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71화 (271/383)

밀푸색마 EP.271 근데 쫄린다 (1)

제갈미령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융(隆,높다, 왕성하다)이라 이름지은 아이를 정겹게 안아주고 있는 사내에게 주약선이 물었다.

"고 대협께서는 오지 않으십니까?"

"아버지께서는 바쁘신 일이 있으셔서 바로 오시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제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계신 거겠죠."

딴은 그러했기에 주약선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제갈미령 역시 틀림없이 잘 보살펴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약간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애정이라고 해도, 주약선은 그것을 의심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산모께는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조혈과 보양에 좋은 약재를 준비해드릴테니 그것을 달여드시면서 정양하시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사실 제갈미령은 무림인,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충분한 휴식과 회복을 거치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주 의원."

"당연히 해야할 일인 것을요. 그보다 언 여협을 뵙고 가도 되겠습니까?"

푸근하게 미소를 지은 주약선은 사내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저 쪽에 있는 시비가 안내해드릴 겁니다."

이 곳은 의원의 일부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사내와 그 일가의 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더라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안내를 받아 언소영에게 도착한 주약선은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표정을 또 보게 되었다.

아까 사내가 짓던 것과 굉장히 유사한 표정에, 주약선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일단 인사를 마친 다음 즉시 준비해온 약재를 꺼내보이며 언소영에게 말했다.

"언 여협, 당장 직접 칼을 대서 고칠 방법은 없습니다만 여기 이 약재들을 사용하면 몸에 남은 독기의 흔적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실상 이미 독기는 완전히 몰아낸 상황이었지만, 홍살사의 독은 지독하기 그지없어 피부와 그 밑까지 엄청난 흔적을 남겼다.

피부를 벗겨내지 않는 이상 그 흔적을 지울 방법은 없었는데, 피부를 벗겨내면 그 자리는 더욱 흉한 상처가 자리하게 되는 상황.

주약선은 그런 언소영의 처지를 동정해서 바쁜 와중에도 애써 시간을 내서 치료를 위한 약재를 구해온 참이었다.

"이건 빻아서 물에 개어 바르는 것이고, 이건 달여서 먹는..."

"주 의원."

물론 언소영으로서는 그런 배려가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그 배려는 이제 무의미해진 참이었다.

주약선이 남편 쪽을 먼저 들렀다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다.

그럼에도 별말없이 그녀를 보냈다는 것은, 전적으로 언소영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를 맡긴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 우선 안쪽 방으로 가실까요?"

남에게 쉽게 보일 수 있는 부위는 아니었지만, 상대는 같은 여성에 의원이기까지 하니 별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약선은 하얗고 깨끗해진 가슴과 언소영이 곁들인 설명 몇 마디에, 절대로 남에게는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의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틀이 지났다.

"우쭈쭈쭈... 아이구, 귀여운 녀석..."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잠든 작은 생명체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융이는 그냥 시도때도 없이 잤다. 잠이 깨면 젖을 먹고, 배가 부르면 제대로 초점도 안 잡히는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또다시 잠에 든다.

이미 소율이 때도 보았던 모습이지만 이런 꼬물이도 자기 밥은 챙겨먹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라 다행이니?"

"글쎄요... 저는 일단 튼튼하기만 하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융이는 일단 대외적으로는 내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들인만큼 고가표국을 이어나갈 후계자가 되는 셈이고 후계자로는 당연히 아들이 좋겠지.

"그래도 아들이 몸이 더 튼튼하기는 하겠죠."

"그렇지?"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서 기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것에 별 관심을 안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밥도 잘 먹고 있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절대 부족하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내 여자들을 전부 초절정고수로 키우느냐의 여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지만, 돈으로도 무공으로도 남들에게 꿀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융이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의 무공을 배울 것이고, 견이나 소율이 같은 경우에는 등선공을 그대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색공으로서의 특성을 지우고 가르쳐준다면 될 것이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융이에게도 가르쳐도 좋고. 까놓고 말해서 아버지 무공보다는 성취가 더 빠를 확률이 높으니까.

아기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며 어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데, 바깥에서 혹시나 아이가 깰까 염려되는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어른, 외부에서 전갈이 들어왔습니다만... 성 부인이라는 분께서 보내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시비가 전해주는 성 부인이라는 이름에 나는 잠시 잊고 있던 문제를 떠올렸다.

"...그 사람, 황족이라고 했지?"

"네..."

주여린. 양하정이 알려주기로는 성연군주라고 불리는 그녀가 나를 다시 찾은 것이다.

'어쩌지...?'

당시에는 워낙 상황이 비상사태라서 뒷일 따윈 생각 안 하고 막 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내력을 조절해서 상처 하나 안 남게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황족을 집어던지고 온 것 아닌가.

대통령 일가붙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로열 블러드 그 자체인 황족을.

'다행히 질내사정할 때 정어법은 안 풀었지만...'

