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314 꼬마야 (3)
빠악
"크억...!"
"이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어떤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친 다음 나는 자기 동료가 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서 덤벼드는 적을 보고 일단 뒤로 빠졌다.
일 대 일로 붙으면 삼 초 안에 해치울 자신이 있었지만 그러고 있는 사이에 더 몰려오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데...'
화운천이 안에서 농성하던 몇몇 문도들과 장로들을 데리고 나올 때까지 버티거나 다 쓸어버려야하는데, 시야가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적들이 더듬더듬 뭉치기 시작하니 처음처럼 편하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혜원이 삼귀란 놈과 싸우고 있느라 진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진법이 내 입맛에 맞게 잘 움직여주질 않는 것도 한몫했다.
'이제 슬슬 빠져야되는데...'
당혜원에게는 무리하게 버티지 말라고 한 입장에서 말하기 참 그렇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도 같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도망가지 말고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게다가 악착같이 쫓아오는 이 일귀라는 놈이 따라붙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 확실히 점점 놈들이 적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전해졌다.
나는 현음지를 튕겨내 음유한 지풍으로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이 일귀의 목을 노렸지만, 일귀는 자신의 앞에 도를 수직으로 세워내 막아냈다.
꽤 절묘하게 다루던 도를 무식하게 앞세워서 달려드는 것을 보니 저쪽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긴 한 모양이었지만, 나도 급하기는 매한가지.
"여기다! 여기 이놈만 죽이면 끝이다!"
설상가상으로 모여있던 적들이 일귀의 호령에 따라 내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한참 하수인데다가 저들끼리 엉켜서 나를 베기는커녕 자기들끼리 베지만 않아도 다행인 놈들이었지만, 확실히 빠르게 움직이는데는 방해가 되었다.
어, 근데 얘들 주변이 잘 안 보이는 거잖아? 나는 내력으로 목울대를 조정해서 작게 목소리를 내본 다음 외쳤다.
"아니, 이젠 뒤쪽이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너희의 뒤쪽으로 도망쳤다! 뒤로 돌아라!"
"뭣...!"
변성한 목소리에 속아 적들이 뒤쪽으로 도는 것을 보고 내가 흐뭇해하는 사이, 일귀는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말을 믿지마라! 이놈은 가짜란 말이다! 다시 뒤로 돌아라!"
"이 가짜놈이 말은 잘하는구나! 얄팍한 술책을 부리는 이놈의 목은 내가 반드시 베어주마!"
까가가강
일귀의 도가 분노에 힘입어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만큼 가벼워진 초식은 내 손에 실린 역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밀렸다.
적들도 뇌가 있다면 내 말을 진짜가 했든 가짜가 했든 소리가 들리는 곳에 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겠지.
과연 다시 몸을 돌리는 졸개들이 다가오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현천지기를 끌어올려서 손끝에 실은채 빠르게 일귀를 향해 장력을 세 번 연달아 밀어냈다.
셋으로 중첩되어 날아가는 장력을 일귀가 도풍을 풀어내 막아내는 사이 나는 숨이 턱 막히고 순간적으로 단전이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천양지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쐐애애액
양강지기가 송곳처럼 뭉쳐져 날아가는 강맹한 기세에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리고, 일귀의 눈에 얼핏 절망이 서린 것처럼 보였다.
'잘 가라.'
이놈을 죽이고, 당혜원과 합세해서 삼귀도 죽이고 나면 나머지는 떨거지들 뿐이다.
죽을 죄를 지은 놈이 죽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 이렇게 절망하는 시선을 보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떨쳐낸 지풍을 되돌릴 방법도 없었으니, 나는 아직 현천지기가 담긴 장력도 채 해소하지 못한 일귀가 천양지에 꿰뚫리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래, 원래는 그래야만 했다.
파스스스스
'뭐지?'
뭔가 붉은빛이 순간 빛나더니 수십줄기가 연달아 날아가던 천양지의 지풍이 허공에서 먼지처럼 흩어졌다.
나는 이변을 알아차리자마자 일단 그 자리에서 몸을 빼냈다. 일귀가 혹시나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싶었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
삼귀 쪽은 당혜원의 암기를 피하느라 바빴고, 졸개들에 이르러서는 내 수법을 파해할 수 있을만한 실력이 없다.
