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효선은 도망치듯 자리를 비켜나왔다. 생각해보니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자신에게 내어준 처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화씨일문의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급하게 처소를 물색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어째서 사내의 옷을 덧입고 있는지 상대가 묻지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격렬한 비무를 벌인 다음이었으니 옷이 해지거나 찢어지는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이토록 그녀가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단 하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제 젖가슴을 보고 아랫도리를 팽팽하게 부풀리던 사내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선머슴 같은 성격에 나이를 먹은 이후로는 더욱 털털해졌다고는 해도 그녀 역시 여인인지라 최소한의 수치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사고에 가까운 형태로 육체를 내어줬다고는 하나, 젖가슴을 내보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는 당연히 아닌 것이다.
"황보 여협께서는 여기를 쓰시면 되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원래 손님들을 맞아들일 것을 전제로 지어진 곳이 아니어서 부득이 병자들이 사용하는..."
"충분하오! 고맙소!"
안내인이 무안하게 여길 정도로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간 황보효선은 짐을 푼 다음 덧입고 있던 겉옷의 앞섶을 열고는 혀를 찼다.
짧은 일정이라고는 하지만 갈아입을 옷 정도는 챙겨온 것이 다행이었다. 무복은 가슴팍이 너덜너덜해진 것이, 도저히 고쳐입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큼직한 가슴이 무복에서 풀려나와 출렁이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본 황보효선은 홀린 것처럼 두 손으로 제 가슴을 밀어올렸다.
부드럽고 묵직한 것이, 제법 만지는 감촉이 좋았다.
'정말... 이런게 좋은가?'
이것을 꽉 틀어쥐어진채 거의 하룻밤 내내 범해졌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이어서 조금 전 사내가 젖가슴을 보자마자 눈빛이 확연히 바뀌던 것이 떠올랐다.
남편에게 죄스러워서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졌지만, 사내의 불길 같은 젊은 정력은 그녀의 기억 한 곳에 확실하게 그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가슴을 만지작대다가, 쾌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려고 하는 순간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안 되지, 안 돼."
황보효선은 당황해서 얼른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빈틈없이 차려입은 무복이 몸을 감싸자 어쩐지 마음가짐까지도 잘 여며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건은 끝났어. 할아버님께도 같은 보고를 받으시더라도 은령회 쪽에 전력을 집중해주실테니 내가 할 일은 오히려 없겠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림맹 총단으로 돌아가는 일뿐이고, 사내를 다시 볼 일은 없다. 그 말인즉슨 이런 이상한 기분에 다시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내에게 옷을 돌려주기 위해 잘 접어주는 척하면서 그 옷에 배인 땀냄새를 살짝 맡는 황보효선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동행의 행보 때문에, 그녀는 당분간 사내와 얼굴을 마주하게 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황보효선을 보낸 다음 강윤은 자신의 여인들에게 황보효선과 나눈 대화, 그러니까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다행이로구나. 하지만 설마 구파에서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여인들은 무림맹이 직접 나선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한편, 구파 가운데 일부가 정파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정파로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 실체는 색마인 강윤에 비해 여인들은 정파에 강한 소속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들로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거니와, 그녀들이 나서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묻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강 소협, 이제 괜찮겠습니까?"
"노 방주...?"
개방 방주, 노희방이 강윤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시간이 지난 탓인가 술냄새가 조금 덜했는데, 그녀의 태도는 어쩐지 아직도 취한 것처럼 건들건들했다.
막상 후기지수인 강윤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 태도와는 그 느낌이 어긋나고 있어 좀처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과연 고의일까, 우연일까.
"웬만하면 강 소협이 스스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만, 바로 내일 출발인지라 저로서는 오늘 안에 이야기를 끝내두고 싶더군요."
"꼭 필요한 일인가봅니다?"
"아무래도 사건의 정황파악은 당사자에게 듣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강 소협이 나서기 전의 내용은 화 대협에게 이미 다 듣고 왔으니 이젠 강 소협의 이야기도 들어보고자 합니다."
"아까 이야기하신 내용은 이번 사건이 아니라 꽤나 제 개인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고 기억합니다만..."
"그랬습니까?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요."
노희방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강윤은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억지로 폈다.
