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94화 (294/383)

밀푸색마 EP.294 너 바보야? (2)

"적에게 공격을 당했으면 대책을 생각해야지, 여자나 건드리고 있다는게 말이 돼?"

매소향은 거침없는 팩트로 내 폐부를 사정없이 후벼팠다.

너무 갑자기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뒷감당이 안 될 여자들만 나타나버린 탓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 거슬러올라가보면 내가 뿌린 씨앗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기라도 했어야지! 예를 들면 무림맹이라던가..."

"무림맹은 조금..."

"어째서? 이미 남궁세가의 일도 있었으니까 무림맹에서도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설 거야, 그러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뭔가를 깨달은듯 매소향은 말을 멈추었다. 그 옆에서 어머니가 말을 이어받았다.

"아마 여기 상황을 전부 알게 되겠죠. 잘 감춰서 넘긴다고 해도 각 문파, 세가로 돌아가게 될 거구요."

"..."

매소향은 자기도 말하려다 말았던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쩌다 이런 곳에 자기도 오게 되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다른 이유, 언제 검성이 내 무공을 보고 눈깔이 뒤집힐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무림맹을 피하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당장은 말해봐야 복잡해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야? 혹시나 적이 다시 찾아오면..."

"그건 걱정없어요. 적들이 한꺼번에 압도적인 전력을 들이쳐올 가능성은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나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하는 내용에 우선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은 적들의 표적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쉽게 손을 못 대고 있었던 건, 여기 두 사람과 군주마마의 호위들, 그리고..."

언소영과 당혜원을 차례로 지목한 어머니는 잠시 미간을 모으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왜 저러지?

나와 마찬가지로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매소향이 입을 열었다.

"고수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많아서 망설였다?"

"네. 하지만 망설인 것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어요. 그 다음이 중요하죠."

"다음?"

"그래요. 고수들이 많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모르되, 미리 파악했다면 더 강한 전력을 불러오는 것이 사리에 맞는 선택이죠."

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 노인은 그 상황에서도 언소영을 기습하는 것을 선택했다. 분명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고 언소영이 이야기했던 것을 나 역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전력을 보강할 여유가 없거나,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뜻.

과연 어머니의 입에서도 같은 설명이 나왔고, 매소향은 그 설명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사실 그들과 충돌했을 때보다 우리 전력은 오히려 늘었죠. 그러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건 그랬다. 언소영이 초절정의 경지를 찍었고, 어머니 역시도 아이를 낳은 이후 충분히 정양해 완전히 회복했다.

거기에 양하정과 매소향까지 들어왔으니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될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도 상책은 아니죠. 우리가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릴 필요는 있다고 봐요."

"무림맹에?"

"네."

내가 갑자기 나타난 여자들을 상대한다고 정신이 팔려있던 사이에도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우리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을 개입시키면 곤란해진다고 하지 않았어?"

"직접 접촉하게 되면 곤란하겠지만, 중간에 거간을 하나 끼워서 우리라는 것을 모르게 해줄만한 사람이 있다면 괜찮겠죠."

매소향과 어머니는 의외로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언제 두 사람이 쾅 하고 폭발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나는 어느새 그럭저럭 안심하고 있었다.

"거간? 누가? 이 상황을 알고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 중에, 무림맹에 연통을 넣어볼만한 사람이 있다고?"

"꼭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겠죠. 요점은 우리를 대신해서 단서를 쥐어줄 사람이면 되니까요."

글쎄, 내 머릿속에 그나마 말해볼만한 사람은 남궁학 정도밖에 없었다. 사실 남궁학도 언소영과 남궁혜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아직까지는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구나?"

"좀 더 긴급한 상황이었다면 앞뒤 가리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급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너무 여유부리는 것 아니니?"

"그렇게 걱정된다면 여길 떠나도 말리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내가 잠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이 매소향과 어머니의 발언에 조금씩 감정이 섞이고 있었다.

"어쩌겠니? 네 잘난 아들이 날 임신시켜버린 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남아달라고 그렇게 사정하던걸?"

사정이 그 사정이 아닐텐데?

"흥,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 그렇지 않은 여자 있는줄 알아요?"

어머니의 말에 당황한듯 움찔거리는 여자들이 몇 있었다. 색마 무서운줄 모르고 먼저 들이댄 여자들이 있기는 하지.

이대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과열되면 괜히 다른 사람한테도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한 나는 두 사람을 중재하기로 했다.

"자, 이제 곧 조식이 나올 것 같으니까 두 분 다 이제 그만..."

"애초에 네가 아무 여자나 건드리고 다니니까 이렇게 되는 것 아냐!"

"아무 여자? 그 중에는 당연히 언니도 포함되는 거겠죠?"

"두 분, 그만할까요?"

내가 끼어들자 오히려 불에 기름붓는 형국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중재한 것은 차분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내는 언소영이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어요. 너무 안일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그렇게 급박할 정도로 우리는 약하지 않아요. 궁리해서 더 좋은 생각을 고를 정도의 여유는 있답니다."

