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95화 (295/383)

밀푸색마 EP.295 너 바보야? (3)

본디 세상 돌아가는 이치란 오묘한 것이어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기 마련이었다.

검성, 황보운검은 근 백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도 이런 이치가 한 번도 어그러짐이 없는 것에 언제나 신비로움을 느끼고는 했다.

"여름의 강한 양기를 오곡이 머금어 가을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니, 이 어찌 오묘한 것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지금 가을이 되고 나무가 잎을 떨궈 그 모양이 쇠하는 것으로 보이나, 다음 봄에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머금을 것인즉."

흩날리는 단풍 아래에서 검성이 자못 흥취가 일어 읊조리다가,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이의 기척을 느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모른 척하며 은근슬쩍 걸음을 옮기는데, 모양만 걷는 것일뿐 숫제 평범한 사내가 뜀박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였다.

제대로 경공을 쓴다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나, 나름대로 맹주로서의 체면을 생각한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도 큰 기대는 품고 있지 않았다.

"할아버님?"

"...그래, 무슨 일인고?"

맹주된 입장에서 채신머리없이 대놓고 일거리를 피해 달아나는 꼴을 보일 수 있겠는가. 심지어 손녀 앞에서 몇 번씩이나 대놓고 삼십육계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검성은 안면이 두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맹주가 자꾸 귀찮은 일을 손녀에게 들려보내는 버릇이 든 것 같아, 언제 한 번 따끔하게 혼을 내줄 작정이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제갈세가주로부터 보내온 서신이..."

"젠장."

"예?"

"아니다, 이리 다오."

무심결에 욕설을 내뱉어버린 검성은 곱게 싸인 서신을 거칠게 뜯어 열고나서 가장 마지막 줄부터 읽었다.

[...한 바, 맹주께서는 조속히 마교를 압박하여 진상을 규명하길 청하는 바입니다.]

'빌어먹을 헛똑똑이 같으니.'

맹주로서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기는 했으나, 이렇게 대놓고 자리를 비워버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교가 팽가를 쳤다고 하여 여차저차한 끝에 사과를 받아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마교를 자처하는 자들이 남궁세가를 들쑤셨다지 않은가.

다친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소수의 죽은 사람 가운데 제갈세가주의 망나니 아들놈이 섞여있는 것이 문제였다.

망나니라고는 하나 아들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제갈세가주는 끊임없이 당시 피해입은 자들을 책동하니, 그나마 마교를 당장 들이치자는 말이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은 검성이 직접 제갈세가주와 이야기를 나눈 덕분이었다.

<맹주, 마교가 어떤 자들입니까? 호시탐탐 중원을 노려온 역사가 벌써 수백년입니다! 어쩌면 천 년이 넘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생각을 이용해서 다툼을 벌이게 할 생각일지도 모르지 않소? 제갈세가주가 이런 이치를 모르리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오히려 제갈세가주 쪽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허나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성을 잃은 그가 보기에, 검성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이용해 시간을 버는 것이 마교의 수작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검성의 주장도 어느 정도 수용한 결과, 제갈세가주를 비롯한 몇몇 명사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그에게 계속 서신을 보내 재촉하게 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진상규명, 말은 좋군.'

문제는 마교가 나서서 부정하더라도 그것이 특별히 사태를 종결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무림맹의 정보력으로는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 아닌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여 정황증거라도 들이민 다음이라면 모를까, '마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일을 벌였으니 너희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라' 라고 말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정파의 대협이라도 참기 힘들 것인데, 사파 마두들이 득실대는 마교라면 어떻겠는가?

항의라도 해오면 다행이요, 말없이 무기를 들어올리기라도 하면 재앙일 것이다.

"할아버님...?"

"오, 효선아. 왜 그러느냐?"

심란한 표정을 알아보았는지 조심스럽게 조부를 부르는 손녀의 목소리에 검성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었는데, 개방의 노 방주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노 방주가?"

검성은 억지로 지었던 미소가 진짜 미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지금껏 고생하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왔다고 하니 기꺼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왕이면 선후가 바뀌었으면 좀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가라앉았으니 좋은 소식이 더욱 반갑게 들린 것일지도 모르는 터.

검성이 서둘러 응접실로 돌아가보니 과연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친 자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는가? 노 방주."

"날이 싸늘하니 거지에게는 이런 따뜻하고 푹신한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법이지요. 신경쓰지 마십시오."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마치 사내가 말하듯 걸걸하게 울려나오니, 의외로 거지는 30대 후반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대강 올려묶은 머리는 조금 푸석했으나 그나마 씻고는 다니는지 땟국물은 없었으니, 타고난 미색이 더해지니 그럭저럭 봐줄만했다.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고 가녀린 체구는 과연 그녀가 십만 방도로 구성되었다는 개방의 사람인지 그저 평범한 거지인지 헷갈리게 만들었으나, 그녀의 허리에 묶인 새끼줄에 있는 9개의 매듭은 분명하게 그녀가 개방의 우두머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옥영개 노희방. 전대 방주의 제자로서 여인의 몸으로 방주의 자리를 차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을 마주한 검성은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 방주, 술 마셨습니까?"

"아, 자리 비우신 사이 조금 마셨습니다. 그래도 취하지는 않았으니 걱정마십시오."

황보효선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노희방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니,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효선아, 되었다. 노 방주, 나는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해주게."

처음 노희방과 만났을 때 검성 역시도 그녀가 풍기는 희미한 술냄새를 맡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흐흐, 명심하겠습니다, 맹주."

