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82 낳아주세요 (2)
나와 어머니는 매소향을 두고 나왔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나로서는 그 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일단 매소향을 보자마자 대판 싸울줄 알았던 어머니가 일단 고개부터 숙이면서 일을 수습해주려고 했는데, 결국 매소향의 고집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대체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요?>
그녀가 말하길,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나 어머니의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아무리 매소향에 대한 것을 감춰준다고 약속해도, 우리가 한 번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약속을 쉽게 뒤집고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게다가 여기 의원들은 대부분 우리 사람이라서, 매소향이 가진 아이가 내 아이라는 사실만 입단속시키고 매소향만 엿먹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니야, 오히려 어미가 미안하구나. 네가 어미와 모자의 인연을 맺지만 않았어도..."
한편 어머니는 그런 매소향의 의심이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가 뿌린 씨인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잘못 없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최대한 노력해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건 윤이 네 잘못이 맞단다."
네?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눈꼬리는 분명히 호선을 그리고 있어 미소에 가까운 표정인데,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에서는 완연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
좆됐다.
"어미가 분명히 말했지? 매소향만은 안 된다고,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남궁세가로 가기 전 이야기였다. 그 전에 건드린 것까지는 묵인해주겠지만, 더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정어법만 믿고 들키지만 않으면 될 거라 생각해서 그 말을 어겼는데, 그 결과가 이거였다.
"당분간은 무공에 전념하면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있거라. 매소향을 어떻게 구슬릴지는 어미가 생각할테니."
"어, 어머니? 그런데 제가 아직 의원의 일을 다 배우지 못해서..."
"어머, 겸손할 것 없단다. 이미 일을 다 파악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것저것 손을 대서 고치고 있다면서? 주 의원의 칭찬이 자자했단다."
애써 꺼낸 핑계는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언소영에게도 이야기해서 수련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어머니는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표정이 얄팍한 가면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아마 견이가 봐도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낮에는 꼼짝없이 땀이나 뻘뻘 흘리면서 무공 수련이나 하게 생겼네.'
나는 어머니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무서워서 마음놓고 한숨 한 번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매소향이 찾아와서 잠시동안 의원의 특별구역이 떠들썩해졌지만, 당장 그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 무공수련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되자 적어도 겉으로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이상없으십니다."
"고맙소."
주약선은 얼마 안 있어서 아이를 출산할 팽연화의 맥을 짚어주고는,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으니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야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역시 무공은..."
"절대 안 됩니다. 당분간은 심상수련으로 참으세요. 답답하시면 가벼운 산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알겠소..."
원래부터 명의로 인정받던 주약선이었지만 그녀가 사실은 그 유명한 화씨일문의 직계, 그것도 가주의 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 팽연화는 힘없이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작 바깥에서 해가 떠있는 동안은 거의 강제로 무공수련에 매달리게 된 신세인 사내가 들으면 부러워서 배가 아플 상황이었지만, 팽연화는 며칠째 방 안에서 조용히 쉬는 것이 답답했던 것이다.
팽연화에 비할 수 없을만큼 경지가 낮기는 했지만 무공 한자락 정도는 익힌 주약선으로서도 그 갑갑함은 일부나마 짐작이 되었기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들어오면서 보니 강 소협이 언 여협께 가르침을 받고 있더군요. 그것이라도 본다면 조금 답답함이 가실지도 모르니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본디 다른 사람의 수련을 구경하는 것은 실례에 해당했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팽연화라면 전혀 흠이 잡힐 일은 아니었다.
팽연화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렇게 주약선을 따라 나가보니, 과연 강윤이 언소영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맞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팽연화의 눈에는 절대 얼굴이나 급소는 건드리지 않는 것과 실수로라도 내력을 실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신경쓰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내력이 실리지 않은 주먹 정도는, 사내 정도의 고수가 호신기를 펼치면 아무리 맞아도 끄떡없을터.
'하지만 분명히 아픔 정도는 느낄 것이니, 집중력이 끊어지지 않는 효과가 있겠구나.'
미미하지만 조금씩 발전해나가는 사내의 몸놀림을 보고, 도를 쓰는 자신으로서는 시킬 수 없는 수련법이라는 사실에 팽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공, 너무 급해요. 움직임이 급하면 몸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고 반응이 늦어 변초에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 속도는 내주지 않으면 따라잡히잖아요."
당장 팽연화보다는 떨어지지만 언소영 역시도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인 고수.
묵직하게 뻗어나가던 언가권이 마치 다른 권법처럼 표홀한 움직임을 보이니 내력에서도 경지에서도 밀리는 사내는 그 공세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주약선은 그 매끄러우면서도 치밀한 초식운용에 감탄한 나머지 부지불식간에 입이 열렸다.
"과연... 벽력화(霹靂花)라는 별호가 무색하게 깔끔한 초식이로군요... 핫!"
