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06화 (306/383)

밀푸색마 EP.306 전혀 이상없었음

정탁은 거지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 이미 그는 거지들 틈에서 자라고 있었으니까.

부모 아래에서 자라지 못한 것이 그의 불행이라면, 그가 몸담은 거지 소굴이 명문 정파로 손꼽히는 개방이라는 점이 그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제가 중한 부상을 입어 여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소만... 10대 후반의 청년이오."

"아! 그 환자 말씀이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곧 안내할 사람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개방이라고는 해도 거지는 거지여서,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모질게 대하기 일쑤였는데 이 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사근사근하게 대해오는 것이, 이름난 의방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건물도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는 것이, 일개 의방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크고 위세가 좋아 묘하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그 탓에 자신이 빗물로 씻은 것이 이틀 전인지 사흘 전인지를 되새기던 정탁은, 안내인을 따라서 사제가 누워있는 곳으로 가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사제, 괜찮으냐?"

"사형!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오긴, 널 여기에 데려다준 점쟁이 정가가 분타에 직접 알려주었다."

말이 점쟁이지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자의 우쭐대는 표정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정탁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아주 사경을 헤매는 상태였다더니 퍽 멀쩡해보이는구나."

"말도 마십시오, 뼈가 여기저기 부러진걸 간신히 맞춘 상태라 절대 안정하라고 합니다."

그럭저럭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수준의 고수인 정탁과는 달리, 그의 사제는 삼류를 간신히 벗어난 실력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칭 흑룡회라는, 반은 사파 계열 문파지만 반은 건달인 집단에게 걸려 심하게 두드려맞았다는데,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찢어놓을뻔했다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천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이 어찌어찌 풀려서 여기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히죽히죽 웃는 사제의 얼굴을 본 정탁은 눈을 치켜세웠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제 혹시...?"

최근 방주의 지시가 내려와 개방 사천분타는 연일 바쁘게 조사에 임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분타주에게만 은밀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정탁도 앞뒤 사정까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마교도가 사천에 숨어들었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무력집단이 없는지를 찾아보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이 일대를 닥치는대로 뒤지고 있었는데, 당연하지만 이 의방 역시도 조사 범위 내에 들어갔다.

"혹시, 일부러 여기로 숨어들어올 생각이었나?"

"미쳤다고 그렇게까지 합니까? 단지, 일이 이렇게 풀렸으니 겸사겸사 확인이나 해보자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의방은 가장 먼저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단순히 좋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쁜 놈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좋은 일도 하는 것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단지, 이 곳은 너무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여인만을 받아들이는 의원이나, 크게 다친 자들이라면 남녀 가리지 않고 받는 의원.

인근의 명사들로부터 대놓고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며, 그들의 이름으로 푼돈만 받고 치료해주는 의방을 거점으로 삼는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지.'

하지만 눈앞의 사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더욱 수상하다고 입 아프게 주장하던 차였다.

마땅한 근거도 없을 뿐더러, 오로지 직감만으로 수상하다고 하니 분타주는 그 의견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생각할수록 수상하다는 말입니다. 돈도 안 되는 거지새끼를 고쳐서 어디에 쓰려구요? 이거, 보이십니까?"

사제가 살짝 이불을 들추자 깨끗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옷이었지만 거지꼴이던 사제가 말끔하게 씻고 깔끔한 옷을 입으니 평소보다 오히려 입성이 나아보였다.

"뭐 위생이 어쩌고 저쩌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릴 하면서 주던데, 공짜로 옷까지 주는 의방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는 뭔가 있어요. 뭔가를 숨기려는 구린내가 풀풀 난다는 말입니다."

헌신하는 마음가짐으로 병자를 대해오던 주약선이 들으면 답답해서 가슴을 칠 소리였지만, 정탁이 듣기에는 꽤나 그 내용이 그럴듯했다.

자신들 개방 같은 정보단체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 의표를 찔렀을 가능성도 아무튼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자네는 절대 안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몸으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어려울 것인데?"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사형께서 저를 찾아와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우심 아니겠습니까?"

"아, 지금 사형인 나를 대신 부려먹겠다?"

정탁은 코웃음을 쳤지만 사제는 무턱대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사형을 마음대로 부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문제는 방주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무림맹도 한 다리 걸치고 있는 모양이구요."

"...후개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방주께서는 사형께 관심이 있으시죠. 그리고 후개 자리를 노리는 다른 사람들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가와는 상관없이, 다음 방주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틈에 밀어넣어진 정탁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후개가 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입지를 쌓아두어야 뒤탈이 없지 않겠습니까?"

