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79 열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1)
"노야,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비키게! 호령께서는 안에 계시지 않는가!"
한때 마교의 일원이었으나 이젠 마교를 등진 노인, 황두명은 쭈그러든 얼굴이 무색하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지금 호령께서는 굉장히 바쁘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심이..."
한편 은령회의 수장급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영주들 가운데 하나인 호령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남자는 된통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안에 기별도 넣어보지 않고 자네가 답을 해? 대체 얼마나 큰일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나, 이 노구가 그리 우습게 보이던가?"
그가 기별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련히 넣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노기에 눈이 뒤집힌 노인은 사내의 사정을 고려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벌컥
그 때, 처소의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당당한 체구의 사내인 호령과는 달리, 여린 체구의 여인이 나타나자 그제야 사정을 짐작한듯 황두명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그 여인은 두 사람의 시선에 당황하다 제딴에는 급하게 발을 놀려 그 자리를 벗어났고, 그 뒤에서 느릿느릿 호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황 노사께서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신가?"
"...잠시, 안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리 급한 일은 아닌가보구려. 현화루의 차기 특급기녀로 키우고 있는 아이라 하니 좀 오래 맛보고 싶었거늘."
한눈에 보아도 대충 옷을 걸쳐입은 모양이 허랑방탕한 건달이 따로없었는데 그런 주제에 호랑이 가면은 꼭 걸치고 나온 그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딱히 그것을 오래 끌 생각은 없는 듯 몸을 휙 돌리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가면 너머로 얼핏 보내는 눈짓을 용케 알아본 황두명은 그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남녀의 방사의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데, 이미 상황을 짐작한 황두명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기녀가 필요하시다면, 화락궁에서 몇 추려서 불러도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린가? 화락궁?"
바로 되묻던 호령은 냄새를 모조리 창 밖으로 날려버리고는 자리에 앉는 짧은 사이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그것들은 다 한 번 이상씩 다른 놈에게 다리를 벌린 것들이 아닌가. 기분나쁜 소리 하지 말게."
방금 그 여인도 기녀가 아니었던가? 잠시 말문이 막힌 황두명은 곧 그녀의 얼굴이 제법 앳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첫경험을 하지 않은 여인들만 원한다 그 말인가?'
그냥 여인을 밝히는 줄 알았던 자가 순결한 처녀를 밝힌다는 쓸데없는 깨달음에 황두명은 내심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가?"
호령의 말에 황두명은 천천히 호흡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은호에게 내리신 명령 말씀입니다만..."
"아, 노사가 죽고 못 사는 그 강윤이라는 애송이 때문에 온 게로군!"
호령은 껄껄 웃으며 제 무릎을 쳤다. 그 스스럼없는 반응에 황두명은 천불이 치미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그 자에 대한 문제는 제게 일임한다고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고작 후기지수 하나,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황두명은 약조를 받아냈었다.
감히 자신이 수십년 일궈낸 복수의 미래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그 애송이를 파멸시키는 것은 스스로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은호를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어찌나 놀랐던가.
"아, 회의 일을 자꾸 방해한다고 하니 거슬려서. 하지만 걱정마시오. 아무래도 은호는 실패하고 죽은 모양이니."
"...전해들었습니다."
흑호와는 남궁세가를 공격할 당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쪽에서 일방적으로 경원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호와는 썩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두명은 호령의 산뜻하기까지 한 태도에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은호가 실패하고 죽었다는데도 별로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구나.'
은호 정도면 황두명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절정 최상위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잃었는데도 유유자적하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장황해지니, 황두명은 무례하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담아 말했다.
"허나, 그 자를 다시는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그 자는... 제가 없애버릴 겁니다."
말 몇 마디로 교주 이하 마교의 수뇌부를 구워삶아 그가 복수를 위해 일궈온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의 삶의 의미를 무너뜨렸으니 마땅히 그 역시도 고통받아야함이 옳지 않은가.
호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명심하고말고. 노사가 죽기 전에는 두 번 다시 그 자를 노릴 일은 없을 것이오."
허무하기까지 한 대답에 황두명은 허탈했지만 아무튼 대답은 받아내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령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구려."
"...?"
"그 자가 노사를 방해하려고 일을 꾸민 것도 아닌 듯한데, 어째서 그렇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오?"
황두명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납득이 가는 내용이어서가 아니라, 흑도의 상리에 어긋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자신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는다.
