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84 그 여자 누구야? (2)
강윤이 분통을 터뜨리며 급한대로 옷을 챙겨 바깥으로 나서려던 그 시각, 성연군주의 호위들은 매소향과 대치하고 있었다.
차마 상전의 밤일까지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어 처소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절정고수인 매소향이 야밤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당신은... 그래, 누군지 알겠군.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베겠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이 강윤과 대충 어떤 사연으로 엮여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도, 황족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를 방치하는 것은 언어도단.
하물며 깊은 밤 몰래 황족이 거하는 처소에 접근하는 자라면 더욱 그러했다.
"당신들은... 누구지? 어디의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베이는 건 그 쪽이 될 거야."
한편 매소향으로서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본래 그녀는 가볍게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살펴본 결과, 의원 어느 곳에서도 강윤이나 제갈미령의 처소를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특별구역은 함부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도록, 의원들이 거하는 구역 너머에 지어져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의원들이 환자를 받아 진료하는 곳에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성연군주처럼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지 않는다면 발견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역시 여기인 건 맞아. 그런데 이 자들은 대체...?'
차림을 봐서는 마치 살수집단 같은데, 오히려 말하는 투는 마치 그녀를 침입자 대하듯 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 번 수를 교환해보기로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를 상대로도 그녀가 어느 정도 우세했으나, 상대는 숫자가 많은데다 살수의 방식으로 덤벼온다면 매소향으로서도 무사할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서로 긴장하고 있는 매소향과 호위들이 대치하는 사이, 칼이 부딪히고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몰려왔다.
"매 여협? 야심한 시각에 여긴 어쩐 일로..."
"남궁 대부인?!"
매소향은 언소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놀랐지만 곧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니 처음 왔던 날에 얼핏 얼굴을 본 것도 같았다. 단지 그 날은 강윤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눈이 뒤집혀서 주변이 보이질 않았던 것뿐.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거죠?"
"...요양차 왔어요. 제갈 여협이 아이를 본다고 해서 얼굴을 비춘 것도 있구요."
언소영은 대답을 마치고 나서 매소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당황해서 언소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매소향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갈 여협을 찾으려고 했어요... 분명 의원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어서..."
매소향은 자신이 꺼낸 변명이 굉장히 철없는 아이처럼 들린다는 사실에 귀까지 붉어졌다.
"그런가요? 하필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날 찾는다니, 어째서죠?"
그 때, 제갈미령과 당혜원이 뒤따라 나타났다. 당혜원과는 면식이 없기에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매끄러운 경신법을 보니 그녀 역시 무림인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
"말해줘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가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갈미령을 언급한 것도 사실 그나마 그녀를 언급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만든 사내를 찾으러 몰래 나왔다고 하기에, 매소향은 그다지 얼굴이 두껍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매 여협?"
강윤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일단 적당히 둘러대고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매소향의 눈에 못 보던 여자가 사내의 등 뒤에 반쯤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 그 여자 누구야?"
매소향이 당황하여 큰 목소리로 외치자, 반쯤 숨어있던 여인은 오히려 얼굴을 내밀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맹랑한 반응에 어쩐지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참고 있는 매소향에게, 언소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 여협... 제갈 여협을 찾으러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이 시간에 사람들 눈을 피해서 왔는지 답변도 없이 계속 소란을 피우면 곤란합니다."
언소영의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음성이 낮게 깔리자, 매소향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 때문에 늦은 밤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나온 사람들이 참 많았다.
결국 주약선의 말대로 그저 의원 반대편에 있을 뿐이었던 일을, 자신이 괜히 들쑤신 것이 잘못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려던 매소향의 눈에 사내와 이름모를 여인이 다시 비쳤다.
'옷을...?'
그러고보니 언소영과 제갈미령, 이름모를 여고수는 모두 침의바람으로 급하게 나타났는데, 강윤과 그 곁에 붙어있는 여인은 옷을 제대로 챙겨입은 것이 눈에 밟혔다.
흑의인들 역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애초에 잠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으니 논외였다.
아무리 가벼운 무복차림이라고 한들, 이 시간에 어째서...?
"아...!"
그 때, 매소향은 놀라운 깨달음이 제 머리를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어떠, 어떻게...! 설마, 당신들...!"
<내가 정말, 여자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남궁세가에서 보낸 어느날 밤 사내가 자신에게 속삭인 말이 떠오르고, 제각기 다른 매력을 품은 여인들의 얼굴을 돌아본 매소향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경악했다.