황희 정승처럼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하는데도,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하자 그 무게감이 상당했는지 두 사람은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헤으응, 마망...

"그 문제는 좀 더 생각을 가다듬고 천천히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은 새로 함께 하게 된 식구를 환영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군요. 여러분 모두, 도와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알겠어요."

두 사람 모두 반응은 달랐지만 어느새 과열되어 말다툼을 한 것이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침식사가 마련되어 나왔다.

약간 어색하기는 해도 다른 여자들도 제법 신경써준 덕분에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아침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역시 매소향과 어머니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대로 두기에는 조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 싫어하게 된 계기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당사자들이 입을 열 것 같지는 않고,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을 팽연화에게 한 번쯤 물어보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약 팽연화도 안 알려주면?

'그 땐 맨땅에 헤딩해야지, 어쩌겠어.'

적의 습격보다 둘이 싸우는게 마음에 걸리는걸 보면 아무래도 매소향 말마따나 나는 바보가 맞는 것 같다.

"낳기로... 하셨다구요?"

"그래요.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주약선은 잠시 자신이 잘못들었나 의심했지만, 매소향의 목소리는 잘못 들을 여지가 없을만큼 분명하게 귓속을 울렸다.

"그게, 그 말씀은..."

"네, 키울 거에요. 아이 아빠하고도... 이야기가 됐어요."

자신도 말하기가 부끄러운지 홍조어린 얼굴로 말하는 매소향의 말에 주약선은 입이 딱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이 아빠라면 누구인가. 강윤 아닌가. 그녀가 찾아왔던 첫 날 강윤을 때려죽일 것처럼 행동하던 모습은 주약선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대체 무슨 사술을 부렸기에...'

매소향이라면 강호에서 활동을 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한 그녀로서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재녀였다.

본래 감정이 좋았다면 모르되, 대체 무슨 수를 쓰면 그토록 아이를 거부하던 여인에게 한 달도 안 되어 순순히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말을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주약선은 의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매소향에게 조심해야할 것들을 직접 적어서 알려준 다음, 산모의 기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관리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강윤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언소영의 환골탈태도 그렇고, 성연군주를 단숨에 이류급 고수로 만든 것도 그렇고, 이번에는 매소향까지 단숨에 마음을 돌리게 하는 재주가 무엇인지.

"저, 저희 남편이 뭘하는 사람이냐구요? 그건 왜..."

그래서 여인들 가운데 주약선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당혜원에게 묻자, 당혜원은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강 소협은 대단한 재주가 있는 사람 같아서요."

"그야 그이가 나이에 비하면 무공이 대단하기는 하죠..."

당혜원은 은근슬쩍 이야기를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주약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냥 무공이나 여자 홀리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대체 강 소협은 정체가 뭐죠?"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나이에 비하면, 이라는 단서를 붙일 것도 없이 절정고수라면 이미 강호 어딜 가서나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거대문파 한 곳이 기껏해야 스물 남짓 보유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절정고수 아닌가.

하지만 그가 숨기고 있는 재주야말로 무공보다도 더욱 대단한 무언가임이 분명하다고 주약선은 확신하고 있었다.

"절대 다른 곳에는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만한 신뢰는 쌓인 사이 아닌가요?"

"으으음..."

당혜원으로서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여인과 몸을 섞는 운기행공이라던가, 강윤의 스승이 사실 혈마라던가 하는 사실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에 하나 알려준다고 해도, 절대 그녀의 독단으로는 알려줄 수 없는 사실들.

하지만 주약선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묻는 것을 보면, 주약선 역시도 지금껏 생각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본 것이 분명한데 전혀 여지조차 주지 않고 거절했다가는 최악의 경우 하직인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또 어딜 가서 그녀처럼 헌신적이고 유능하면서도 그들 사이의 일에는 참견 하나 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인가.

당혜원은 잠시 고민하다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알려주고는 싶지만... 남편이 우리들만 알고 있어야한다고 신신당부했거든요. 우선 남편에게 물어보고 나서..."

"잠깐. 그건 안 돼요."

가장 잘 알고 있을 강윤을 제쳐두고 당혜원에게 물어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관절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벌써 몇 명이나 되는 여인을 거느리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있으면서도 또 여인을 늘리는 재주를 보이는 사내였다.

그녀들이라고 해서 아마 자신이 사내의 여인이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을까? 어찌어찌하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젖듯이 침상에 끌려들어갔으리라.

그리고 주약선은 자신만이 예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역용술을 쓰고 있다고 해도, 상황이 꼬여 본모습이 발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주기 어렵다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애초에 말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잖아요."

"...미안해요."

사내의 여인이 된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약선은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화타 이후로 전해내려오는 화씨일문의 후예로서, 의술을 베풀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약자를 도울 뿐.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알아내보자.'

아마 잘 구슬려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애초에 주약선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일가를 위해 헌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강윤의 여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의 일가를 돌보다보면 사내 역시도 마음이 움직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법의 일부라도 그녀에게 알려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천재지변은 피하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어떤 의미에서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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