살짝 상기된 이런 얼굴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껏 검성이 원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던 법이 없는 것이다.

개방이 무림맹은 아닌만큼 항상 대가는 치러야했지만 결과는 확실한 그녀였다.

"그런데, 손녀 분도 같이 듣기에는 조금 내밀한 이야기가 오갈 겁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음..."

검성이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손녀의 눈에서 같이 듣고 싶다는 열망이 줄기줄기 뻗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검성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정보를 다룬다는 백호단의 부단주이지만, 사실 황보효선 본인은 정보를 다루는데 있어서 부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검성의 '나중에 필요하다면 알려주마' 라는 전음만을 믿고 황보효선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고, 검성은 노희방과 둘만 남았다.

[손녀 분께서도 이 일에 꽤나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내 불찰일세. 할아비가 되어서 속끓이는 모습을 감추지도 못한게지.]

노희방이 전음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검성 역시 전음으로 받았다.

감히 검성의 기감을 속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들을 수 있는 자가 있을리 만무하건만, 그만큼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검성이 심유한 눈빛으로 노희방을 응시하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놈들의 꼬리는 잡았나?]

[흠, 이게... 잡았다고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먼저 습격자들의 무공입니다만, 적어도 본방에서 확보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세간에 알려진 무공 중에는 그런 검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희방은 담담하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손짓으로 검로를 재현해보였다. 손날로 대강 움직이는 그 모양만 보고서도, 검성은 그 검법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보시면 짐작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검법은 적어도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는 검법이라도 해도 될 겁니다.]

흔한 검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문파에서 비전이라 불리는 검법들 중에서도 이런 검법은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을 터였다.

[적어도 내가 본 적은 없군. 하지만 검의 운행이 마치 사마외도의 검법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서 마기를 느꼈다고 하는 증언이 있었죠. 그리고...]

[흠, 뭐랄까...]

검성은 자신이 느낀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잠시 고심하다 말했다.

[과하게 합리적이군.]

[맞습니다. 해석의 여지가 없고 짜임새가 너무 분명하게 만들어진 검법이죠.]

때문에 깊이가 없고, 궁구의 여지가 없다.

너무 완벽하게 짜인 합리성은 그 검법에 적합하지 않은 자로 하여금 더욱 높은 무공의 경지에 오르는 문을 틀어막아버린다.

대신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적어도 본인이 허락받은 경지까지 도달하는 것은 쉬워지는 무공.

마치...

[타인을 이용해먹기 위해 만들어낸 무공 같네. 마교 교주가 좋아할만한 무공은 아니야.]

[...그냥 맹주 본인이 직접 가셨으면 더 빨리 답을 얻으셨지 않겠습니까? 그냥 이 정보에 대한 정보료는 빼드릴까요?]

노희방이 같은 결론을 얻기 위해 한 달 이상 시일을 요했던 것이 허탈할 정도로, 검성은 보자마자 정답에 도달했다.

그녀는 자신이 자문을 구했던 많은 검도의 고수들이 검성을 보았다면 검을 꺾어버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냥 받게. 검로에 대해서 더 일찍 알았더라면 검법에 대한 답은 알았겠지. 허나 그 외의 정보는 나 같은 무부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네.]

[과연 맹주, 사려가 깊으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정보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노희방의 설명이 이어졌다.

[안휘성을 벗어난 그 자들은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장터에 숨어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거기에 그들의 근거지가 있을리는 없고... 한 패가 있었겠군?]

[맞습니다. 그 곳에 있던 어느 상단의 인원이 급하게 늘었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단을 파고들어가다보면 실마리가 잡히겠군. 대체 그 상단이 어딘가?]

노희방은 검성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의 표정이 진중한 것을 보고 검성은 참을성있게 기다렸고, 이윽고 대답이 나왔다.

[용운상단, 입니다. 구대문파에서 속가제자들을 앞세워 최근 기세를 올리고 있는 상단이죠.]

[구파가, 연루되어있다고...?]

검성은 경악했다. 최근 들어 구파와 오대세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해도, 설마 같은 정파끼리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구파 전부일지, 일부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정 문파가 연루되어있다고 해도 그 문파 전부가 연루되어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죠.]

[허나 누군가는 반드시 연루되어있을 거란 이야기 아닌가.]

노희방은 부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정파의 일원이 사파와 결탁하여 같은 정파를 공격하는데 힘을 보탰다는 것만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허어, 어떻게 이런...]

우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제갈세가주를 비롯해서 검성을 괴롭히는 자들의 입은 막을 수 있을 것이었지만, 노희방은 너무 일을 잘해온 나머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까지 알아왔다.

[그리고 사천에서 비슷한 자들이 날뛰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사천? 혹, 당가도 변을 당한 것인가?]

[당가는 아닙니다. 특정한 장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싸움이 벌어졌다는 모양입니다만, 사천 분타주가 보고한 바로는 분명 유사한 무공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맞서싸운 자들은 또 누구라던가?]

[그건 아직 파악중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들이 사용한 것은 남궁세가의 무공이 아닌가 짐작중입니다.]

[남궁세가?]

노희방이 말하기를 아무래도 같은 정파로 보이는 자들보다 난리통을 일으킨 사파 쪽에 더 관심을 주다보니, 어느새 일이 가라앉자마자 모습을 감추었다고 했다.

"오리무중이군그래..."

검성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개방의 도움으로 제갈세가주의 서신 공세에 시달리는 일은 더는 없겠지만 대신 더 큰 고민거리를 얻어버린 검성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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