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80 열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2)
"자, 여기 손 내밀어보거라. 옳지, 잘 하는구나, 영특하다."
"앵툭하?"
성연군주는 견이를 보고 눈이 돌아갔는지 손수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낯을 조금 덜 가리는 견이는 오늘 처음 보는 군주와도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 잡고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아들아, 고맙다.'
오늘 성연군주를 데리고 와서 하렘 커밍아웃을 했다.
다행히 의도한대로 내 여자들에게는 악감정없이 상황이 마무리되기는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방심한 덕분에, 실실 웃는 현장을 들켜 때아닌 묵언수행을 강제당하고 있던 나를 구해준 것은 견이(와 아이를 데리고 후원에 산책나온 시비)였다.
"영특, 영특이란다. 똑똑하다는 뜻이야."
"뚜시야?"
한눈에 봐도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외모의 아기가 후원의 의자를 붙잡고서 턱하니 서있으니 안 그래도 아들이 급하던 성연군주의 눈이 돌아가는 것도 당연지사.
당장 데리고 어머니와 다른 아기 둘이 모여있는 아기방으로 가서는 소율이와 융이도 구경했지만 낯을 가리는 소율이와 신생아 융이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다시 관심은 견이에게 몰렸다.
이제 간신히 엄마, 아빠를 뗀 녀석이 말을 못 알아듣고 말꼬리만 간신히 따라할 때마다 성연군주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리 영특하니 아비를 닮아 장차 헌앙하게 자라면 유명한 기재가 되겠구나."
아기 특유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던 성연군주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슬쩍 눈을 피했지만 그녀가 견이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다만 네 아비의 난봉질만은 닮지 말거라. 그것만 안 닮으면 완벽한 기재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야."
"남분?"
"난봉. 난봉질이란다. 이게 그러니까..."
"저, 군주마마..."
언소영이 곤란하다는듯 나서자 그제야 성연군주는 입을 다물었다. 난봉질이라는 말은 그러게 왜 가르쳐?
하지만 그 이후로도 성연군주는 못 견디게 즐거운 기색이었다. 실컷 아이를 따라 뒤뚱뒤뚱 뒷걸음치며 걸음마 연습을 시킨 다음에야 만족한 표정으로 아기방을 나왔으니까.
"하아... 정말 아이는 귀여운 것이로구나. 얼른 태어났으면 좋겠노라."
비록 소율이가 슬슬 피하는 것 때문에 조금 섭섭하기는 했다지만 견이를 통해 그 섭섭함도 지워질만큼 듬뿍 만족한 것 같았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면 기르는 고생이 장난 아니지만, 아랫사람은 뒀다 뭐하겠는가?
그저 건강하게만 태어나준다면, 고생은 아랫사람들이 다 해주고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까지 귀여움만 향유하면서 기를 수 있겠지.
한편 나와 언소영을 따라 양하정과 함께 계속 걷던 성연군주는 다시 의원 쪽으로 걸음이 향하는 듯하자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어디를 가는 것이냐?"
"부인께서도 같이 지내게 되었다고 주 의원에게 이야기는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의원에 왔으니 내가 슬그머니 호칭을 바꿔서 말하자, 성연군주는 미간을 모았다.
"주 의원도 다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었느냐...?"
"당연합니다."
지낼 곳을 만드는데 굳이 의원의 형태를 취한 것 자체가 산모나 아이의 건강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던가.
위생을 챙기고 있으니 위험성이야 급감한다쳐도 이 시대에는 언제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아이가 병을 앓다 큰일이 날지 모른다.
그럴 바에야 아예 의원에서 사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는가, 라는 골자의 설명을 듣자 성연군주의 시선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수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백성들을 돕는 좋은 의원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렇다고 순전히 사욕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미묘하구나."
이 의원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히 우리 가족이다. 그 다음이 남녀를 가리지 않은 위급환자, 그 다음이 여성 일반환자.
"저야 순전히 사욕입니다만, 백성을 위한 결단을 내린 것은 주 의원이죠. 저는 그냥 그걸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공익과 사익의 결합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군요."
