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11화 (311/383)

밀푸색마 EP.311 정체가 뭐에요? (2)

주약선, 본명은 화운영이라 하는 여인은 화씨일문과는 그리 잦은 연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젊었을 시절, 원치 않는 형태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이후로 그녀는 가문에서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며 의술을 베푸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선대 문주였던 아버지가 죽고, 오라비가 문주의 자리를 이어받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나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 몸담았던 사문에 대한 정이 없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축에 속했다.

<정체가 뭐에요?>

그런 그녀였기에, 그녀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기는 매소향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조차 부끄러움을 느꼈다.

'고작 나 하나 편하자고 가문의 위기에 손을 놓고 있으려 했다니...!'

제 미색 빼어나다 우쭐대는 성품은 아니로되, 지금 제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것은 눈앞의 사내를 비롯하여 많은 남정네들이 제 본모습을 보면 추근대고 희롱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결국 일신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함일 뿐인데, 그것이 저를 길러준 터전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어서야 되겠는가?

마음을 정한 그녀는 매소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만요."

그 때 중간에 끼어드는 여인이 있었으니, 주약선이 누구인지 실은 다 알고 있는 언소영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주 의원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소영...?"

느닷없는 옹호에 당황한 매소향에게 언소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껏 저희는 주 의원께 많은 도움을 받아왔고, 감추는 것이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죠."

"언 여협..."

"걱정마세요. 저희가 최대한 도와드릴테니까..."

주약선이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여인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말 몇 마디에 이렇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선행을 베풀며 쌓아온 덕행이 돌아오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가슴이 벅찰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 이상 사람이 늘면 곤란해.'

열 명 정도까지라면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 사람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은 여인들 모두가 공유하던 차였다.

매소향에게는 나중에 진실을 알려주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제 남편에게 진실을 감춰야겠다는 생각이 약간, 아주 약간 여인들의 결단을 앞당긴 것이다.

'어차피 다들 도울 생각인 것 같은데, 주 의원도 원치 않는 상황에 역용술을 풀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주약선 스스로가 피하고 있는만큼 괜찮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언소영은 잊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사내와 이러한 관계가 될 것을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대도. 이거 보게."

"아니, 그냥 하지 말아요."

팽연화가 한바탕 도를 휘두르며 칼춤을 추려고 하는 것을 나는 억지로 막아섰다.

초절정이 되면 아이를 낳고서 회복하는 것도 빠른지, 팽연화는 며칠만에 몸조리를 마치고 이번 여정에 합류하기로 했던 것이다.

유모가 되어줄 사람은 진작부터 구해뒀으니 상관없지만, 정작 팽연화 본인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최대한 쓸데없는 일은 안 시킬 생각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소. 주 의원이 그간 챙겨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 돕는 것은 일도 아니라오."

기운차게 말하는 팽연화와,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는 당혜원과 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동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언소영과 매소향, 양하정은 애초에 위험해서 동행시킬 수 없는 주여린과 함께 여기에 남기로 한 것이다.

"신수성녀? 정말...!"

"쉬잇, 쉬잇! 조용히 해요...!"

언소영과 매소향은 서로 나이가 같아서 둘이 꽤 잘 맞는지 뭔가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같이 잘 지내주면 좋겠다.

근데 신수성녀가 누구지? 별호만 들어서는 엄청 예쁘고 착할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주약선을 포함한 5명이, 화씨일문의 근거지가 있는 호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제법 말을 타는 것에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말을 빨리 몰면서, 나는 주약선에게 최대한 아는 것을 전부 알려달라고 이야기했다.

"본문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급박한 상황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약선은 꽤 촉망받던 제자였던 모양인지, 즉시 받아볼 수 있는 전서구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고 했다.

급하게 날아온 서신에는 화씨일문이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 그러니까 절대 관여하려고 하지 말고 당분간 숨어지내라는 내용뿐이었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거군요?"

"...죄송해요. 하지만 여러분이라면, 분명..."

"그렇게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할 필요는 없소. 우리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어찌 그리 죄송하다고 한다는 말이오?"

팽연화가 듬직하게 말했다. 내 관점에서나 한동안 따먹고 임신시키던 시기가 길어져서 그렇지, 팽연화는 원래 절대고수였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것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언덕을 넘어가면 당가 소유의 마방이 있어요. 거기서 일단 말을 한 번 교체할게요."

당혜원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면서, 우리는 질풍같이 말을 달렸다. 승마 역시도 만만찮게 체력소모가 심한 일이었지만, 경공으로 호북성까지 달리는 것보다야 나은 것이다.

늦은 밤에 말을 달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면서도, 당혜원은 짬을 내서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았다.

