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10화 (310/383)

밀푸색마 EP.310 정체가 뭐에요? (1)

최근 들어 황두명은 점차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마교의 이장로라는 자리를 버리고 은령회의 책사가 되었지만, 막상 그가 주도해서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은령회가 하나의 머리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마교와는 달리, 여럿의 머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대체 어째서 이리도 지지부진한 거요?"

지금 이렇게 모여있는 다섯 명의 령주들 가운데 은연중에 좌장격을 맡고 있는 호령이 막상 그 권한으로 다른 령주들을 제어하려고는 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령에게 나직한 목소리를 건넨 응령(鷹靈)의 경우만 해도, 이렇게 서슬퍼런 기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호령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이오. 조급해보아야 도리어 일에 차질이 생길 뿐 아니겠소?"

"조패(爪覇) 왕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 아니오? 게다가 일을 벌인 것치고는 좀처럼 무림맹도 움직이지 않고 있소이다."

매의 가면 너머에서 차갑게 울리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황두명 역시도 동의했다.

검성 황보운검이 마교와의 마찰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니, 조금 더 세게 몰아붙일 방법이 필요했다.

그들이 대응하지 않는다면 않는대로 상관없었다. 정파의 전력을 조금씩 약화시켜두면 마교가 마음을 바꿔 나설 수도 있고, 아예 회의 전력을 부딪혀서 없애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조패를 찾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죠. 하지만 지금은 인내해야할 때에요. 그들이 서로 부딪혀준다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지금 회의 규모로는 그들과 정면으로 다투는 일은 결코 현명하지 못해요."

그런 응령의 주장을 사슴 가면을 쓴 여인, 녹령(鹿靈)이 부정했다.

"지금 개방에서 회의 꼬리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제가 보장하죠."

"허나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그들이 앞장서서 싸우겠소? 지금 회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만 해도 결코 작지 않소."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중원을 나누어준다고 하면 힘을 빌려줄 곳은 많습니다. 중원무림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요."

"내 말을 듣지 않은 거요? 힘을 빌려준다고 해봐야 조금만 죽어나가도 즉시 달아날 것들이오. 애초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새외에 있지도 않았을..."

짝짝

냉정하던 응령의 목소리가 점점 흥분해서 높아지려던 찰나, 손뼉을 치는 소리에 정신이 쏠린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모두 의견에 옳으신 바가 있으니, 이 늙은이가 보기에 자칫 감정싸움으로 흐르지 않을까 싶어 끼어들었습니다. 양해해주시지요."

자라의 가면을 쓴 노인, 오령(鰲靈)이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지나 적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정예로 들이치는 방법도, 적이 태세를 정비한다한들 시간이 지나면 회의 전력이 더욱 커질테니 기다리자는 방법도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

"허나 둘 모두를 시행할 수는 없으니, 이 늙은이로서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볼까 합니다."

"그게 무엇이오?"

호령의 물음에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의 시선이 오령의 입으로 모였다.

"이 늙은이는 알지 못합니다. 허나 제 생각에 저기에 있는 황 노사라면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황두명은 느닷없이 자신을 지목해오자 흠칫했다. 분명 자신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노인이 갑자기 지목해오니 모여드는 시선에 황두명은 숨을 꿀꺽 삼켰다.

"오, 오령의 안목이 날카로우시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회의 책사로 들어온 사람 아닙니까? 당연히 생각이 있을 것이라 넘겨짚은 것이지 이 늙은이가 특별히 현명하다고 자랑할 생각은 없습니다."

겸손을 표하는 노인의 목소리에는 '네가 무슨 다른 생각을 하든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지만 진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어디 들어나봅시다."

응령이 멍석을 깔아주자, 황두명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무림맹의 전력을 과도하게 약화시키면 마교의 전력이 월등해질 가능성을 고려해서 적당히 소란을 일으키는 선을 지켜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소."

"이제부터는 조금 방향성을 틀어서, 아예 문파를 멸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잠깐, 황 노사? 그게 무슨 말이죠? 그건 결국..."

"예, 압니다. 무림맹과의 전면전을 의미하게 되겠지요."

지금으로서는 소규모의 전력을 빠르게 움직여 기습적으로 들이치고 있었기에 꼬리가 잡힐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일개 문파를 멸문시킬만한 전력을 움직이는 순간 그들을 감추고 있던 장막이 어느 정도 걷히게 된다.

그들의 규모, 그들과 연계된 세력들, 그들이 움직이는 돈의 흐름까지도.

