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87화 (287/383)

밀푸색마 EP.287 아무것도 없어 (1)

당영은 느닷없는 비상이 걸렸다.

"이거, 이거 어떠니? 천축에서 들여온 마노 팔찌..."

"아름답기는 한데 지금 옷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그럼 이거! 이건 무려 희랍에서...!"

"아가씨, 먼 곳에서 사온 거라고 무조건 좋은게 아니라니까요..."

조금 있으면 당가에 강윤이 온다는 소식에 당영은 정신없이 옷과 장신구를 갈아치우며 치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주 찾아오라고는 했지만 갑자기 해가 뜬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오늘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연통이 들어왔지만, 그녀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 어차피 안 꾸민 모습도 많이 봤을텐데 꼭 이렇게 해야할까요?"

당영이 아끼는 시비, 유하는 시들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물론 표정과는 별개로 손은 빠릿빠릿하게 그녀의 몸단장을 돕고 있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니? 능 소저가 있는데 밀리면 안 된다니까?"

"하지만 제가 봤을 때 능 소저께서는 그런 남녀상열지사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이시던데요."

느닷없이 당영이 손님으로 데려온 여인이 삼봉의 일인인 비봉 능휘연이라고 알려지자 세가 내의 젊은 남성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인사하고 차를 마시자고 권유하는 것은 양반이요, 몇몇은 한 식구라고 비호해주기도 어려울만큼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꼴을 유하는 몇 번이나 보았다.

그 때마다 능휘연은 온갖 괴상한 말을 늘어놓아 상대를 쫓아버리는데, 유하는 낙타가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 덕에 처음 알았을 정도였다.

"능 소저의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마찬가지야. 결국 곁에서 비교돼서 더 못나보이면 마음이 식는 법 아니겠니?"

"오..."

의외로 맞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유하는 은근슬쩍 물었다.

"그래서 그건 어느 패설에 나온 이야기인가요?"

"한림학사님 댁 마당의 석류는 참으로 달콤... 야!"

그렇게 투닥대면서도 당영은 유하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끝마쳤다. 조금 과하게 힘을 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능휘연에 비해 그다지 처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당 소저, 이번에는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겠지요? 능 소저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과연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는지, 당가를 방문한 사내는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곧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군요. 혹시 다른 예정이 있는데 제가 갑자기 찾아온 탓에 지장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다른 예정이요?"

하지만 사내는 아무리 보아도 저를 위해 꾸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볼 일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것은, 없는데... 그러니까..."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주면 좋을 것을, 당영은 그것이 내심 야속했다. 저리도 잘난 남자가 어째서 여심 하나 알아차리지를 못한다는 말인가.

하긴, 당영이 저 때문에 능휘연을 당가에 초대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기색이었으니, 당영이 보기에 강윤은 도무지 여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렇게 우물대고 있는 사이, 그녀가 차려입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당영은 두 사람을 이끌고 볕이 잘 드는 정자로 안내하게 되는 것이었다.

"고모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어머니께서 강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계시다던데... 혹시 강 소협께서는 들으신게 없으신가요?"

"글쎄요, 별다른 연락은 없으십니다만 아마 별 탈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 무슨 일이 있을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팽연화의 행방을 묻는 당영의 질문을 진땀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애를 임신해서 의원에 쉬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팽연화는 졸지에 표표히 강호를 떠돌고 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죠. 당 부인께서는 능히 홀로 문파 하나와 그 가치를 견줄만한 사람이니, 그 분을 목표로 정진하라고요."

"그,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물론 저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지만요."

단순히 운동선수가 금메달리스트를 목표로 삼으라는 이야기 같은데, 그걸 곧이곧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해버리는 능휘연은 역시 조금... 이상한 여자 같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적당히 넘기면서 다시 당영과 대화를 풀어나가겠지만, 나는 때마침 주어진 이 떡밥을 물어야만 했다.

"그러고보니 아버님이시라면, 능유환 대협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혹시 면식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만, 자녀 되시는 두 분이 하나같이 뛰어나시니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긴 하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요?"

"...예?"

뭔가 말을 실수했는가 싶어 능휘연의 얼굴을 보니, 딱히 불쾌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는 몰라도 풍연이와는 사이가 꽤 안 좋아보이던데, 아닌가요?"

안 보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다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계속 건드릴 생각은 없었는지, 능휘연은 가볍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도에 생을 바치신 분이시죠. 무공의 끝이라는 것을 꼭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고는 하세요."

능휘연이 묘사하는 것은 꽤나 담백한 관점이었다.

무공광에, 공명정대한 정협. 윗사람은 받들어모시는데 있어 소홀함이 없고, 아랫사람에게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사람.

제법 상세하게 알려주기는 했지만, 사실 내게는 아무 쓸모없는 정보였다.

아니 쓸모있고 없고 이전의 문제다. 가족으로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 전혀 없고, 마치 정치인 같은 유명인을 설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능 대협께서는 젊은 시절 강호에서 손꼽히는 미남자로 유명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당영 나이스. 능휘연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씀도 들었죠.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지만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유명한 선남선녀 두 사람이 결혼한 셈이니 굉장히 금슬도 좋으시겠습니다?"