무림맹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에 공을 세워두면 두고두고 자산이 될 것이라는 사제, 송문의 사탕발림은 영악하기 그지없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정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되겠나?"

개방 제일의 후기지수이자 구룡의 일인, 파옥룡 정탁은 사제의 설명을 들으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양하정의 자궁에 잔뜩 정액을 싸서 돌려보낸 나는 몸 안을 들끓던 욕구를 대부분 해소하고 현자의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세필을 열심히 놀려서 서류를 다 결재하고 나면 그 다음은 의원을 돌면서 새로 도입한 건 쓸만한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오너인 내가 이러고 다니는 것을 조금 불편해했지만 애초에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주약선이 솔선수범형 리더라서 그런지 지금은 별로 개의치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말이 오너지 여길 굴리는데 필요한 돈은 당가에서 빌렸다가 갚은 거거나 기부받아서 돌리고 있는 상황이고, 나이도 어려서 그런지 다들 꽤나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아까 주약선과 이야기했던 커다랗게 약재창고에 주요 소모 품목을 중심으로 커다란 재고 현황판을 달아놓는다는 계획이 괜찮은 반응을 보여서 룰루랄라 돌아오던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응?'

웬 거지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저분한 건 둘째치고 뭔가를 찾고 있는듯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일단 내색하지 않은채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거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찾고 있는 분이 계시오만, 그 분께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어 길을 찾는 중이었소."

"어느 분이십니까? 접수처에 말씀해주시면 다 안내해드렸을텐데요."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당영이 했던 말(개방이 이 근방을 뒤지고 있다는)이 떠올라 기감을 펼쳐보니 과연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거지는 개방의 고수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여기에 용무가 있다면 안내를 안 해줄리가 없는데다, 표지판까지 충실하게 배치해놨는데 길을 잃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는 점.

그렇다면 개방의 사람이라고 무조건 단정짓는 것도 위험했다.

'나보다는 조금 아래야.'

여차하면 어느 곳 하나 분지를 생각이었는데, 거지는 내가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실은 나도 면식이 없는 분이라 안내해달라고 말하기가 마음에 걸렸다오. 혹시 제갈미령 여협께서 여기 계시지 않소?"

"...예?"

거지가 말하기를, 본래 자신의 사제가 이 곳에서 부상을 치료받고 있다고 해서 왔는데, 같은 무림의 선배인 제갈미령이 여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사제에게 듣고 나니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도리 운운하는 소리가 진심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어머니에게 용무가 있다면 여기에서 헤매고 있을 법하기는 했기 때문에 일단 당장은 출수를 보류하기로 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아... 그런데 굳이 수고해줄 필요까지는 따로 없을듯하오만..."

"괜찮습니다. 애초에 서로 면식이 없으시면 알아보시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머니의 처소까지 안내해줄 필요는 없고, 중간에 당혜원에게 부탁해서 어머니가 나오시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개방인지 아닌지 몰라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뒤지고 있는지 알아야 뭐라도 대처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자신을 정탁이라고 소개한 거지를 데리고 안내하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을 보이면 바로 제압할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정탁이 제갈미령을 만나려고 한 것은 당연히 인사 같은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제갈미령이 임신해서 여기로 왔다는 사실 정도는 개방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바였는데, 마침 신뢰할 수 있는데다가 재지도 명석한 그녀라면 여기에서 느낀 수상한 점을 놓칠리가 없다는 사제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없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런 짧은 문답으로 대화가 끝나버렸으니, 허탕을 치기는 했으나 수고는 덜했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상하네... 분명히 수상하단 말입니다."

"그만 좀 해라. 네 탓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느냐?"

정작 제갈미령에게서 답을 얻어와도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한 송문에게 정탁은 핀잔을 주었다.

의심암귀에 휩싸인 탓에 안내하던 강윤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품었던 정탁은(네댓살은 어려보이는 강윤의 무공이 정탁 자신보다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갈미령을 만나고 나서야 그가 손룡 강윤, 제갈미령의 의자임을 알고 민망함에 이를 사려물어야만 했다.

정탁이 만약 의방 모처에 꾸려진 여인들의 공간의 존재나, 언제든지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찍어 기절시킬 의도로 불려온 동창 호위조장이 계속 자신의 뒤꽁무니를 은신한채 따라다녔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기왕 확인했으니 된 일 아니냐. 이제 이만 만족하거라."

송문은 제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희미한 직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이렇다 할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정탁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결국 이후 그들이 분타주에게 제출한 보고에는 '만일을 위해 확인하였으나 전혀 이상없었음' 이라는 요지의 짧은 보고만이 포함되게 되었는데, 그 보고에 포함된 인명이 도리어 무림맹주의 손녀와 개방 방주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라고는 그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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