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73화 (273/383)

밀푸색마 EP.273 귀하신 분의 뜻이다 (1)

아직 거동이 썩 편하지 않은 제갈미령의 방에 다같이 모인 다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받은 여인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아무리 우리가 순순히 받아주고 있어도 그렇지..."

"그래도 저 쪽에서 먼저 마음대로 한 것 아닌가요? 윤이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풀려난 다음에도 아랫도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내에게 기가 찬 시선을 보내는 팽연화에게, 제갈미령이 두둔하듯 말해주었다.

억지로 관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지금 알게 된 제갈미령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래, 사실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은 해야겠지?"

팽연화 역시도 지금 그 문제를 따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알았는지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조심할게요..."

미안한듯 고개를 꾸벅이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도, 여인들 가운데 누구도 그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른 여자를 안 건드리겠다는게 아니라,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상대인지 확인하고 건드리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하아... 그러면, 이제 고민해봐야겠네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환골탈태하던 날 밤, 먼저 사정을 전해들은 언소영은 비교적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이것부터 결정할까요?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상대가 관심을 거둔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따라서 애초에 고민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받아들일까의 여부도 사실 말해봤자 의미가 없기는 했다.

"어차피 거부는 어렵겠지만요."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지금 움츠리고 있는 사내의 선에서 거부했을 것이었다.

언소영은 우선 거부한다는 선택지를 제외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충분히 이해했다.

문제는 그 다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시동안 이어진 침묵 속에서 팽연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처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가?"

"위험해요. 상대가 본격적으로 뒤를 캐기 시작하면 금방 들통나겠죠."

언소영의 말대로, 만약 마음먹고 상대가 뒤를 캐기 시작하면 방법이 없었다.

강호에서 정보기관이라고 하면 흔히 하오문이나 개방을 떠올리고는 하지만, 동창 역시도 만만찮은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 쪽에서 관계의 진전을 원한다면 막을 방법도 없으니 더욱 빨리 들통날 거구요."

제갈미령이 덧붙이자, 팽연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때 당혜원이 살짝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지금 이미 팽 부인께서 알고 계신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군주마마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게..."

"새언니께는 굳이 외부로 퍼뜨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 함구해달라 부탁드렸네."

양하정 역시도 비밀을 들킨 셈이었으니, 순순히 서로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해주었다.

"그 쪽도 불안하기는 하지... 전에 듣기로 어느 황족과 꽤나 친밀한 사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황족이 그녀인듯 싶네."

과거 외부활동을 자제했던 탓에 양하정과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팽연화는 양하정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두 분이 서로를 이모님, 조카님 하고 부르기는 했었죠..."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군주가 어렸을 적, 힘들었던 시절에 새언니가 힘이 되어준 모양이더군."

"그 정도라면...!"

당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자, 잠깐, 설마... 여기서 또...?"

"네, 이렇게 된 거, 팽 부인도 끌어들이는 것이 어떨까요?"

대화의 흐름을 듣고 그녀의 생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제갈미령의 말에, 당혜원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난 모르네..."

현실도피하듯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흘려듣기 시작한 팽연화의 시야에 희미하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잡혔다.

눈치가 있어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좋은가 싫은가로 나눠보자면 좋다는 쪽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팽연화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불뚝 심술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그렇게 좋아하게...! 몸만 가벼워지면 눈물이 쏙 빠지게 굴려줄테니.'

그렇게 남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할 뿐 대화의 흐름을 외면하던 팽연화의 방관 속에서, 이 꼬여버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는 양하정을 그녀들 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양하정을 끌어들인다. 밀프 집단지성의 결과물치고는 참 내 입맛에 맞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적극적으로 양하정을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던 당혜원이 하던 말을 되새겼다.

<저희도 이 이상 사람이 더 늘어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어쩌겠어요?>

그나마 내가 이미 양하정을 건드렸기도 하고, 아예 데리고 살기에는 양하정의 남편이 오절의 일인인 팽무도이기에 어렵다는 점 때문에 다들 큰 반대는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이쪽에서 치고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성연군주는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 이상 깊은 관계를 가질 의도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야 당연한 것이, 모르긴 해도 군주의 남편감이라면 상당한 명문가의 사람일 것이 틀림없었다.

반응만 봐도 자지는 나보다 한참 못할 것이고, 무공을 잘할지는 미지수.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을 종합점수로 따져보자면 나보다 훨씬 나은 상대일 것이 분명하다.