"그런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대략 납득이 된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뭔가 뒤에서 언소영과 속닥거리기 시작하는데, 대개 나에 대한 디스였다.
"생각도 제법 바르게 잡혀있는 것 같은데 왜 여자는 주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냐?"
"글쎄요... 저도 잘..."
언소영은 난처하다는 듯 대답을 회피했지만 종종 성연군주가 집요하게 물어오면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는 했다.
아니, 근데 솔직히 역강간으로 엮인 여자가 내가 난봉꾼이니 뭐니 너무 말이 심한 것 아니야?
'난봉꾼이 맞긴 하지만...'
자기들끼리 속닥대고 있기는 한데 무림인의 귀에 안 들릴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주약선의 집무실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질문이 금기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얼굴을 드러낸 자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혹, 여인이 더 있는 것이냐?"
"...예."
"전부 해서 몇인 것이냐?"
그러고보니 나도 세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모인 기존 식구가 넷, 마교 밀프가 둘, 아직 오지 않은 남궁혜가 하나요, 이번에 새롭게 포함되어 함께 지내게될 여자가 둘...
'공식적으로 아홉이나 되네...'
"아홉, 이옵니다. 군주마마를 포함한 숫자입니다만..."
언소영 역시도 그런 공식적인 여자만 카운팅할 생각인듯 아홉을 제시했다. 아이를 가진 일곱과, 성연군주와 양하정.
매소향 정도는 언소영도 알고 있을텐데 굳이 말하지는 않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하..."
잠시 얼빠진 얼굴이 된 성연군주는 제 이마에 손을 얹고는 입을 열었다.
"열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아니, 이것이 다행인 것이냐?"
"모르겠사옵니다..."
명확한 숫자를 제시하고 나니 언소영도 현타가 온 것 같았다.
넋이 나간 두 여자의 시선을 피해서 나는 얼른 주약선의 집무실에 기별을 넣었고, 그녀의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약선과, 그 옆에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 나쁜 놈아아아아아!"
여인, 매소향이 귀기 어린 목소리로 내 멱살을 틀어쥐는데,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좆됐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뭐지? 뭐지? 좆될 사유가 있었나? 아닐텐데?
"저 자는 또 누구인 것이냐...?"
"화산파의 매소향 여협이옵니다. 하온데..."
여전히 뒤에서 속삭이는 두 여자의 목소리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아무래도 열 명을 채운 듯싶사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
나는 지금 눈앞에서 도끼눈을 뜬 매소향과 이 매소향을 숫제 볼드모트 취급하던 어머니와 팽연화가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고는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매 여협께서 늦으시는군요... 혹시 병세가 중하신 것은 아니신가 염려됩니다."
능휘연은 눈앞의 날카로운 얼굴의 여인이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양심이 쿡쿡 찔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병세가 심하신 건 아니실테니까..."
따지고 보면 병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앞의 여인에게 말할 수도 없어서 어물쩍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가 의술을 약간 익힌 바가 있는데, 당장 몸에 나타나는 증세가 없다고 해서 꼭 건강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그런가요?"
능휘연 역시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행실을 예측할 수 없고 자유분방하다는 평을 듣지만 눈앞의 여인이 간혹 이렇게 말할 때는 당황스러웠다.
드러난 증세가 없더라도 깊은 병이 있을 거라는 말인가? 아직 밝혀진 것도 없는데 불안감을 부추기는 말을 해서 무엇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알고 지낸 기간이 짧음에도 그녀가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기에 능휘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 하지만 물론 그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몸은 어떤 식으로든 병이 생기면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법이니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능휘연은 뒤늦게 자신의 말을 수습하는 여인의 안색이 꽤나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사천에 이런 이름난 의원이 생긴 줄은 몰랐습니다. 급병을 제외하면 여인만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독특하군요."
"그렇지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자신보다 몇 살 어린 여인이 어쩐지 자랑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자, 능휘연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뒤늦게 납득이 가는 것이 있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도 사천에 있는 곳이고, 기부금이라는 것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라니 당가에서도 꽤나 기부금을 낸 모양이구나.'