내력이 봉쇄되어있는 상태로 사정한 첫발만큼은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애초에 이름 석 자만 듣고서 확정임신질싸를 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좀 더 구슬려서 완전히 호구조사를 마친 다음에서나 할 생각이었는데, 싸고보니 황족이었기에 너무 사안이 큰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어미가 같이..."

"아닙니다."

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어머니가 같이 가줄지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나는 단칼에 잘랐다.

혹시나 일이 꼬여서 도망자 신세가 되더라도 다른 사람은 최대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맞다.

"별 일 없을 겁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피해자다. 그 상황은 정당방위다.

애초에 나는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몸만 피할 생각이었지만 주여린이 한 번만 허락하겠느니 뭐니 하면서 마치 내가 강제한 것마냥 몰아간 것뿐 아닌가.

'근데 쫄린다.'

법치주의고 나발이고 윗대가리의 말이 법인 시대에서, 나는 그 윗대가리 중의 윗대가리를 만나러 가는 걸음이 굉장히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왔군. 따라오시오. 기다리고 계시니."

조장은 죽을상을 쓰고 있는 표정을 쓰고 있는 사내를 보니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절대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군주의 명이 귀에 아직도 울릴 지경이었는데, 적어도 이 사내 스스로는 자신이 얼마나 죽을죄를 지은 것인지를 알고 있는듯하지 않은가.

그 마음고생만으로도 배가 부른 심정이었지만 조장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정면 대결이라면 이 자는 나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

암습과 호위에 특화된 조장의 입장에서, 정면대결을 벌인다면 강윤에게 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자가 만약 허튼 생각을 품고 군주마마를 노린다면, 내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죽이리라.'

그렇게 군주가 자리하고 있는 일반 병실에 도착하자, 조장은 안쪽에 기별을 넣었다.

[흠, 흠! 벌써 왔느냐? 들어오거라!]

조장은 문을 연 다음 사내의 등 뒤를 따랐다. 사내가 수상한 행동을 보일 경우 즉시 칼을 찔러넣기에 최적의 위치였다.

"왔느냐?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하여 그간 찾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건강한듯 싶어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제 쾌유한 것이냐?"

"예...?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조장은 제 이마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겁간을 당한 몸이면서도 군주는 사내를 반갑게 맞이했고, 어안이 벙벙하던 사내 역시도 조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지 않은가.

"이리 와서 앉거라. 본녀는 그대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이 있느니라."

"...괜찮겠습니까? 귀하신 분을 접해본 경험이 없어 마주 앉아도 되는 것인지 예법을..."

조장은 내심 무릎을 쳤다. 사내의 말이 백 번 옳았다. 어딜 감히 천한 강호의 무부 따위가 귀하신 황실의 자손과 마주 앉는다는 말인가?

"본녀가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황족의 말보다 위에 서는 예법 따위가 있을성 싶으냐?"

이젠 자신의 눈알을 뽑고 싶은 심정이 된 조장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사내를 납치해온 것은 조장 본인이었고 사내는 어디까지나 포박된 상태에서 군주에게 범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계기로 포박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사내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은 합의하에 관계를 벌이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 혹시, 고향이 어떻게 되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내를 데려오기 전에는 제법 이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던 군주의 반짝이는 미소는, 장님이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사내에게 가진 커다란 호의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장은 불경하게도 잠시나마 황실에 충성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품은 자신을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다.

섬서성, 화산파.

능휘연은 가볍게 매화검법을 풀어내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련을 항상 집중해서 짧고 빠르게 끝내는 것을 선호했고, 어머니인 매소향은 그런 그녀의 성격을 배려해서 매일같이 달성해야할 과제를 골라주고는 했다.

그 과제가 어려울 경우에는 어머니가 곁에 붙어서 지켜봐주고는 했는데, 오늘이 마침 그런 날이었다.

"검결을 가볍게 풀어내는 것은 좋지만 너무 가벼우니 검세가 모호하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아지는구나."

"좀 더 무게감 있게 풀어내면 될까요?"

"음... 그런 문제가 아니로구나. 우선 보렴."

매소향은 검을 뽑아서 똑같이 검로를 밟아가기 시작했다.

능휘연이 그랬듯, 가볍게 풀려나오는 매화검법은 허공을 급격하게 메워나갔지만, 뭔가가 달랐다.

검이 장악하는 권역이, 부분부분마다 명확하게 다른 성격을 보이며 펼쳐지는 모습에, 능휘연은 그 검초를 피하는 자신을 상상하다 어느새 허초를 피한 끝에 실초에 붙잡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해했니?"

"네, 어머니. 똑같은 초식이라도 변초의 전개는 무궁무진하고, 검세가 모호하면 모호한대로 쓸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를 둔다면..."

"우웁...!"

말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검로에 살려내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능휘연은 당장 깨달은 것이라도 일단 말로 풀어내던 차에 매소향이 입가를 가리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왜... 괜찮으신가요? 지금 당장 의원을..."

"아니, 아니다!"

조금 전까지 딸이 또 한 걸음 발전했다는 사실에 부드럽게 미소지어주던 어머니가 무섭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붙잡는 것을 보고, 능휘연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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