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313 꼬마야 (2)
가볍게 뻗어오는 손끝에 거력이 실린다.
무겁게 짚인 발이 땅에 닿으면 간격을 빼앗긴다.
일귀는 분명 절정도 안 되었던 자가, 1년도 되지 않은 시간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모할 수 있느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삼귀가 찔러넣은 검을 사내가 손등으로 밀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그럴 여유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사이에 끼어들어야만 했다.
"칫..."
그의 도가 쾌속하게 움직여 사내의 팔을 노리자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지력이 거두어지며 팽이가 돌듯 신형이 회전한다.
분명 두 사람이 함께 덤비는 덕분에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내는 이미 두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해있었다.
게다가 삼귀가 독문병기를 잃어 무공이 제 위력을 못 내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틈만 나면 삼귀의 목숨을 노리니, 언제 이 미세한 우위가 뒤집힐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하고 있소! 이대로 회의 일이 어그러지는 것을 지켜만 볼거요?!]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는 녹령에게 전음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저 관망만 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녀가 나서기만 하면 이런 장난 같은 판은 당장이라도 뒤엎을 수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놈...! 네까짓 놈이 감히...!"
삼귀는 삼귀대로 독문병기를 잃는 수모를 당한 탓에 눈이 뒤집혀서 덤벼드는데, 도리어 그것이 빈틈을 제공해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멍청한 놈!'
화씨일문주는 부하들이 잡아놓고 있다. 침착하게 합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인데, 막상 삼귀가 그러지 못하니 일귀 역시도 그에 휘말려야만 하는 상황.
근거리에 뿜어낸 장력에 검의 움직임이 둔중해진 순간을 노려 놈이 삼귀의 손목을 걷어차는 모습을 보고 일귀는 다시 혀를 차며 적의 등 뒤를 노렸다.
쉬아아악
"아니...?"
그 때,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몸을 뒤로 회전시키며 삼귀를 걷어참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신형을 퉁겨오는 사내를 보고서, 일귀는 서둘러 도를 당겨 쏟아져오는 권기를 방어했다.
까가가가강
"크윽...!"
나동그라지는 삼귀에게 시선을 줄 틈도 없이 정신없이 쏟아져오는 권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거리를 벌린 일귀는 신음성을 터뜨려야만 했다.
권격에 수없이 얻어맞은 도가 부르르 떨리고, 바닥에는 제가 힘에 겨워 밀려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력의 격차는 더욱 확연했다는 증거였다.
"이런..."
사내로서도 제법 비장의 한 수였던 모양인지,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일귀로서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놈은 삼귀를 노리다가도 언제든지 자신까지 노릴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수하들이 빨리 화씨일문주를 처리하고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딘가에 숨어서 암기를 날리고 있는 또 한 명이 견제하는 탓에 수하들의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했다.
'역시 천하제일인의 제자라 그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미꾸라지처럼 움직이다 한순간에 뻗어내는 일장, 일권이 실로 무겁기 그지없었다.
때때로 풀어내는 음유한 지풍 때문에 눈앞만이 아니라 위나 아래, 옆도 살펴야하는 것은 덤이었다.
차라리 삼귀가 아니라 이귀가 남아있었더라면 훨씬 나았겠지만 이미 아쉬워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크윽...!"
그 때, 화씨일문주가 신음하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사내가 몸을 날려 그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그를 붙잡았다.
수하들을 묶어두고 있던 화씨일문주만 없애버린다면, 이 자는 금방 끝장낼 수 있다.
뇌전을 흩뿌리며 수하들을 뒤흔들던 화씨일문주가 비틀대기 시작하자, 수하들 역시 용기백배해서 덤벼들기 시작했다.
"걸렸구나!"
그런 화씨일문주에게 사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일귀와 삼귀는 앞뒤에서 사내를 동시에 공격해들어갔다.
일귀의 도가 사내의 다리를 베어들어가고, 삼귀의 검이 상반신 전체를 노리고 여러갈래로 찔러들어가는 그 공세에 사내는 적어도 다리 하나는 내주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악
"베었... 아니?!"
분명 사내의 다리를 베었는데, 손에 감촉이 없었다. 지극히 미미한 수준의, 간신히 스치기만 한 정도의 이 감촉은...
"대형!"
"어느새...!"
자신이 벤 사내의 다리가, 자신의 눈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사내는 화씨일문주의 옆에 서있었다.
그 속도를 그대로 살려서 팔다리를 내지르자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는데, 한 명이 날아갈 때마다 북을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와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멈춰라!"
"멈출 건 당신들이고."
분명 유리한 것은 그들이었다. 사내가 제아무리 날고긴다 한들 내력이 무한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들은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주변을 수색하도록 보낸 절반의 전력이 돌아오면 저들은 죽은 목숨인 것이다.
그런데 저 어린 놈의 낯짝은 자신만만하기 그지없어,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화씨일문주는 더는 무공을 쓸 수 없다! 저놈만 죽이면 된다! 우리가 앞장설테니, 저놈들을...!"
"크허억...!"
털썩털썩
사내에게 얻어맞아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던 자들이 일귀의 외침에 일어나다 다시 쓰러졌다.
또다시 암기에 당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거품을 물은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독인가?!"
"글쎄요? 뭘까요?"
약올리듯 말하는 사내의 발치에서 서서히 흐릿한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나고, 시야가 서서히 가로막히면서 호흡을 이어가기가 힘들어졌다.
일귀는 즉시 내력을 끌어올려 독이 체내로 더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숨을 멈추고 이 곳을 빠져나가라!"