주약선이라는 명의를 찾아 사천만이 아니라 제법 먼 곳에서도 일부러 사람들이 찾아와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니, 그것을 후원한 당가의 일원으로서 콧대가 높아질만도 한 것이다.
그렇게 여인과 주거니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매소향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자, 들어간지 무려 한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역시 어려운 것 같았다. 그 때, 뒤를 따라서 나오는 사내의 얼굴을 본 능휘연은 살짝 눈이 커졌다.
"강 소..."
"강 소협!"
그녀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오던 목소리가, 옆에 서있던 여인이 토해낸 일성에 지워졌다.
한편, 반가운 목소리로 사내를 부른 여인 역시도 능휘연과 눈이 마주치는데, 그 표정이 눈이 찢어질듯 커져있어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사천당가주의 장녀, 당영의 눈에서 공포 비슷한 것을 읽어낸 능휘연은, 어쩌면 일이 복잡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언소영이 잠시 성연군주를 데리고 자리를 비워준 사이, 나는 주약선의 앞에서 매소향과 대면하고 나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거, 어쩔 거야...! 안 생긴다고, 안 생긴다고 했잖아...!"
분노가 진정되자 이번에는 서러움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인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따지는 매소향에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정어법의 무적신화가 깨지고야 만 것이다. 아무래도 잠시 눈이 뒤집힌 사이에 정어법이 풀려버렸고, 일부 들어간 아기씨가 기어코 매소향의 난자를 명중시킨 모양이었다.
옆에서 매소향이 서럽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주약선의 눈은 한없이 쓰레기를 보는 눈이 되어있었고, 나는 더더욱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 이게 죄송으로 될 일이야? 너, 솔직히 말해. 이거 일부러 이런 거지? 내 인생, 망가뜨리려고... 흐으윽...!"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여협."
나도 정말 도게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젠가는 정말로 임신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당혜원도 실수로 임신시킨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기뻐해주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이런 식의 임신은 정말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다.
"어떻게 할 거야... 여기 주 의원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단 말이야..."
훌쩍대는 매소향에게 나는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가 없었다. 현대에서 하는 것처럼 낙태시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정말 나는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어찌 되었든 내 아이가 생긴 것인데, 차마 그런 짓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매 여협, 정말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당장 방법이 없습니다만, 우선 여기에 머물러주세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열심히 매소향을 달랬지만 그녀는 훌쩍대면서 계속 내게 신세한탄을 했다.
아무래도 성혈단으로 성장이 멈춘 아들에게 해약을 먹였더니 있던 내공이 사라지니까 어머니 탓이라고 난리를 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시 슬슬 내력이 성장하니까 그나마 진정된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임신크리가 터져버린 것이다.
'능풍연... 너 진짜...'
사실 원인을 거슬러올라가면 당시 괜한 수작을 부린 영호경의 책임이 크지만 아무튼 능풍연에게도 책임은 있지 않은가.
애초에 사제한테 들어간 약을 능풍연이 압수해놓고 결국 지가 먹은 것은 본인의 책임이란 말이다.
"너... 정말 어떻게든 해줘야돼. 안 그러면 다 퍼뜨릴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옆에서 듣고 있는 주약선 때문에 내가 뭘 했는지까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주약선의 시선은 온도가 상당히 내려가있었다.
이래저래 현대문물을 도입하고 의원 내 행정을 개혁해서 쌓은 호감도가 모조리 날아가고 오히려 적자를 찍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 아무튼 나가죠. 주 의원님, 병실 남는 곳 있죠? 죄송하지만 매 여협께 하나 내주시겠어요? 비용은 제가 부담할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매소향을 달래고, 눈물을 흘려 충혈된 눈까지 어찌어찌 가라앉힌 다음에서야 나는 일단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능휘연과 당영을 본 나는 대체 매소향이 무슨 생각으로 얘들까지 이끌고 왔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