"...네? 아, 네."

능휘연은 내 질문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나는 은근슬쩍 당영의 눈치를 살폈지만 반응을 보니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해서 저런 것 같지는 않다.

'그다지 살가운 부부는 아닌 건가?'

좀 더 깊이 질문하고 싶었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다 의심받는 것은 곤란했기 때문에 나는 약간 억지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요즘 당 소협은 어떻게 지냅니까?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많이 힘들어보이던데..."

당영은 남동생, 당무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키만 많이 자랐지 행동은 아직 애라고 말했고, 능휘연은 그래도 자기 동생보다는 착한 것 같다며 에둘러서 능풍연을 씹었다.

나는 누나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현장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면서 혹시 그 중에 쓸만한 정보가 있는지 탐색했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조명은 요즘 들어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이 지겨웠다.

변변한 실권조차 남지 않은 상태로 그저 각주회의에서 취합된 사안의 가부만을 결정하는 자신의 신세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물론 있기는 했다.

이래서야 가주의 인장을 마음대로 쓰게 두고 자리를 비우더라도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역시 사람, 권한을 휘둘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 책임이 줄어 생기는 편안함도 느끼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던 참에,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흉사에 대한 보고가 들어온 것이 그가 아침마다 눈을 뜨기 싫은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자기들이 마교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남궁세가에서 난리를 부렸다는데?>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러다 곧 난리가 날 것 같아서 불안한데...>

<예끼, 난리가 나면 또 어떤가? 가모께서는 천하제일고수라는 혈마도 쫓아내신 분 아니신가?>

<아하, 그랬지. 그런데 가모께서는 출타중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대략 이런 식으로 세가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아무리 이기어도술이 고강한 경지라고 한들 저 북쪽 끝 요녕성에서 도를 날려 악적들을 벨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정황을 모르는 몇몇 가솔들은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0년 전 마교의 악몽을 제법 기억하고 있는 당가였으니, 더욱 그 불안감은 쉽게 전염되었고, 사람들은 가모 팽연화가 자리를 비운 이유로 당조명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아니, 가주께서 얼마나 가모를 들볶으셨으면 이렇게 바깥에 나가서 돌아오질 않으신다는 말인가?>

<혹시 팽가로 아주 돌아가버리신건데 윗분들이 쉬쉬하고 계신건 아닌가?>

<직계라고 거들먹대더니 가주란 인간이 이젠 당가의 품에 들었던 복덩이까지 걷어차는구나!>

당조명은 억울했다. 그야, 자신이 팽연화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간신히 절정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에 비해, 아내의 무공은 끝을 모르고 성장하며 급기야 절대의 경지에 올라 세가 소속원 전체의 추앙을 받으니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지하에 연무장을 만들어 거기에 가둬두다시피 했던 죄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두 손이 묶인 것이나 상황인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만약 그렇게 감정이 쌓였더라면 그가 가주로서 세가의 일을 좌지우지할 적에 이미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연관이 없다고 장담하기도 애매했기에, 그는 뭐라 해명도 못하고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잇..."

이미 결재는 전부 마친 상황, 당조명은 잠시 바람이라도 쐬며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바깥으로 나섰다.

이제 날씨도 완연한 가을, 끈적하던 더위도 한풀 꺾여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던 당조명의 맞은편에, 쟁반에 간식거리를 얹어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시비를 보고 물었다.

"혹시 객이 들었더냐?"

"예, 당영 아가씨의 손님이 와계십니다."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려던 시비는 멈춰서서 대답했고, 당조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아의 손님이라니? 혹시 화산 능가의 여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능 소저가 아니오라, 제갈미령 여협의 의자 되시는 강윤 소협이십니다."

"강...?"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던 당조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따지고보면 그가 이 신세가 되도록 만든 발단이 바로 그였다.

'그놈만 없었으면 고천 그놈이 내 앞에서 설치지도 않았을 거고... 나도 굳이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겠지...'

강윤이나 고천이 들었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당조명은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그들을 사태의 원인 정도로 정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스로의 생각을 바깥에 내비쳐봐야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던 당조명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시비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이만 가보거라."

"예, 가주."

시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당조명은 그녀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드넓은 당가의 부지를 천천히 걷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온다.

하지만 그뿐, 그는 가주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위에 서있기는 하나, 더는 그들의 앞길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바쁘게 제 일을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가솔들 가운데에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이 허깨비인 것처럼 느껴졌다.

<위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가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아도 세가의 존속이 보장받는데, 가주의 뜻에 복종할 생각이 들겠습니까?>

<가주, 제가 올린 말씀을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였던가, 묵가장의 총관이라는 자가 그에게 했던 제안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그 때는 제안의 내용조차 듣지 않고 그를 내쳤지만, 지금은 어떨까.

내용 정도는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당조명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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