[이미 화씨일문이 멸문해서 다들 도망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주약선이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인지 전음으로 알려준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화씨일문의 전력은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명성에 비하면 형편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껏 성세를 유지해온 것은, 무림고수라도 죽을병은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 컸다.

없애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없애고 나서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고쳐줄 명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무력이 약한만큼 나름대로 기관진식을 깔아두고 있다는데 그 덕분인지 가는 길에 화씨일문의 생존자가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남은 것은 길을 서두르는 것뿐.

말을 바꿔가면서 강행군을 계속한 덕분에, 우리는 출발한지 이틀만에 호북성 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 의원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주약선은 내공을 조금 익혔을 뿐 무공을 제대로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도 다행히 잘 따라와주었다.

아마도 사문을 걱정하는 마음이 평소 이상으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모양인데, 그 덕분에 앞으로 화씨일문의 근거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부디 잘 버티고 있기를, 그래서 주약선이 슬퍼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으아아악!"

"쯧..."

녹령은 또 어떤 기관에 휘말려버렸는지 알 수 없는 부하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혀를 찼다.

부하라고는 해도 그녀 직속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쉽게 풀릴 것 같았던 일에 벌써 죽어나간 자들만 몇이던가.

처음에는 먼저 내부에 환자로 가장한 몇몇 부하들을 들여보내 일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화씨일문 놈들이 즉시 기관진식을 발동시키고부터 이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방위를 바꿔서 들어가라! 가만히 있으면 진식에 휘말린다는 말이다!"

제 옆의 사내는 계속해서 고함을 질러 모두를 통솔하는데, 제법 진식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휘하를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안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진식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도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절정고수 두엇을 제외하면 마땅히 맞서싸울 전력도 없는 화씨일문은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하지만 그런 녹령의 시선을 받는 사내, 일귀의 속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 계집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명색이 령주라면 엄청난 수준의 고수일터. 그녀가 나서주기만 해도 훨씬 적은 희생이 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감시를 위해(그러니까 그녀가 원치않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왔다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이 짓거리도 슬슬 끝이었다. 굉음과 함께 서서히 진식이 무너져가는 것이, 용케도 며칠씩이나 버텼지만 적들도 한계가 온 것이 분명했다.

'이제야 대인께서 명하신 바를 완수할 수 있겠구나.'

그가 이끄는 휘하는 호령이 빌려준 것이로되, 머리 역할은 그의 수하가 아니라 황두명의 수하인 사귀 형제들에게 맡겨졌다.

이번 계획은 가장 먼저 황두명이 발의한 것인만큼, 그에게 통솔권이 맡겨진 것인데 여기에서 잘 해내야 은령회 내에서 황두명의 입지가 넓어지게 된다.

그만큼 굳은 각오와 함께 지금껏 공세를 계속해왔고, 마지막으로 수하들을 휘몰아서 완전히 기관진식을 깨뜨리려는데 갑자기 진식이 거두어지며 입구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본문을 찾으신 고인들께서는 누구시오?"

유약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피로에 찌든 안색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사실상 '뭐하는 잡놈들이냐'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은 모두가 알았다.

"상대하지 말아라! 진식이 힘을 다하니 말로 시간을 벌고자 함이 틀림없으니! 즉시 저놈을 죽이고 화씨들과 그 명맥을 잇는 자들을 모조리 주살해라!"

일귀는 꼼꼼하게 수하들을 배치해서 혹시나 저 자가 시간을 끄는 사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자들이 없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어, 누구에게나 생명은 귀한 것이오. 그대들이 앞장서서 생명을 버려야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외까?"

서생이나 지껄일 소리를 무부들 앞에서 지껄이고 있으니, 일귀는 코웃음을 흘렸지만 녹령은 그에게 경고했다.

"방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저 자의 무공은 결코 그대보다 아래가 아니니."

지직지직

뭔가가 타들어가는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일귀는 그제야 사내가 상당한 수준의 내가고수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물러나라...!"

시야를 하얗게 메우는 벼락의 존재감에 그제야 사내가 한 소리가 '죽여버리겠다' 라는 엄포였음을 일귀는 깨달았다.

기습적으로 터져나온 하얀 벼락에 이미 직선상에 있던 자들 가운데 반수 가까이가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뒤늦게 일귀의 지시에 따라 물러나서 생겨난 빈자리에 신형을 날린 일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중년 사내를 마주보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네놈이 화운악이로구나...!"

"과연 안목이 출중하시오. 그 말대로, 본인이 바로 화씨일문의 당대 문주, 화운악이외다."

중년 사내, 화운악은 더없이 평온한 자세로 침통에서 다시 침을 몇 개 뽑아드는데 그 분위기가 도저히 진맥이나 봐주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녹령은 화운악의 말이 '이제야 알아보다니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라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 꽤나 궁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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