"대체 누가..."
"꼬마야."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귀를 울리는데, 나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분명히 조금 전에 살필 때까지는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쯤하지 않으련?"
나는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직후 여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삼검을 찔러넣었음에도, 걸리는 것이 없자 삼귀는 약이 올라 외쳤다.
"이 젖통만 커다란 미련한 계집이 하는 짓은 미꾸라지 같구나!"
이미 한 차례 강윤에게 수모를 당한 탓에, 삼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였다.
검수로서 검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분질러진 탓에 본래의 무위를 온전히 발휘하지도 못함이니 화가 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노여움 때문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점 역시도 부정못할 사실.
쉬이익
손가락만한 날이 달린 비도를 몇 개를 튕겨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지경인데, 혼란을 틈타 은밀하게 다가오는 공격에 자잘한 부상을 입으며 연신 손해만 보고 있었다.
'한 방이면... 한 방이면 된다. 저 망할 계집...!'
여인이 암기를 날리는 솜씨는 분명 제법이었지만, 거리는 계속해서 좁히고 있었다.
이제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한 방만 먹이기만 하면 그가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흡!"
또다시 허공에 흩뿌려진 비도들이 절묘한 간격과 속도로 날아왔지만, 삼귀는 노련하게 검을 휘둘러 빠르게 비도를 떨궈버렸다.
파직
"아니?"
하지만 그 비도 가운데 무언가가, 굉장히 허무하게 부서지는 것을 느낀 삼귀는 검을 바쁘게 휘둘러 방어를 형성하며 물러났고, 아니나 다를까 비도가 폭발해서 일어난 불꽃이 검막에 밀려 스러졌다.
"이, 이런 미친 젖소년!"
화약은 매우 위험한 기술이었다. 표적만이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비도로 위장한 암기에 화약을 채우고 다니다가 자칫 폭발이라도 한다면? 전투도 하기 전에 치명상부터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혜원은 당혜원 나름대로 다 안전책을 강구하고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그녀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까부터 젖, 젖. 자꾸 남의 젖가슴으로 뭐라고 하는데 당신의 하물은 새끼손가락만한가보죠?"
"뭐, 뭐라고?"
당혜원은 삼귀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남자가 좋다고 하는 제 몸에 대해서 저런 수컷으로서도 무림인으로서도 떨어지는 자가 어딜 함부로 떠든다는 말인가.
"미친 계집이었구나!"
"무슨...? 아."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 사내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탕녀 취급당하기 딱 좋은 언행이라.
당혜원은 당혹스러웠지만 모욕을 당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삼귀가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해오는 것을 보고 이건 이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사사삭
다시 한 번 검영이 흩어지며 엄밀한 검막으로 앞을 막은채 전력으로 돌진해오는 삼귀의 모습에 당혜원은 비도를 던져 맞서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불안감을 느낀 삼귀의 눈에 당혜원의 눈이 살짝 위쪽을 스치는 모습이 들어오는 순간, 그는 검을 당겨 머리 위를 방어했다.
직후 머리 위에서 강침이 한꺼번에 쏟아졌지만, 그의 검막은 간신히 강침을 전부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망할 계집은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구나.'
한순간 폭풍처럼 쏟아진 강침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튕겨올라가고, 삼귀는 맹렬하게 휘두르던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당혜원이 노리던 순간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픽
"크어억...!"
당혜원의 손에서 떠나간 얄팍한 암기 하나가 그의 오른쪽 가슴에 박혀드는 순간, 삼귀의 몸을 끔찍한 고통이 덮쳤다.
"이게, 크아아악...!"
대체 뭐냐고 말할 틈도 없을만큼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이 손가락만한 암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당혜원이 그가 강침을 막아낸 직후, 지극히 짧은 한순간 긴장이 풀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못하리라.
한 점에서 시작해서, 전신이 붉어지는 암기이기에 일점홍(一點紅).
적에게 적중하여 내력의 보호가 끊기는 순간 잘게 바스라져 그 파편이 전신을 망가뜨리는 암기였다.
"휴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삼귀가 내지르는 비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당혜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진식을 제어해서 강윤을 도와야했다. 잘만 하면 여기에서 적을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당혜원은 그런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이건...?'
무지막지한 기세가 적아를 가리지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어져나오며 주변을 제압했다.