'당분간은 기분좋은 씨뿌리개 쯤으로 보고 있었겠지만... 관계를 지속하다보면 평가가 역전될 거야.'

하룻밤 떡친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개선된 상황이었으니, 언젠가는 남편보다 나를 중요시할 것이고 그 순간 파국이 온다.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치고나가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는 말이다.

양하정이라는 존재를 바탕으로 내가 여자를 여럿 데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나를 눈엣가시 보듯할 황실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준다면?

나는 그런 계산을 바탕으로, 성연군주를 찾아갔다.

"오, 어쩐 일이더냐? 본녀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다니..."

"그랬던가요? 앞으로는 부르시지 않으셔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성연군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옆에 시립한 양하정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내게만 그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예법 같은 것으로 잔소리를 하지는 않는 편이었기에 비교적 편하게 인사를 해도 넘어가주었다.

"그보다 들어보거라, 내 듣기로 운가상단이라는 곳에서 특이한 기물을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양수기라는 것인데, 막대를 위아래로 움직이기만 해도 물이 쏟아지는..."

아, 사천에도 양수기가 깔리고 있구나. 운가상단이라면 마교 소유의 운가전장과 같은 계열사가 분명하니, 영호경이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연군주는 그 기물이 대체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옆에 있던 조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찌 귀하신 몸께서 그런 곳에 걸음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랫것들이 알아서 확인하면 될 일이옵니다."

"이것 보거라! 이런 벽창호 같은 자가 나를 이리 막고 있다는 말이다!"

"필요하시다면 운가상단에 명하여 견본을 하나 올리라고 하시옵소서. 장인을 데려와 분해하여 그 구조를 명확히 설명하게 하는 것도 가능..."

"듣기 싫다! 썩 나가있지 못하겠느냐!"

성연군주의 호통에 조장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뒷걸음질쳐서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나만 단둘이 놓고 가기에는 불안하겠지만, 양하정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겠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면 따로 작업칠 것도 없이 어머니 말대로 할 수 있겠는데?

"저 자는 어찌 말귀를 저리도 못 알아들을 수가 있는지... 꼭 기물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백성들이 어찌 사용하고 있는지 보아야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쓰는 모습을 봐야 뭐라도 알 수 있지, 자기들끼리 견본이나 딱 봐서 무엇을 알겠는가?

나는 그녀의 하소연을 한동안 들어주다가, 씨근덕대면서 말이 가라앉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군주님, 정말로 보러가고 싶으십니까?"

"나도 그리하고 싶으나, 저 자는 내 명을 듣지 않는다. 부왕께서 보내신 자이니, 명이 거두어지기 전까지는 내 신변에 조금이라도 해가 갈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내 전음을 들은 성연군주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한편, 양하정에게 똑같은 전음을 반복해서 들려주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성연군주와 눈이 마주치고는 결국 수긍했다.

자, 복수의 시간이다.

조장은 호통을 들으며 내쫓겼지만 사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역시 백성을 위하시는 마음만은 누구 못지 않으시구나.'

최근 들어 강윤이라는 자와 관여하면서 자랑스러운 동창의 일원으로서 회의감이 들게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면모는 바로 저런 부분이었다.

하늘 아래 가장 귀한 자들인 황족으로서 아랫사람의 고충을 진정으로 살피려드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안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안 그래도 이 의원에서 어떤 고수가 날뛴지 보름도 지나지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만큼 시전 같은 곳에 그녀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조장은 군주가 앙심을 품는다해도,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늦는군.'

그런데 사내가 병실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군주가 문 안의 사내와 몸을 섞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고, 차츰 조바심이 들어 안에 들어가볼까 고민하던 그 때였다.

'어느새...!'

등 뒤까지 소리없이 다가온 기척을 느낀 그는 질풍처럼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이미 수혈을 짚여 단련된 육체는 무너져내리고 부릅뜬 눈은 수마에 속절없이 감겨내렸다.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린 여인의 입모양을 잠드는 머리로 필사적으로 해석했다.

'귀하신...'

시야는 점점 닫히는 와중에도 초인적인 의지로 그것을 전부 읽어낸 조장은 허탈함을 느꼈다.

'귀하신 분의 뜻이다...'

그것은 그가 강윤을 납치할 당시 의식을 잃어가던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즉, 이 여고수는 군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뜻.

'그 개자식이...!'

조장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강윤의 수작임을 알아차렸지만, 더는 의식을 유지할 수 없던 그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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