실로 어리석은 선택이라며 일귀는 내심 조소했다. 당장 이 독무를 이용해서 시야를 방해하고 자신들이 피폐해지기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자신들이 이 판에 어울려주지 않으면 끝인 것이다.
적들은 해약을 복용해서 이 안에서 농성하며 버틴다고 한들, 시간을 끌어봐야 오히려 남은 절반의 전력이 돌아올 예정인 자신들에게 승기가 돌아온다.
그 때는 이따위 독으로 버티려고 애를 써봐야, 압도적인 전력으로 눌러버릴 수 있으리라.
"으아아아악!"
"놈을 상대하지마라! 어차피 놈도 이렇게 앞이 안 보이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터! 자기 자신만 보호하는데 집중해!"
하지만 일귀의 생각에는 틀린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가 생각한 절반의 전력이 이미 팽연화를 비롯한 여인들을 앞세운 화씨일문의 반격에 지리멸렬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남은 하나는 애초에 강윤은 단순한 시간벌이로 독을 뿌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안 됩니다! 빠져나갈 수가...! 으아악!"
"대형!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소!"
이렇게 제한된 시야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수하들이 제압당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귀는 황급히 외쳤다.
"일단 멈춰라! 주변의 동료와 뭉쳐서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방어해!"
하지만 일천한 내력 때문에 숨을 멈추고 있어 제대로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수하들이 이 안개 속에서 뭉쳐서 싸울 수 있을리가 없었다.
빨리 사내를 찾아서 막아야했다. 그들 형제 두 사람이 나서서 강윤을 막지 않으면, 어쩌면 정말 수십명이나 있는 수하들이 전부 강윤의 손에 죽을 수가 있었다.
"이놈! 어디 있느냐! 쥐새끼처럼 하수들만 해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자!"
[잘 살고 있는 남의 집 기습하는 새끼가 정정당당같은 소리 하네.]
일귀는 귓속을 울리는 전음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육합전성의 기예를 익히지 않고서야 음성을 냈다가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니 전음을 보냈겠지만, 막상 의문을 느끼고 보니 시야가 트인 일귀는 주변을 돌아보고 그제야 이상한 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법! 진법이다! 이런 멍청한!"
이것은 단순한 독무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몇몇에게 하독해서 이것이 독이라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삼제!"
"알겠소!"
일귀의 지시에 삼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진법을 조종하는 자가 있다. 그를 찾아서 삼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자만 제거하면 이 빌어먹을 독무도 걷힐터.
한편 일귀는 도를 바짝 쥔 채 강윤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혜원은 적들의 움직임이 바뀐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이제 눈치챘나보네...?'
싸움을 대비해서 온 것이었으니 그녀가 준비한 암기와 독은 상당한 양이었지만 수십의 적을 상대로 쓰기에는 다소 양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곳은 화씨일문의 터전. 주약선에게 기관진식의 존재를 전해들은 그녀는 화운천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진법, 환무진의 운용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거기에 즉석으로 요소요소에 독을 뿌려넣어 적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윤의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안개를 유도하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어머, 이쪽으로 오면 곤란한데."
간혹 멋모르고 가까이 온 자들은 자신이 뭘 본지도 모르는 상태로 급소에 암기가 꽂혀 세상을 하직하고는 했다.
그녀 자신의 성품과는 상관없이, 암기무공이란 본래 적과 마주한 순간 반드시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십상인 무공.
그 때문에 미간이나 인후혈에 암기를 쏘아보내는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적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제거하려고 오는 이상 지금처럼 쉽지만은 않을터이니, 그녀는 지금껏 아껴둔 비장의 암기를 꺼낼 준비를 했다.
"이놈! 어디 있느냐! 썩 나와라!"
썩 나오라고 하면 참 순순히 나오기도 하겠다 싶었지만, 적이 검풍으로 안개를 흩어내며 사방팔방을 뒤져대니 곧 들킬 것 같았다.
이토록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서 저렇게 무차별적으로 검풍을 날렸다간 제 수하들이 죽어나갈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면 과연 사파라고 해야할지.
"계집! 네 년이 진법을 조종하고 있었으렷다?"
멧돼지 같은 검수가 그녀를 발견해서 눈을 번들대는 것을 보고, 당혜원은 미간을 모았다.
이전 같았으면 당해낼 엄두도 못 냈을 고수였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다시금 무공을 꾸준히 수련한 덕분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혜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정 위험할 것 같으면 도와달라고 할게요.]
제 남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지만, 당혜원은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그들이 조금 우위에 있다고 한들, 숫자에서 열세인 것은 변함없었다. 기회를 잡았을 때 최대한 적들의 숫자를 줄여두는 편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
때문에 강윤은 여기에서 그녀를 돕는 것보다 적들의 하급무사들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나았다.
만약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강한 자라면 모르되, 이 정도라면 충분히 맞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위험해졌을 때 억지로 버티려고 하지마요. 첫째도 둘째도 자기 안위부터 챙기는게 우리 집안 가훈이에요.]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푸훗."
"이 계집이... 웃어?"
저를 비웃는줄 알았는지 삼귀가 으르렁대며 살기를 피웠지만 당혜원은 한 번 웃음으로 오히려 몸이 더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옷소매가 내려오고, 그녀의 손에 슬쩍 닿은 암기 '일점홍(一點紅)'의 가벼운 감촉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멧돼지처럼 돌진해오는 삼귀를 상대로, 당혜원은 먼저 비도를 날려 격돌을 시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