그들은 손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막내인 사귀의 허리에 채워진 호조의 발톱이 모조리 박살난 것을 시야에 담으며, 일귀는 그렇게 남몰래 한 가지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거라!"
근 보름 가까운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강윤이 우렁찬 목소리로 귀가를 알리자, 입구 근처에서 사내가 언제 오나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주여린이 가장 먼저 뛰쳐나가서 그를 맞이했다.
"잘 다녀왔느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간 일은 잘 되었느냐!"
"잘 다녀왔어요, 군주님."
주변에 혹시 다른 사람이 없나 확인한 다음 부드럽게 자신을 안아주는 사내의 품 속에서 주여린은 사내의 체취를 콧속 가득 흡입했다.
그만큼 사내가 사라지고 나서 일상이 지루해진 여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다른 여인들은 나름대로 하는 일이 있었고, 심지어 매소향마저도 강윤이나 당혜원이 하던 일을 대신 하고 있었지만 황족인 그녀가 뭐라도 하겠다고 하면 모두가 손사래를 치니 그녀로서는 책을 읽고 난을 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 재미를 붙인 무공수련도 아이가 들어섰으니 당분간은 운기행공만 하라고 하는데다가, 밤일도 뚝 끊어지니 믿을 것이라고는 아이들의 통통한 뺨을 만지작대는 시간뿐이었다.
"다친 곳 없고, 간 일은 잘 처리됐어요."
"잘 되었구나! 훌륭하다!"
그런 상황에서 제 생활의 중심이던 남자가 무사히 돌아온데다가, 목적도 이루고 돌아왔다니 이보다 기꺼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내의 품 속을 실컷 즐기는 와중에, 슬슬 다른 여인들도 사내를 맞이하러 나타나는 듯하자 주여린은 아쉬워하면서도 슬쩍 사내를 놓아주었다.
"소영, 별 일 없었어요?"
"네. 안 다치고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소향, 일 안 힘들었어요? 급한대로 일을 떠넘기고 가서 미안해요."
"별 일도 아니었어. 그런데 그거 전부 네가 만든 것 맞아?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하정, 왜 빠져요? 이리 안 와요?"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게 순서대로 여인들을 한 번씩 끌어안아주던 사내는 예상치 못한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혜매!"
두 팔을 벌리며 사내가 반갑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남궁혜는 뚱한 표정으로 버티고 서있었다.
사내는 내심 찔끔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서 남궁혜 역시도 끌어안았다.
"언제 왔어요? 오면서 힘들지 않았어요?"
"...네."
며칠 전에 도착한 남궁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여인이 한둘이 아니라고는 들었지만 이건 너무 많지 않은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 구성은 더욱 다채로워져서 황제의 손녀까지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밝게 웃으며 안아주는 상대에게 뭐라 험한 말을 쏘아줄 정도로 그녀는 성품이 모질지 못했기에, 무언으로 항의하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어휴...'
자신이 참아야지 하고서 마주 안는 남궁혜였지만, 사내가 주약선을 자빠뜨릴 궁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주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남궁혜는 사내와 함께 집을 비우고 있어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여인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마지막으로 이 곳의 책임자라는 여자 의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남궁혜입니다. 여기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주약선이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아이가..."
"네. 임신했어요."
상대가 의원인데다 여인이었기에 남궁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직 배는 조금도 튀어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입덧을 겪었고, 아이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는 의원의 판단 역시 받았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바로 진맥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으시겠어요? 우선 여독을 푸시는게..."
"저는 괜찮습니다. 오는 길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왔기 때문에 전혀 문제없습니다."
남궁혜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사양했지만 주약선은 억지로 그녀의 손을 끌다시피해서 자신의 방으로 갔다.
약재가 쌓여있어 그 냄새가 가득 배인 방에 강제로 앉혀진 남궁혜는 손목을 내밀었고 주약선의 손이 맥문을 잡아갔다.
"지금으로서는 별 이상이 보이지 않는군요. 섭생에 주의하시기만 하면 충분할 듯합니다. 몸에 좋은 음식들을 적어드릴테니 그 재료가 들어간 음식들을 드시면 더욱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인데요."
주약선은 물흐르듯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써내려간 다음, 남궁혜에게 건네주었고 그녀가 방을 나서면 자신이 없는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의원들에게 확인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남궁혜는 종이를 받아들고서도 바로 나가지 않았다.
"저, 주 의원님? 여쭤볼게 있는데... 혹시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주약선은 남궁혜와 눈을 마주하고, 그 눈에 비쳐보이는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아이를 품은 여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안감이려니 생각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남궁혜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저,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그..."
남궁혜가 더듬더듬 말하는 것을 참을성있게 듣던 주약선은 이어지는 말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밤에, 부부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괜찮을까요?"
"...일반적으로 그리 권장되는 일은 아닙니다. 아이가 양수로 보호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약한 시기이기는 하니까요."
강윤의 여인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그에게 물든 모양이었다. 주약선은 일그러진 표정을 억지로 도로 펴다가, 남궁혜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 하지만 그냥 하는 것은 아니고... 운기행공을 하면서 뱃속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내력으로 막이..."
주약선은 분명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름아닌 강윤에게서, 내력으로 아이를 보호한다면 괜찮겠느냐는 확인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운기행공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이것은 남궁혜가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는 탓이 컸다. 주약선이 사내와 여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강윤이 익힌 것이 색공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혈마의 제자라는 사실까지는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강호 경험이 일천한 남궁혜는 무심결에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까지 입에 담은 것이다.
"아마 그렇다면 괜찮을 겁니다. 그, 그 보호가 깨진다면 내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겠죠."
"그렇겠죠?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이가 생긴 다음에도 사내가 제 몸을 탐해올 것은 거의 틀림없었기 때문에 남궁혜는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 탓에 일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내의 비밀의 편린을 알게 된 주약선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일전에도 상대가 감추고 있는 사실을 몰래 캐낸다는 것이 마냥 떳떳하지는 않았는데, 이젠 상대에게 은혜까지 입은 상황이었다.
본의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그런 몸으로 상대가 감추고 싶어하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나니 주약선의 양심의 가책은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걸 어쩌지...'
모른체하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요, 알게 되었다고 밝히는 것도 떳떳치 않았으니 주약선의 심란함은 더해만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