절정의 경지에 올라 어딜 가서도 부끄럽지 않을 고수가 된 당혜원 역시도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몸이 떨렸다.
고개를 돌린 당혜원은 강윤 앞에 선 가면의 여인이 그 기세의 중심에 서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녹령은 흥미로운 눈으로 눈앞의 청년을 살폈다.
젊은 나이인데 아마도 절정 중급 정도, 어쩌면 상급에 가까울지 모르는 막대한 내력을 품은 사내.
외모는 제법 준수한 편에 체구도 당당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눈이었다.
"눈이 맹랑하구나. 내 뜻에는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니?"
"...그건 아닙니다."
"흐음, 그럼?"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기세에 억눌려 숨도 쉬기 힘들 터인데 눈빛이 살아있었다.
저보다 아래라고는 하나 수많은 적을 농락하는 모습 역시도 괜찮은 볼거리였는데, 이렇게 기개있는 사내는 흔치않았다.
"꼭 복수를 해야한다는 생각까지는 없습니다만, 나중에 언제 또 올 줄 알고 이쯤에서 멈춘다는 말입니까?"
"싹을 뽑아놓아야겠다? 내가 나선다면 너희가 부린 잔재주로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이 모두 죽을텐데?"
"그럴 생각이셨다면 너무 관망이 길지 않았습니까?"
정답이었다. 은령회는 어디까지나 여러 세력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호령의 수하를 그녀가 돌봐야할 의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이쯤 해두려무나.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저놈들까지 죽게 내버려두기는 조금 그렇거든."
"그렇습니까?"
"아... 그런데 한 녀석은 조금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삼제!"
일귀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녹령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만한 암기술을 다루는 곳이라면 아마도 당가일 것인데, 어지간히 지독한 암기를 맞았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저쪽이야 뭐, 불행한 사고라고 치고. 어떻게 하겠니?"
"제게 선택권이 있는 문제입니까?"
"선택권이랄까... 내가 나서야했던 이유와 연관이 있는데 말이지."
그리고 녹령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자, 수풀 너머에서 한 사람이 부스럭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 알고 있었소?"
"그렇게 존재감을 풀풀 드러내며 다가와놓고 근처에서 기척을 감춘다고 숨어지겠니?"
도를 이미 뽑아든 채 서서히 걸어오는 팽연화에게 녹령은 손바닥을 휘휘 저었다.
"그만두렴. 나는 너와 목숨 걸고 싸우자고 여기에 온게 아니니."
"그럼 왜 나선거요?"
"내가 손 놓고 있으면 저놈들이 모두 죽잖니?"
죽을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치하는 것과, 내버려두면 반드시 죽는 상황에서 방치하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팽연화는 그 말을 납득하기는 했지만, 쉽게 긴장을 풀지 못하고 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대체 화씨일문과는 무슨 인연이 있기에 호북까지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실패했어. 인정할테니까 이만 돌려보내주겠니?"
"누구 마음대로...!"
"그러시지요."
강윤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팽연화는 당황했고, 녹령은 이채로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겠니?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싸워볼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확실히 허장성세일지도 모르긴 하죠."
순순히 사내가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녹령은 사내의 입이 다시 뭐라고 하는지 집중해서 보았다.
"하지만 다음에 올 때는 저는 더 강해질 거고, 그 때 당신들은 무조건 죽습니다. 이기고 싶으면 지금 덤비셔야죠."
"하아... 너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후 자신의 앞에서 이런 건방진 언사를 지껄이는 자들은 모두 그녀의 채찍에 찢겨죽었거늘, 어째서인지 녹령은 자꾸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 다음에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자꾸나. 알겠지?"
"웬만하면 다시 보고 싶지 않기는 합니다."
"아하하하하!"
녹령은 한 차례 웃고는 비틀대는 수하들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뒤로 물러섰다.
팽연화 역시도 그녀를 견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녹령 쪽은 전혀 그녀를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자리를 비켜나는 수하들을 마지막으로, 녹령이 가장 뒤에서 그들을 따르려던 그 때, 팽연화가 입을 뗐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오. 편..."
"아, 사람 잘못 봤어."
녹령은 자연스럽게 부정했지만,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팽연화도, 그녀 자신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녹령은 그런 예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