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81화 (281/383)

밀푸색마 EP.281 낳아주세요 (1)

당영은 오랜만에 만난 강윤을 바라보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헌앙한 것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마냥 기뻐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옆에 있는 능휘연보다 자신이 살짝 빛이 바래보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강윤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멈춰서있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당 소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어요."

사실 그리 잘 지내지는 못했다. 팽연화가 자리를 비운 당가는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내부적으로는 꽤나 어수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사내에게 호소하기에는 자리도 자리일뿐더러 그녀와 사내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가깝다는 확신을 얻지 못했다.

"능 소저도 오랜만..."

"남궁세가에서 만났으니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만요."

능휘연의 말에 당영은 남궁세가에 다녀온 외총각의 부각주가 거기서 강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혼례식을 치른지 두 달 남짓이니 그다지 오랜만이 아닌 것은 사실이라도 굳이 고쳐말할 것까지야 없다고 생각했지만 강윤은 그다지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가워요."

그제야 능휘연도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데 그 모습이 뚱한 얼굴일 때와는 천양지차로 아름다웠다.

당영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인지 아직 사내와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한 그녀였다.

패설을 흉내낸답시고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대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싶어졌다.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런데 삼봉의 한 사람이라는 능휘연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이미 사내와 면식이 있는 듯하니,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영은 억지로 용기를 북돋웠다.

당가에 제법 오랫동안 머물렀으면서도 자신 외에 육촌 자매들과도 전혀 그럴듯한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사내였다.

상대가 설령 능휘연이라고 해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터, 게다가 그녀 역시 미색이라면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 어쩌면 많이 밀릴지도 모르지만...'

패설에도 나오지 않던가. 미색 역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그렇게 전의를 불태우던 당영은, 자신이 잠시동안 매소향의 병세에 대해서 완전히 관심을 끊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금 미안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적어도 내가 매소향을 임신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나를 평범하게 대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당영은 큰 병이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을 보니 임신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외부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니까.'

솔직히 뒷감당을 어떻게 하면 될지 감도 안 잡히지만, 지금은 우선 내색은 하지 않고 두 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런, 제가 없는 동안 여길 찾으셨던 겁니까? 전해들은 것이 없는데..."

"제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당영은 팽연화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안주인 자리를 대리하고 있었다. 각주들이 일을 처리하면 확인하고 승인하는 정도라고는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 때마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이번에 매소향 모녀를 안내하는 김에 내가 있나 보러 온 거라고 했다.

"제가 너무 매정했군요. 간혹 찾아가겠으니 그동안 혹시 섭섭하셨다면 마음에 두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잊겠어요."

입발린 말로라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고 할만하지만, 어차피 당영이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섭섭하기는 했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는줄 모르겠지.

그러고보면 그 옆에 있는 능휘연도 간혹 입을 열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부류였으니 어쩌다 비슷한 사람 둘이 만나서 여기 오게 됐나.

"그건 그렇고, 매 여협께서 한동안 여기에 머무신다면... 능 소저는 어디에 머무시나요?"

"글쎄요..."

능휘연은 잠시 매소향과 눈을 마주쳤고, 매소향은 나를 보며 말했다.

"뭐, 문제될 것 없지 않니. 강 소협, 여기에 비는 방 있지?"

없어도 만들어야지, 내가 죄인인데. 매소향은 티나지 않게 잠깐씩 험악한 눈초리를 보였고, 순순히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때였다.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가에 모시고 싶은데, 능 소저 생각은 어떠신가요?"

당영이 능휘연을 보며 말하자, 능휘연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 당가를 구경해보고 싶었어요."

"네? 트, 특별한 건 없을텐데..."

나로서는 능휘연이 여기에 없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다. 매소향 쪽을 힐끔 보니 별로 상관없는 기색이어서, 나도 안심하고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여기가 당가만은 못하겠지요. 매 여협께서 불편할 일이 없도록 최대한 신경쓰겠으니..."

"강 소협이 아쉽다면 여기도 괜찮구요."

그냥 입발린 소리였는데 능휘연이 냉큼 생각을 바꾸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식겁했다.

다행히 당영이 옆에서 끼어들어서 꼭 한 번 초대해보고 싶었다고 이것도 구경시켜주고 저것도 구경시켜주마 하고 먹이를 흔들어서 다시 당가 쪽으로 기운 것이 다행이었다.

'고오맙다...'

당영은 꽤나 능휘연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데려가려고 애를 쓰는 거겠지.