자신이 입을 열고 나서야 주약선은 타인의 무공 수련을 빤히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손속을 겨루던 두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에 주약선은 얼른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팽 여협만 모셔다드리고 바로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드물게 그녀가 허둥대는 모습에 언소영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주 의원이 나쁜 생각으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믿어요."
심각한 결례까지는 아니라도 트집을 잡자면 생사결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언소영은 별로 문제삼는 기색이 아니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 일로 얼굴을 붉힐만큼 되먹지 못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언 여협..."
가볍게 구경하는 정도야 얼마든지 상관없다고 말하는 언소영의 옆에서,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요...?"
언소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보니 이 색욕의 화신 같은 남편에게는 주약선과 간밤의 신비여고수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렇죠. 주 의원님이 치료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졌으니, 정말 생명의 은인이신데 제가 너무 소홀했습니다."
하지만 사내가 혼자서 납득하는 모습에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쉰 언소영은, 이어지는 사내의 질문에 이번에야말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벽력화가 누구죠?"
자신의 소싯적 별호가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언소영은 굳이 지금까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주약선이 경솔하게 그것을 꺼낸 탓에 사내가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래요, 혹시 소영이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 그게..."
"언 여협께서 예전에 그리 불리셨습니다. 처음 들었습니까?"
전음을 보내서 말릴 틈도 없이 주약선은 진실을 밝히고야 말았고, 사내의 표정이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웃음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벽력화... 큭큭... 그것 참... 강해보이는... 프흡..."
"상공... 웃지마요..."
"흠흠, 미안해요. 하지만, 킥..."
언소영의 당황한 눈초리가 서서히 거꾸로 치솟는 와중에 주약선은 팽연화의 눈짓을 받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연무장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꽤나 시끄러운 굉음이 몇 차례 울려퍼졌지만 주약선은 애써 외면하고, 이번에는 성연군주를 찾아갔다.
문 앞에 서서 안에 기별을 넣으려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야만 했다.
"쉿. 잠시 기다리시오."
마치 공기가 뱉어내는 것처럼 한순간에 모습을 나타낸 사내가 주약선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살수 계통의 수련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 사내는 아마도 동창의 무인일 것이었다.
'설마 황실의 사람일줄은...'
꽤나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여인이라고 남몰래 생각하기는 했지만, 명문가의 젊은 귀부인 정도일줄 알았지 설마 황족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주약선이었다.
잠시 후 사내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군주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채로 주약선을 맞이했다.
"오, 진맥을 하러 온 것이더냐?"
"예, 마마."
대체 무슨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성연군주는 남편 대신 사내의 아이를 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였다.
주약선으로서는 어처구니없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합의를 보았다는데 한낯 의원인 그녀가 그 이상 무어라 말할까.
아직 아이를 가질 시기가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기왕 팽연화의 경과를 살피러 온 김에 그녀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방문하는 것이었다.
"무공 수련이 즐거우신 듯하옵니다."
"그래, 정말 신통하기 그지없더구나.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외부의 기운을 차곡차곡 모아주는데 한 번 대주천을 하고 나면 그렇게 몸이 가벼울 수가 없으니..."
이제 막 이류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놀랍게도 맥문을 짚어보니 지닌바 내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본녀가 어릴 적 먹었던 영약의 기운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그것을 내공으로 전환한 것이라 하더구나.>
그 말을 들은 주약선은 대체 강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먹은 영약의 기운이라면 절정 상급 수준의 고수라면 충분히 타인의 체내에서 녹여내어 상당한 내력증진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거 복용했던 영약이라면 이미 그 내력은 대부분이 체외로 흩어지거나 기력을 보하는데 소모되고 정말 찌꺼기만 남아서 전신세맥으로 흩어질 것인데, 그것을 되살려내는 고수라?
'언 여협도 그렇고, 군주마마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그런 재주가 가능한 거지?'
주약선은 진맥을 하면서도 강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의원된 몸으로 협잡을 하여 그 비밀을 억지로 캐낼 수는 없는데, 정작 그 비밀은 굉장히 먹음직스럽게 그녀를 유혹하고 있으니 오랜 세월 인명을 살리는데 힘쓰며 수양을 쌓은 그녀로서도 애가 달을 지경이었다.
"전혀 이상 없으시옵니다."
"그러하냐? 빨리 날이 가면 좋겠구나."
진맥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군주가 아이를 기대하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본 주약선은, 그녀와는 달리 아이를 원치 않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매소향의 아이를 떨어뜨릴 방법을 주약선이 모르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는 것뿐, 방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씨일문이 보유한 방대한 의서를 뒤져보면 모체에 가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아이를 떨어뜨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인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도 힘에 부친데, 없애는 방법까지 굳이 공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원은 산모에게 안 좋은 것들을 알아야 그것을 삼가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니 아주 모를 수도 없었다.
주약선은 성연군주의 처소를 떠나 매소향을 찾아가면서도,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옳을까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