자신이 떠올린 가능성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 사내가 하는 일 중에 말이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왜 그러시죠?"
언소영은 영문을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편 매소향은 그녀가 깨달은 것을 이 자리에서 속시원히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부지불식간에 입을 놀려버린 자신의 경솔함을 저주하며, 매소향은 얼른 안색을 바꾸고 입을 열 때였다.
"미, 미안해요. 내가 그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 흡?!"
"미안해요."
매소향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언소영에게 기습을 당해 수혈을 짚였다는 것을 알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언소영이 보여준 반응을 보고 무심결에 방심해버린 것은 인정하지만, 분명 남궁세가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무위는 이 정도는 아니었을터였다.
매소향은 쓰러지는 자신을 받아드는 언소영의 미안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으며, 의식을 잃었다.
재수가 없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다.
차라리 성연군주와 떡치는 현장을 들켜버린 거라면 그나마 낫다. 내가 다른 여자를 건드린 거라고 우기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상공...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소영은 잘못 없어요. 내가 하라고 한 거잖아요."
하지만 매소향은 대체 뭘 보고 알았는지 몰라도 여기 있는 여자 전원, 혹은 일부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가 포함이 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무튼 엄청난 스캔들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본인 역시 나와의 관계를 반쯤 용인하고 있는 매소향이지만, 솔직히 이 여자를 완전히 믿기에는 아직 조금 부족하다.
"일단 잡아둔 것은 잘했다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어머니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어머니 역시도 억지로라도 붙잡아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 같다.
"미리 말해두지만 살인멸구는 생각도 하지마렴."
"어머니, 그건 당연한..."
"당가에 매소향의 딸이 있잖니."
"어머니!?"
내 당황한 목소리에 어머니는 농담이라며 살짝 웃었다.
농담 맞겠지...?
"아들,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수도 쓰지 않고 돌려보낼 수는 없게 되었단다. 그건 이해하지?"
"...네."
"어미와 융이는 괜찮을지도 몰라. 하지만 매소향이 입을 잘못 놀리면 사실을 부인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흩어져야할 거란다."
"네, 알고 있어요."
요컨대 선후의 문제였다.
우리가 충분히 세력이라고 할만한 것을 갖춘 다음이라면 외부에 공개하더라도 거의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 공개된 다음 세력을 키우려고 할 경우, 고스란히 비방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다. 아이들까지 그런 비방에 노출될 것인데, 그것만은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사실을 부인하든 인정하든 간에 갈라서야만 할 것이고, 그 와중에 아이들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래, 어미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마."
매소향 임신 문제도 아직 해결이 안 된 상황에서 추가로 문제가 터져버리니 솔직히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해.'
나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매소향이 가장 먼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사내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사내와는 만날 때마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그녀의 육체를 탐하고는 했는데, 여기에 와서는 1주일이 되도록 그녀를 안으려고 하기는커녕 첫날을 제외하면 말 한 마디 섞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남편이 가장 우선이고, 사내와의 관계는 그보다 순위가 밀렸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임신한 그녀를 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사정이 있어도 그만, 아예 그녀에게 욕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면 그걸로 또 그만.
'아이를 낳는 사태를 피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을텐데...'
하지만 남자의 기억이 똑똑히 남은 그녀의 육체는 본능적으로 아쉬움을 느끼는 듯했다.
사내와 보낸 열락의 시간이, 농밀함도 시간도 부족한 남편과의 밤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내가 어디 있는지 알면, 적어도 사정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틈타 몰래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만난 사내는, 얼굴도 모르는 여인과 부자연스럽게도 옷을 완전히 갖춰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밤에 무공을 수련하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괘씸하리만치 바짝 붙어서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여인과 둘이서만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난다?
오히려 수상한 사이의 두 사람이 일부러 두 사람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감추기 위해 과하게 노력한 흔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소란을 듣고 나타난 사람들이 사내를 제외하면 모두가 여인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매소향 자신처럼(이 부분에서 그녀는 전혀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중년의 여인들.
그녀들이 매소향을 제외한 강윤의 여인들이고, 여기는 그런 여인들만을 모아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앞뒤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깨달은 사실을, 고이 감추었으면 좋으련만 매소향은 어리석게도 그것을 밝히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지금?
'아.'
매소향은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식 속 세상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의식이 꿈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