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72화 (272/383)

밀푸색마 EP.272 근데 쫄린다 (2)

"호오... 그랬군. 그렇다면 이전에 어디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예,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라..."

성연군주는 그 날 밤 사라진 사내가 크게 다쳐 무려 이레동안이나 자리보전을 해야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양하정만이 아니라 호위 중에 일부도 딸려보낼 것을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지금 보니 다행히도 많이 나은 모양이어서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저 자는 왜 저렇게 멀대같이 저기 버티고 있는 것이냐...!'

사내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는데, 호위랍시고 버티고 서있는 조장은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카님께서 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알 수 없으나, 부디 그의 의향을 존중해주세요.>

성연군주가 사내와 정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하정이 나중에 그녀에게 슬쩍 한 말이었다.

물론 성연군주로서도 사내가 제법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당장 부마를 갈아치워야겠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킬 생각도 없었던 성연군주는 일단 서로에 대해서 잘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조장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줄 생각조차 없는듯 완강히 버티고 서있었다.

"그런데, 군주님.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무, 무슨 말이냐?"

그 말은 오히려 그녀가 사내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지만, 성연군주는 문득 사내의 질문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살짝 발개진 성연군주가 한쪽 손을 귀 주변에 대고 다른 손을 까딱이자, 사내는 잠시 조장의 눈치를 보더니 귀를 살짝 들이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귀에 입을 가져가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속삭였다.

"아이가 생기려면 아직 한참 멀었느니라...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것이야..."

'아이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다니, 남자란 것들이 다 그렇지.'

성연군주의 속삭임에 잠시 얼이 빠진 사내가 곧 표정을 가다듬고 이번에는 전음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군주님의 체내에 잠들어있는 영약의 잔재가...]

"흠, 흠! 그 말이었느냐? 내 오해를 했구나!"

제멋대로 오해를 해서 사내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던 성연군주는 부끄러운 나머지 애써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러다 사내가 말한 것에 귀가 솔깃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얼른 말했다.

"잠깐. 그런데 영약의 잔재라고 하였느냐?"

"예. 아마 상당한 고수의 도움을 받으면 어렵지 않게 내공화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이미 근골이 굳어 그리 높은 수준은 되지 못하겠지만 호신과 건강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내의 말에, 성연군주는 그만 사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 의원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주약선은 물동이를 내려놓고 있는 일꾼의 말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아... 문제 없습니다. 앞으로는 시전 쪽에서 물을 길어와도 괜찮을듯 싶군요."

약을 달일 때는 물도 중요하다.

그래서 새벽마다 일꾼들이 일어나 의원 안에 설치되어있는 우물을 사용해 맑은 물을 긷는데, 최근 시전에 양수기라는 것이 생겨 거기서 떠온 물을 확인하던 참이었다.

막대를 위아래로 움직이기만 하면 신통하게도 물이 쏟아져나오는 기관장치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나 편한지 의원 안에서 물을 긷는 것보다 바깥에서 물을 날라오는 수고가 더 적다는 것이 일꾼들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사실 주약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환골탈태라니...'

제갈미령의 출산을 도와준 이후, 언소영이 환골탈태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주약선은 계속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린 상태였다.

사실 언소영은 절정의 끝을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다. 그야말로 언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서도 이상하지 않은.

하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 그녀로서도 치유할 수 없는 흉터가 남아버린 상태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환골탈태를 이룩하다니?

'정말로 우연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주약선의 직감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알맞은 순간에 환골탈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천하에 내로라하는 수많은 절정고수들이 가운데 고작 한 줌 밖에 안되는 소수만이 허락받는 경지를, 인위적으로 오를 방법이 있다면 이미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에 초절정고수를 보유하지 못하는 곳이 없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무림이 관부를 뛰어넘어 무림인 출신 황제가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어쩌면 단 한 사람, 그런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단 하나 있었다.

"강 소협...?"

"아, 주 의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성 부인의 병실을 다녀오는 모양인 강윤과 마침 마주친 주약선은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자신의 표정을 고쳤다.

"성 부인께서 혹시 또... 뭔가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것은 아닙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안부 인사차 들렀을 뿐입니다."

한창 머릿속을 맴돌던 사람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무심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버린 것을 후회하며, 주약선은 은근히 사내를 살폈다.

남편이 있는 여인 여럿을 아내로 두고 있다시피한 사람. 심지어 의모인 제갈미령의 아이 역시 사내의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약선은 보고 있었다.