이것이 흑도의 상리이고, 그것을 참는 것은 참았을 때 더 큰 이득이 될 때나, 힘이 부족해 잠시 은인자중하고 있을 때 뿐이었다.
황두명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호령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에게 악의는 없었으니 용서해주자... 라는 군자의 말을 읊을 생각은 없었소. 허나, 내 보기에 그 자에 대한 노사의 원한은 심하게 집착적인 듯해."
"집착적...?"
"황 노사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내가 노사에게 들은 바로는 그렇게까지 원한을 불사를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 말이오."
호령과의 자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지만, 황두명은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의원에 돌아오자마자, 성연군주와 양하정 두 여인은 강윤에게 이끌려 지금까지 들어가보지 못했던 특별구역에 발을 디뎠다.
"군주마마!"
호위 한 명이 의원에 남아있다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놀랐지만, 군주의 명에 따라 개발바닥에 땀나도록 군주를 찾아헤매고 있는 조장 이하 동료들을 찾으러 나갔다.
기절당했다가 다시 일어나 몸을 추스리마자 그녀를 찾아헤맨 이에 대해서 매정한 처사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들로서도 빨리 모이는 편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를 일.
한편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한 성연군주는 특별구역이 일반구역보다 더욱 공들여 만들어진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호오... 제법 잘 만들어진 곳이로구나..."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녀가 어린시절을 보낸 왕부보다는 조금 못한 수준이었지만 지금 사는 집에 비교하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수준.
본래 있던 건물을 전용하거나 고쳐서 쓰고 있는 의원에 비하면 이 곳은 대대적으로 개축이 이루어져있었다.
"여기서 지내라는 말이지?"
"예. 귀하신 분께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그녀의 마음은 만족스러웠다. 이런 성의를 보인 자들이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황족, 성연군주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컷 육체를 탐한 다음에야 이 곳을 내어주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황족이 아니라 제 여인을 위해 허락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인식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군주마마를 뵙사옵니다."
"그대는...?"
포권지례이기는 했지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오는 여인을 보고 군주가 입을 열었다.
미색으로는 결코 성연군주에게 밀리지 않는 여인은 사내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말했다.
"소인은 진주언가의 여식으로, 이름을 소영이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언소영은 나직하게,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있는 강윤 소협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연군주의 얼굴이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홱 돌아갔다. 강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여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체...!"
노성을 터뜨리려던 성연군주는 곁에 있던 양하정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제가 군주님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아시더라도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길.>
지난밤 분명 사내가 그리 말했을 터였다.
"...이모님도 알고 계셨군?"
"예, 군주마마."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양하정의 태도에 성연군주는 맥이 탁 풀렸다.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없는 정력과 욕정을 가진 남자가, 지금껏 양하정과 떨어져있는 사이 어떤 여인도 건드리지 않았을리가 없다는 추측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 여인 입장에서는 내가 불청객이겠구나...'
구룡이라는 위치는 미혼의 남성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니, 외부에 공표하지는 않았겠지만 저 여인은 분명히 자신의 그의 아내라고 말했고 사내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졸지에 자신이 그와 내연관계를 맺은 여인이 된 것이로되, 그 잘못은 오롯이 사내와 그것을 받아들인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죄책감 어린 시선으로 언소영이라는 여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군주마마께서도 이이에게 붙잡히신 것 아니시옵니까? 심려치마옵소서."
붙잡히다, 라니. 실로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성연군주는 무의식중에 그를 놓아주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물러가야할 것을, 어떻게든 편법을 궁리하고 있던 그녀는 언소영의 부드러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정말, 본녀가 여기에 머물러도 되겠느냐? 저 자는 그대의 남편이 아니더냐."
"물론이옵니다."
여전히 분기 한 점 서리지 않은 그녀의 말에, 성연군주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렇다면, 한동안 신세를 지겠노라. 여기 머무는 동안 본녀는 결코 신분을 이유로 그대를 겁박하는 일이 없을 것을 약속하겠다."
"과분한 말씀이시옵니다."
그렇게 보기 좋게 마무리되는 듯싶었지만 그것 역시도 착각이었다.
성연군주는 언소영의 뒤로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여인들을 보고 점차 얼굴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기는 흐뭇한 표정으로 짐짓 자신은 이 상황의 원흉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향해 쏟아지려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