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15화 (315/383)

밀푸색마 EP.315 여태 날 속였어요? (1)

팽연화는 괴상한 가면을 쓴, 아마도 사패 가운데 편패일 가능성이 높은 여인이 멀어지자 서서히 몸의 긴장을 풀었다.

겨루어본 적은 없으나 분명 쉬운 상대가 아니었을 터. 상대에게 비세를 보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짐짓 호전적으로 보였을 뿐, 그녀라고 싸우는 것이 좋을리가 없었다.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여기에 예상 이상으로 전력이 많이 남았다고 해서 왔네."

적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팽연화가 선두에 선 이상 어려움은 없었다.

몇몇은 달아났고, 몇몇은 베었으며, 몇몇은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자 독을 먹고 죽었다.

하지만 일부를 잠시나마 죽지 못하게 붙들어둔 덕에 이 곳의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화씨일문의 의술이란 정말 대단하더군. 설마 극독을 먹은 자도 잠시라면 살려낼 수 있다니..."

"그랬군요."

하지만 설마 그만한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가 나서지 않아 지금껏 눈앞의 사내가 살아있는 것을 천행이라고 보아야할까?

"아무튼, 고마워요. 연화가 아니었으면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그, 그런가?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흠흠..."

도를 쥐지 않은 왼손을 몰래 잡아오는 사내를 보면서 팽연화는 혹시나 누가 보지는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투박한 손이 부드러운 여인의 손을 조물딱대고, 뺨에 입이라도 맞추려는듯 사내의 얼굴이 다가오는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다가오는 기척에 와락 표정이 찌푸려졌다.

"아니... 일이 전부 끝난 것이오?"

지쳐있기는 하지만 제법 기력이 돌아온 모습의 화운천이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입을 열자, 진작에 사내를 살짝 밀어낸 팽연화가 나섰다.

"그렇소. 이제 적들은 다 물러갔으니, 안심해도 좋소."

그 다음 화운천이 팽연화의 정체를 알고 기함하고, 어떻게 자신들을 구하러 왔느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팽연화가 나중에 답해주겠노라고 얼버무리고 나서야, 그들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고맙소!"

주변을 대략 치워갈 때쯤, 화씨일문주 화운악을 비롯한 사람들이 돌아왔다.

화운악은 내 손을 꽉 잡으면서 열렬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는데,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내 어쩔 수 없이 아우를 두고 가야했으나, 형으로서 어찌 마음에 걸리는 바가 없었겠소? 그런데 강 소협 덕에 이렇게 아우를 무사히 다시 보게 되었으니...!"

"형님, 저보다 더 고마워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화운천이 낄낄 웃으면서 화운악을 말렸지만, 화운악은 멈추지 않았다.

"실로 강호 정협이외다! 이것을 협행이라 하지 않고 무엇을 협행이라고 할 수 있겠소!"

"부끄럽습니다."

진짜 부끄러웠다. 명색이 구룡이란 이름만 달아놓고 밀프만 따먹고 다녀서 그런가.

그래도 고맙다는 소릴 들으니 괜찮은 기분이긴 했다.

화운악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돌면서 감사인사를 하는 동안, 나는 주약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거의 없어요. 하지만..."

주약선은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기관진식은 거의 박살이 났고, 사전에 잠입시킨 놈들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몇몇, 그리고 수로까지 스스로 무너뜨렸다.

다시 안 찾아오면 다행이지만,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무림맹의 도움을 받아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러고보니 적들에게서 알아낸 정보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걸 무림맹에 제공하면서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요?"

"글쎄요..."

아무래도 그다지 대단한 정보는 얻어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무림맹이라고 하니 황보효선이 떠올랐다.

'그 여자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되는데.'

어찌어찌 비밀을 감춰달라고 해서 쭉 이어지고는 있지만, 막상 다시 만날 생각을 하고 보니 검성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본문이 강호에서 제법 명성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무림맹의 전력을 나눠달라고 하기에는 강호 정세가 심상치않으니까요..."

무림맹의 본거지인 서안까지는 성 한두개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무시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강 소협이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이제 뒷일은 오ㄹ... 문주께서 결정하실 일이니까요."

내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었는지 주약선이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오늘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칠 지경이에요."

"...그래도 혹시 뭔가 좋은 방법이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주약선은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여기 있는 동안 머리 좀 굴린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간단히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 일단 우리는 식사를 대접받았다.

엄연히 희생자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잔치 분위기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신경쓴 대접에 우리는 지난 며칠간 강행군을 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가볍게 술도 한 잔씩 대접받고 있는데, 화씨일문주가 계속 팽연화에게 며칠 쉬다 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 일행에서 남들 보기에 일행의 대표자는 팽연화였으니까.

"저희로서도 은인을 겨우 하루만에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며칠 묵어가게 되었다.