그것도 어디 여염집 여인도 아니고, 하나같이 이름난 무림세가의 여인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 사람이야...'

"아무래도 성 부인께서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으로 염려가 많으실테지요. 몸을 잘 관리하시면서 기다리시면 곧 들어설 것인데, 안타깝네요."

주약선은 거기까지 말한 다음,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사내에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최근까지 언 여협께서 앓고 계셨다는 것은 알고 계셨습니까?"

"...아, 그 이야기 말씀이시군요. 다 나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주약선은 평생 의원으로서 살아온 탓에, 남의 안색을 살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특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내가 지금 짓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 정말로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 아닌지 얼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예, 그래서 한시름 덜었습니다. 여인의 몸에 남는 흉터라는 것은, 그것이 크지 않은 것이라도 악몽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치료방법이 굉장히 특수하다고 하던데... 혹시 소협께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약선이 택한 것은 정면에서 부딪혀보는 것이었다. 정말 사내가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그저 천행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그 이후로도 몇 번 정도 더 찔러보았지만 사내의 표정만 봐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당분간 지켜봐야겠어...'

그녀에게 있어 사실 무공은 어느 정도의 호신, 그리고 내력을 사용한 치료만 가능하다면 충분한 것이었다. 혹여 절대의 경지를 밟더라도 타인을 해치는 일에 매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환골탈태를 인위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어디까지나 주약선의 추측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거대문파와도 직접적인 인연이 없고, 그러면서도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강윤이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혹시 그것을 의술에 접목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세상의 병자들은 더욱 쉽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주약선은 사명감을 불태우며 자리를 벗어나는 강윤의 등을 향해 흔들림없는 시선을 보냈다.

'죽겠다...'

주씨 둘이서 쌍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탓에, 나는 대화만 나누다왔을 뿐인데 지치는 기분이었다.

아, 참고로 한자는 서로 다르다.

아무튼 주약선은 환골탈태에 대해서 뭔가 냄새를 맡은 느낌인데, 사실 이 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면 자기가 뭘 어쩌겠는가.

만약 군살을 빼고나면 절세미녀였다는 전개가 기다리고 있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지만, 일단 이 부분은 넘기고.

'성연군주는 어쩌지...?'

걱정하던 것과 달리 성연군주는 딱히 내게 해코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정겹기까지 한 태도에 나는 편안함마저 느꼈다.

솔직히 내가 다시 덮치려고 하면 성연군주는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문제였다. 덕분에 나는 무림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밀프에게 손을 대는 것이 망설여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

'차라리 그냥 씨앗제공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황제의 손녀, 그 중에서도 제법 총애받는 손녀라는 그녀는 명백히 나를 특별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게 다 쑤셔박히기만 하면 극한의 쾌락을 선사하는 마성의 좆이 문제였다.

일단 체내에 남아있는 잠력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어떻게든 상황은 넘겼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이만 가지고 쿨하게 넘어간다면 그걸로 끝이다. 나도 내가 황족 따먹어봤다고 나발을 불 생각은 결코 없으니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해피엔딩의 완성이다.

'하지만 나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들면 지뢰가 두 개나 생긴다.'

첫째, 내가 아내가 밀프로만 여럿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성연군주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

둘째, 성연군주가 그걸 납득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황실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넘어갈 리가 없다는 것.

"답이 안 나온다..."

언젠가 지금까지 건드린 여자 중에 하나의 남편이 튀어나와서 그 사람한테 죽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설마 납치강간을 당한 다음 가해자한테 위협을 느끼는 미래는 상상도 못해봤다.

하다못해 성연군주가 대줄 때 좋다고 좆대가리를 들이밀지만 않았어도 그나마 정당성을 주장할 여지가 생길텐데... 에라 등신아...

"...윤? 왜 여기서 웅크리고 끙끙대고 있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당혜원이 소율이를 안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

나는 그냥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슬슬 당혜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는 소율이와 눈을 마주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 않아요."

"...뭐에요, 그게?"

솔직히 남자된 입장에서, 무슨 일이든 쪼르르 아내들에게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나보다 인생경험도 많고 돈도 많고 평균적으로 무공까지 높은 여자들이라고 해도 가장으로서 그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집을 피우기에는 그에 휘말릴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 머리에서는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다 불러모아주겠어요?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혼자서 안 된다면 집단지성이다. 어떻게든 내 좆대가리가 불러온 이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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