황보효선이 알아온 정보는 개방, 그러니까 노희방을 통해서 무림맹에 입수된 정보였다.
그녀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제 하렘이 낱낱이 해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경계심과 인내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가실까요?"
"아, 소협은 말이 통하는군요. 제가 하고 싶던 말입니다."
한편 노희방 역시도 상대가 과연 그냥 애송이인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상대인가를 가늠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화운천으로부터 전해들었던 무위와, 황보효선과 벌였던 비무를 보고서 그녀는 강윤에게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노희방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하는 자인 거지?'
최근 들어 강윤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개방이 그 이름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전혀 없다시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문도 비밀, 구룡쟁패 이전과 이후의 행보도 알려진 것이 없는 자.
그녀쯤 되는 위치에 있는 고수라면 후기지수 한 사람의 행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개방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특히나 그런 모순적인 행동을 보이는 자라면 더더욱.'
구룡이라는 위치를 탐한다는 것 자체가, 명성을 드높이고 싶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데 막상 구룡이라는 이름을 얻은 다음에는 그 행보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사문이 없는 자라면 꾸준히 협행을 하여 명성을 높여야할 것인데 1년 가까이 움직임이 없다시피했다.
그나마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궁세가의 혼례식에 참석했던 것과, 당시 벌어졌던 참사에서 적들과 맞서싸웠던 것뿐이고 그 이후로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은 사천에서 제법 유명한 의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니, 대체 이름을 알릴 생각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는 자였다.
"자,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겠습니까?"
사내의 맞은편에 앉은 노희방은 질문을 건네는 사내의 눈을 의심받지 않게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우선 어떤 경위로 도움을 주기 위해 왔는지부터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의원을 운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좌장격의 의원이 화씨일문의 제자였는데, 그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이야기.
평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갚기 위해서 왔다는 이야기.
마침 그의 곁에는 도움을 줄만한 선배 고수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숫자면에서 열세인 상황이었지만 기어코 적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
'이상한 점은 없는데...'
말만 들어서는 지극히 모범적인 정파 후기지수가 아닐 수 없었다.
평상시에는 민초를 위해 의원을 운영하고, 위기에 빠진 누군가가 있을 때는 분연히 떨쳐일어나 사악한 자들과 맞서싸우는.
마치 모든 욕망을 거세한 도인 같은 자가 아닌가.
'그래서 더 수상해.'
노희방은 욕망이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정파제일검이자 그녀가 내심 대협이라고 인정하는 검성조차도 기록을 뒤져보면 명예욕의 편린을 엿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만약 욕망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거라면, 그 자는 욕망을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잘 감추고 있는 것이고, 그런 자는 대개 위험하기 마련.
'심지어 무공까지 감추고 있었어.'
그녀가 보기에 불과 1년 남짓한 시간동안 일류 상급에서 절정 중급으로 무위가 높아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검선 여동빈이 지상에 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지도해준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 그것은 깨달음을 얻더라도 내력이 그만큼 축적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째서 무공을 감추고 있었는지, 왜 그것을 이제 와서 드러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강 소협, 내일 화씨일문의 여러분은 무림맹으로 출발하게 됩니다만, 소협은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계획... 말씀입니까? 특별한 계획은 없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강윤이 아무런 꿍꿍이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속셈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본거지인 의원에 감춰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다른 시기였더라면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파를 노리고 암약하는 의문의 조직에 구파가 손을 보태고 있으며, 사패의 일인까지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 되고보니 작은 의심 하나도 허투루 넘기기가 어려웠다.
'마침 사천이라면 놈들이 나타난 전적이 있는 곳이야. 이참에 조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차 사천 분타에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한 노희방은 그 날 저녁 강윤과 꽤나 친분이 있어보이던 황보효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 정도라면 정보수집에는 도움이 못될지언정 강윤과의 접촉에 쓸 수 있고, 믿을만할 거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인선이었으나 정작 황보효선으로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강윤과는 나름대로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는 사이 아니던가.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방치했다가 노희방에게 자칫 마교와의 연줄을 들켜 사내가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일이 꼬여 강호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상상하니 황보효선은 속이 거북해졌다.
결국 두 여인은 화씨일문이 무림맹 주작단의 보호를 받으며 보금자리를 옮기는 사이, 드러나지 않게 갈라져나와 사천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