그렇게 간신히 두 사람을 당가로 보내고, 나는 매소향과 둘만 남았다.

'진짜 어떻게 하냐.'

이젠 숨기지도 않고 나를 노려보는 저 눈이 너무 두렵다. 업보다, 업보야...

당영이 능휘연을 무슨 생각으로 데려갔는지도 모르는 사내의 시선을 받으며, 매소향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매소향은 사실 사내를 만나기 전까지 불안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숨어서 교접을 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들킨 적이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녀가 아무리 목청을 높여서 강호 전체에 이 자가 더러운 음적이라고 외치더라도 사내가 발뺌을 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사내는 제갈미령의 의자이자 팽연화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세 여인의 관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음행을 핑계로 앞날 창창한 후기지수를 매장하려 한다는 의혹도 생길 수 있었다.

"우선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다시 한 번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죄송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오는 사내의 모습에 겉으로는 날카로운 태도를 취하되 내심으론 이해해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이지.'

이미 딸이 자신의 외도를 알고 말았다.

물론 사내의 겁박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그 결과 남편 아닌 사내의 아이를 가지고 말았으니 이것을 외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성정이 특이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것을 생각하면 희미하게 일어난 이해심도 봄눈 녹듯 사라졌다.

"..."

그러자 사내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실 매소향이 생각하기에도 이미 들어선 아이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풍문으로는 독한 약을 써서 속을 망치면 아이를 유산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죄없는 아이에게 하기에는 꺼려질 뿐더러 모체에도 타격이 갈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말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 목소리는, 절대로 그녀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설마... 네가 말했어?]

전음으로 묻자 사내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절대 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서로 꼴도 보기 싫어하는 사이이면서도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대강의 사정을 알고 왔다는 의미.

들어오지 말라고 해봐야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들어... 와요."

매소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여인, 제갈미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요, 제갈 여협. 어쩐 일로 저를 찾았나요?"

"모르지는 않을텐데요."

매소향의 질문에 제갈미령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이젠 해산하느라 고생한 몸도 완전히 추스른 그녀의 눈이 별빛처럼 빛나며 매소향을 압박했다.

"아, 잘나신 아드님이 나를 겁간해서 아이까지 갖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나보군요."

그러고보니 제갈미령 역시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지 제법 되었는데 배가 쏙 들어간 것을 보니 이미 해산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새삼 의식하고보니 서러움이 치밀었다.

눈앞의 여인은 남편과 금슬이 좋아 그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는데, 자신은 눈앞의 젊은이에게 범해져서 원치않는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 격차에 눈물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에게 눈물을 보일지언정 이 여인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요. 잘 알고 있군요."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에 매소향은 울화가 치밀었다. 뭐라 독한 말을 한 마디 더 쏘아주려는 순간, 제갈미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할게요, 그 아이는 낳아주세요."

"...뭐라구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서 말하는 모습에 매소향은 잠시 자신의 귀가 어떻게 된 것인가 의심했다.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매 여협도 원해서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요."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아이를 낳으란 말인가요? 남편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그래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부탁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구요. 지금 당장 본산으로 돌아가서 남편과 이혼하고 아드님과 혼례라도 치르란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지만, 지금껏 본 적 없는 제갈미령의 고개 숙인 모습에 오히려 매소향이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저희가 데리고 키울게요. 절대 매 여협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에요. 원하는게 있다면 최대한 조건에 맞추겠어요."

"대체, 왜죠? 이런 아이를, 왜..."

미혼인 사내가 이런 아이를 갑자기 가져봐야 좋은 일이 있을리가 없다. 존재가 알려지면 뒤에서 수근대는 사람은 분명히 나올 것이었다.

혼처를 찾는 것도 마땅치 않아질테니, 태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내에겐 인생에 걸림돌이 하나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가해한 존재를 보는 듯한 매소향의 시선에, 제갈미령은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에게 해가 간다면 내 아들이 슬퍼할테니까요."

매소향은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추었고, 사내 역시 사실은 제갈미령이 하는 말을 그대로 하고 싶었음을 알았다.

썩 호인이라 하기 어려운 매소향이었지만, 두 사람의 간절한 시선을 받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표독한 성품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최대한 제공하겠다고 상대가 약속하고 있으니 그녀 역시도 고민에 들어갈만은 했다.

일 각 정도가 지났을까. 매소향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듯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금세 모여들었다.

"싫어요."

하지만 기대하던 것과는 영 다른 대답에 두 사람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매소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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