어차피 강행군을 한 직후 바로 싸움을 벌이느라 우리도 피곤하기는 했으니, 잠시 쉬어가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며칠씩 머무르기에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머니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우리가 머무르면 여기가 안전해지잖니.]

물론 은인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머무르는 동안은 여길 보호해줄 거라는 계산도 은연중에 깔려있을 거라고.

팽연화가 그것까지 고려해서 거절한 건지는 모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라고 섹스 못할 것도 없고.'

기껏 주약선을 위해서 도우러 왔는데 뒤처리가 미흡해서 헛수고가 되어버리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저희가 여기 있을 수는 없을텐데...]

[글쎄,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어머니의 말이 냉정하게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화씨일문주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데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하고 의견이나 내면 낼까.

[무림맹이 도움을 줄 여유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다못해 여기가 아니라 섬서 끝자락에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사정이 나았을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니, 어머니도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었다.

그 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니, 아예 여기 사람들이 무림맹에 들어가서 살면 안 될까요?]

[무슨...]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살짝 모으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여기는 무가가 아니었어.]

[네...?]

이번에는 내 쪽이 어머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역시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무가였다면 외부의 공격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이 큰 흠이 된다.

자기들이 그만큼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약한 무가는 존재가치가 의심받는 것이다.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거대문파일 경우 그 영향력 자체를 상실할 위험성까지 더해진다.

하지만 화씨일문은 무공은 부산물이나 다름없을뿐 근본이 의원이니 애초에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고, 따라서 내 생각은 괜찮은 생각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역시 문주 본인한테 말하기는 조금 그렇고... 주 의원에게 말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주 의원은 식사를 일찍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더구나.]

솔직히 검성 본인은 여전히 겁이 나지만, 어차피 내가 무림맹에 갈 것도 아니었다.

화씨일문이 통째로 무림맹에 가면 당연히 가까이 있는 무림맹 맹원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치료를 다 해줄 거고, 그 가치를 안다면 마중나올 고수들 정도는 파견해주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약선을 찾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후우..."

주약선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야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강윤 앞에서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야 했지만 사실 그녀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 있어준다면야 안심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 둘 수도 없는 노릇. 기껏해야 며칠이 한계일 것이고 그녀 역시도 떠나야할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허어, 땅 꺼지겠소."

"...너야말로 여기서 무엇하는 것이냐? 천아."

"누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어렸는데 이 동생이 못 본 척할 수 있겠소?"

남동생, 화운천이 능글맞은 소리로 말하자 주약선은 혀를 찼다.

"그렇게 다 보이더냐?"

"실은 한숨 쉬는 것을 보고 넘겨짚은 거요."

주약선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따라 웃은 화운천이 그 옆에 나란히 서자, 주약선은 입을 열었다.

"너는 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이냐? 본문의 안전이..."

"안 될 리가 있겠소? 하지만 당장 하루이틀 안에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근심하지 말라는 말이오."

남동생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항상 뜻대로 되던가.

"누님이 데려온 고수들도 있잖소? 내 들어보니 며칠간은 여기에 머무른다고 하니 그동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그러냐...?"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동생의 말과는 달리 그동안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안감에 쫓길 필요는 없으리라.

"그런데 말이오. 그 모습은 대체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요?"

주약선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갑자기 남동생이 꺼내온 질문에 가슴이 뜨끔했다.

"사내들이 추근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내 잘 알지만, 본문에 돌아와서도 그럴 필요는 없지않소?"

"...다 사정이 있단다."

주약선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얼버무리는 것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발휘해 동생의 목숨을 구한 협객이 실은 제 어미 나이의 여인에게 사족을 못 쓰는 색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대로 말했다가는 그녀가 실성했는지 의심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그렇소? 생각해보니 팽 여협 일행이 있기는 하구려. 하지만 그 분들도 누님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와준 것인데 너무 애써서 감추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동생의 말을 듣고보니 어쩐지 주약선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당신, 정체가 뭐에요?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거야 상관없지만,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우리가 함정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곳에 가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매소향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흔쾌히 도움을 준 강윤을 지금까지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을 후볐다.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할까?'

사내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가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가주의 여동생 화운영'이 아니라 '화씨일문에서 수학했을 뿐인 주약선'으로 대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심의 가책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약선은, 동생의 목소리에 상념이 끊겼다.

"오, 강 소협! 식사는 잘 하셨소?"

"화 대협께서도 계셨군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화들짝 들어보니 어느새 강윤이 제법 가깝게 다가와있었다.

당황해서 남동생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전음이 돌아왔다.

[거리가 있어서 절대 들렸을리 없으니 염려마시오.]

안심시키듯 들려오는 전음에 이어서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궁시렁거림이 따라붙었지만, 아무튼 주약선은 안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저기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내가 제 아랫도리와 관계된 일이 되면 무서울 정도로 눈치가 좋아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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