그렇게 되어 자신들이 싸워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되면 무림맹은 지지부진하게 정보를 모으는 짓거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회와의 전면전을 결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결국 응령의 의견과 어떻게 다른 것이냐는 녹령의 의문에 황두명은 순순히 긍정하면서도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굳이 대규모 전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규모 어중이떠중이 문파 몇 지운다고 해서 큰 반향은 없을 거에요."

녹령의 말에 황두명은 씨익 웃었다.

"소규모이겠지만 어중이떠중이는 아닙니다. 녹령께서는 아실지 모르지만, 무림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문파가 강호인들의 존경을 모으는 경우를 간혹 찾아볼 수 있지요."

주로 무공이 아닌 다른 것으로 존경받고 있는 곳이 그러했다.

예를 들면, 의술로 이름높은 화씨일문이라던가, 암기와 기관장치, 벽력탄으로 유명한 벽력문이라던가.

녹령이 서서히 솔깃한 듯한 태도로 바뀌는 것을 보고, 황두명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것이, 주약선이 강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부터 약 보름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화씨일문.

이게 무슨 남궁파, 화산세가 같은 작명법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곳은 문파 같으면서도 세가 같고 세가 같으면서도 문파 같은 곳이니 그 이름이 썩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조조 맹덕의 머리를 쪼개려다 실패한 화타 열사의 의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화씨들이 대대로 문주자리를 해먹기는 한다.

단, 문주에게는 실권이랄 것이 없고 실력있는 문도들로 구성된 장로회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라고 하니, 참 애매한 곳인 것이다.

"주 의원이 화씨일문 출신이었군요?"

어쩐지 의술이 대단하다 했다. 명문 출신이라고 항상 대단하다는 법은 없지만 대단한 사람은 까보면 사실은 명문 출신인 경우가 많다더니.

그런데 내가 놀라워하는 것과는 달리 같이 듣던 다른 여자들은 크게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닌건가?

"예... 예전에 수학했던 곳입니다만, 최근에도 간혹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그렇습니까?"

주약선은 초조한 목소리로 빠르게 사정을 털어놓았지만, 나는 조금 과장된 태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화로 바로바로 연결되는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서신이 서로 헛되이 오가거나 무시당하거나 하는 일 정도는 예사로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장일 거라면서 일축하기에는 내가 그동안 주약선에게 받은 도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장 우리 애들 중에 셋을 주약선이 받아주지 않았던가.

"최근 이 의원에도 일이 벌어졌었고, 강호의 동향도 심상치 않은 모양이라 걱정이 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기본적으로 의술을 가장 중요한 재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화타가 개발한 오금희를 바탕으로 무공체계를 발달시켜온 무림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강호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가면 휘말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도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가나 개방의 도움을 받으면 화씨일문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 그것이..."

당가는 그렇다치고 개방은 조금 껄끄러웠지만(더 엮이면 다시 파고들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 개방도는 낫는대로 바로 쫓아낼 생각이었다), 대신 개방의 정보전달속도는 무시못할 정도라고 들었다.

빛을 이용한다는 말도 있고, 전서구가 잘 갖춰져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한 것은 내부자가 아니면 모를 거라고.

아무튼 주약선이 꼭 그렇게 못 견디겠다면 빠른 소식전달을 위해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는데 주약선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먼저 여러분은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들 중에서 가장 질적으로 뛰어난 고수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싶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니죠."

단순히 고수의 질만 따진다면 우리만한 사람들이 없을 거다.

"여러분들 가운데 일부라도 동행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잠깐, 동행이라구요?"

주약선이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이미 급하게 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미 화씨일문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맞아요. 굉장히 무리한 부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잘 알지만..."

주약선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을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부디..."

그녀가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해오니 나로서는 들어주고 싶지만, 이렇게 되면 나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

내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와달라고 하기 이전에, 확실히 해야할 것이 있지 않나요?"

"무슨 말씀인지...?"

매소향의 말에 주약선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화씨일문이 위기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는지, 어째서 화씨일문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걸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지."

그러고보니 주약선과 가장 먼저 연결해준 당혜원도 그녀가 이렇게 뛰어난 의원인줄은 처음 알았다고 했다.

"당신, 정체가 뭐에요?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거야 상관없지만,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우리가 함정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곳에 가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나는 오랜 세월 비밀을 지켜주고 아이들이 아프지 않도록 돌봐준 주약선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비교적 최근 접하기 시작한 매소향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대체 주약선이 어떻게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정도는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주약선은 시선을 내리깐채, 깊은 고민에 잠겨있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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